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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19.11.15 20:00 수정 2019.11.27 16:34
영국 귀족 가문의 미술품 애호가인 존 개스비는 스물다섯살이던 1914년, 국제변호사로 일본에 정착한다. 그는 조선으로부터 마구 반출된 고려청자를 접하고 "빛과 형태가 너무나 훌륭하다"며 수집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이르러 그의 고려자기 콜렉션은 자타가 인정할 정도로 최고가 되었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일본은 군국주의로 치달았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이 개시되었다. 이런 정세에 불안감을 느낀 그는 귀국하기로 하고 소장하고 있던 보물급 수장품들을 모두 처분코자 한다.
 
이때 간송 전형필은 충남 공주의 논 1만 마지기를 팔아 기와집 400채에 이르는 돈을 지불하고 수장품 전부를 인수한다. 그 안에는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65호), 청자오리형연적(국보74호)을 비롯 각종 접시와 대접 사발 등 다양한 기종이 망라되어 있었다.
 
간송 전형필은 국운이 저물어가던 1906년 서울 종로4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무과 출신으로 통정대부를 지냈으며 종로 일대 상권을 장악, 전국에 농지를 보유하고 있던 만석꾼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휘문고보를 나와 와세다대학 법학과에 들어갔다. "적의 심장부에 들어가 배워야 한다"는 부친의 권유에서다.
 
많은 선후배들이 법학과를 졸업하고 식민지 관리가 되거나 변호사가 되는 길을 택했다. 공교롭게 스물네 살에 부친이 타계해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전형필은 '식민지 청년'으로 어떤 길을 갈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한다.
 
이때 그에게 길을 일깨운 준 스승이 위창 오세창이었다. 휘문고보 은사 고현동을 통해 만난 오세창은 3.1만세운동의 대표였고 민족 서화계의 지도자였다. 그는 간송에게 "문화재를 지키는 것이 독립운동이다"라는 일깨움을 줬다. 그리고 "맑은 계곡물 간, 소나무 송", '간송'이란 호를 내려주었다.
 
전형필의 청년 시절은 나라가 무너져 온 천지에 도굴꾼이 넘쳐났고 수많은 문화재가 일본으로 흘러가는 상황이었다. 그는 위창의 가르침을 따라 일제에 영합하지 않았고, 식민지에 협조하는 법률가의 길도 포기한다. 그 대신 모든 재산을 바쳐,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문화재를 모으고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유물을 되찾는 데 인생을 건다.

전노협 백서를 만든 사람들
 
양규헌. 그는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1990~1995)의 마지막 위원장이었고 '불안정노동철폐연대' 대표를 거쳐 지금은 '노동운동역사박물관'을 추진하는 '한내'의 대표다. 그도 어느덧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그가 노동운동역사박물관을 추진하게 된 계기는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민주노총이 만들어지자 전노협은 해산을 결정한다. 전노협은 마지막 사업으로 백서 발간을 결의하고 양규헌은 이 사업을 총괄하게 된다. 전노협 조직부장을 역임했던 김종배를 팀장으로 하고 집필진과 자료분류·색인·입력을 담당하는 다양한 부서들이 만들어졌다.
 
백서 작업은 무척 힘들었다. 당시 지역 노조에서 보내온 물품과 문서, 책자는 엄청난 양이었다. 깃발과 머리띠, 삐삐(호출기)와 무전기, 등사기와 철필 등 소중하고 땀과 눈물이 깃든 물품들도 많았다.
 

한내가 소장하고 있는 전노협 활동 당시 물품들각 단위 노조에서 보내온 물품은 등사기, 타자기, 삐삐 등 다양했다. ⓒ 민병래


무엇보다 어려웠던 일은 모든 자료가 아날로그 자료였다는 점이었다. 손으로 그려 쓴 노동조합 회보, 타자기로 친 회의록, 등사기로 민 유인물 등등. 그래서 자료를 디지털로 바꿔야 했는데 당시 스캐너 수준이 너무 조악해 일일이 타이핑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전노협 백서발간' 광고를 보고 근 60여 명에 이르는 자원봉사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료 입력을 해줘 6개월 후에는 집필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당시 청산위원회에 남아 있던 자금이 너무 부족해, 1년 6개월 동안 상근자들과 자원봉사자들에게 해준 것은 짜장면, 어쩌다가 탕수육을 곁들인 점심이 고작이었다. 그런 어려움을 딛고 1997년 13권 분량으로 <전노협 백서> 초판 300질을 발간할 수 있었다.
 
발간을 기념하는 자리 역시 중국집이었다. 탕수육에 깐풍기, 고량주까지 더한 제법 풍성한 자리였다. 양규헌은 이날 "자기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사업을 마무리했다"며 기뻐했다. 그가 현장을 기록하고 시대를 증언하는 사업으로 첫 결실을 이룬 날이었다.
 
전형필이 온 힘을 다해 모은 유물은 이광수가 국민총동원령을 부르짖고 모윤숙이 학도병 참가를 독려하던 암흑 같은 시절에서도 기적같이 지켜졌다. 그가 우리나라 최초 개인 박물관인 보화각을 지어 은밀하고도 극진히 보존한 덕분이었다(보화각은 1962년 전형필 사후 '간송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한다).
 
그런데 정작 참화는 해방 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벌어졌다. 개전 며칠 만에 북쪽 군인들이 보화각에 들이닥쳤고 반출을 시도했다. 그런데 워낙 양이 엄청나 포장 작업이 지연되었다. 전황이 낙동강에서 교착되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국군이 올라오자, 그들은 퇴각했고 보화각의 보물들은 온전히 남았다.

그러나 이도 잠시, 중공군이 남하하자 간송은 중요한 문화재만 겨우 챙겨 가지고 부산으로 피난갔다. 당연히 보화각에는 수만 권의 장서와 서화, 도자기들이 그대로 남은 상태였다. 그가 부산으로 떠난 지 얼마 후 보화각의 수장품들이 시장에 돌아다니는 사태가 벌어졌다. 평생 모은 문화재들이 흩어져 불쏘시개로, 초벌 벽지로 쓰여지는 쓰라림을 맛봐야 했다.

품 속의 전노협 깃발

양규헌도 차원은 다르지만 간송과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1997년 전노협 백서를 발간하고 남은 자료가 무려 사과상자 600여 개 분량이었다. 이를 민주노총에 이관코자 했으나 받아들이고 보관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전노협 신문 합본호나 주요 자료들이 폐지 취급을 받았고 고물상에 근으로 팔리는 상황도 생겼다.
 
결국 양규헌과 백서 발간팀이 자료 보관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많은 자료들을 보관할 공간이 없기에 이때부터 자료 상자들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경기도 안양에서 몇 년 머물렀고 이후에는 파주와 충남 당진의 농가창고, 또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자료 한번 옮기는 데 1톤 트럭 다섯 대가 동원되어야 할 정도였는데 돈이 없으니 우아하게 포장이사를 할 수도 없었다. 결국 모두 등짐을 지고 날랐으니 그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이렇게 계속되다가는 소중한 자료들이 없어지고 말 것이며 노동운동의 역사도 유실될 것이라는 걱정과 절망감이 컸다. 이런 세월이 10년이나 계속되었다.
 
결국 양규헌과 백서발간팀 동지들은 '노동운동역사박물관'을 만들기로 뜻을 모았다. 간송이 서울 성북동에 세운 보화각과 비교할 수조차 없지만, 영등포에 조그마한 공간을 얻어 자료상자를 풀고 소박한 출발을 했다. 뜻밖에도 백기완 선생이 "큰 한, 물줄기 내", 큰 물줄기가 되라고 '한내'라는 이름과 글씨를 내려줘 이를 간판으로 내걸었다.

 

백기완 선생이 쓰신 한내 글씨큰 한, 물줄기 내, 큰 물줄기가 되라는 뜻으로 내려준 한내 이름 ⓒ 한내 제공

 
그날 1995년 12월 3일, 민주노총 결성에 따라 '전노협해산대회'가 연세대 강당에서 열렸다. 당시 '제3자 개입 금지'로 수배 중이었던 양규헌을 체포하려고 이중 삼중 검문망이 펼쳐졌고 사복경찰이 대규모로 대학 구내에 포진했다. 그 경계를 뚫고 그는 강당에 진입했고 해산 선언을 위해 연단에 섰다.
 
"전노협에 몸담았던 우리는 자부심을 갖고 민주노총의 밑거름이 되기 위해..."
 
그는 목이 메인 채 연설을 힘겹게 마쳤다. 해산 선언과 함께 '전노협' 깃발을 품에 꼭 안았다. 동시에 강당의 모든 불이 꺼졌다. 장내는 어둠에 휩싸였다. 그러자 강당에 숨어들어와 있던 사복경찰들이 "출입문 잠궈" "잡어! 잡어!"라고 외쳐댔다.

양규헌은 정전이 되자마자 경호조와 함께 신속히 움직였다. 옷을 갈아입고 연단의 반대편 출입구로 이동해 대기하고 있던 부산행 대절버스에 올라탔다. 한편 대의원들은 강당 밖으로 나가면서 경찰의 움직임을 방해했고 시선을 분산시켰다.
 
그 사이 양규헌이 탄 버스는 부리나케 출발했다. 학교를 무사히 빠져나가 어렵게 서부간선도로에 올라탔지만 무전 연락을 받고 뒤늦게 두세 대의 경찰차가 따라붙었다. 경찰차는 경적을 울리며 정차를 명했다. 버스는 무시하고 신정교사거리에서 방향을 틀어 대림역까지 내달았다.
 
대림역에서 잠시 정차했을 때 유인 역할을 맡은 조합원 대여섯 명이 뛰어내렸다. 그리곤 도로를 가로지르면서 여러 방향으로 달려갔다. 경찰도 급히 차량을 멈추고 사방으로 쫓기 시작했다. 경찰이 미끼를 덥석 문 덕에 양규헌과 일행은 유유히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가리봉오거리로 향했다. 거기서 설렁탕 집에 들어가 그 날의 첫술을 들었다. 그때 '삐삐'가 요란하게 울렸다. "대림역 반경으로 검문과 포위망이 펼쳐지고 있으니 빨리 피하라"라는 다급한 전갈이었다.
 
양규헌은 다시 택시를 몇 번씩 갈아타고 신림동 골목 깊숙한 곳에 있는 고시원에 들어갔다. 길고 긴 하루였다. 방문을 닫아걸고 그는 품고 있었던 전노협 깃발을 꺼내 들었다. 땀 냄새는 폴폴 났지만 온전했다.
 
박물관이건 미술관이건 자랑하고픈 소장품이 있다. 간송미술관에서 으뜸이라면 단연 '훈민정음'이다. 일제가 조선어 말살정책을 펼 때 간송은 우리 말글을 지키기 위해서 훈민정음을 애타게 찾았다. 광산 김씨 종택에서 이를 구한 후에는 늘 베개 밑에 고이 모시고 잤고, 피난 갈 때는 품에 꼭 안고 떠났다.
 
그렇다면 '한내'에서 내세울 1호 수장품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날 양규헌이 품에 꼭 간직했던 전노협 깃발이리라. 그리고 으뜸가는 수장품은 13권으로 발간된 전노협백서 초판 한 질일 게다. 
 

해산 당시 보관했던 전노협 깃발 앞에서 노동자인권선언 전시회장에서 양규헌 대표의 모습 ⓒ 민병래

 
간송은 한국 전쟁 이후에 큰 고초를 겪었다. 그의 지가증권이 전쟁을 겪으며 거의 휴지조각이 되었고 그는 전 재산을 잃어버린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미, 1939년 폐교위기에 있던 민족사학 보성을 인수해 운영자금이 많이 들어갔다. 민족미술에 대한 연구 활동, 지원 활동으로 창간한 <고고미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재정난을 겪었지만 그는 소장 문화재를 단 한 점도 처분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 소장품들은 고스란히 남겨져 간송미술관에서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간송이 자신의 신념과 재산으로 역사를 이루었다면 양규헌과 한내는 현장에서 함께 했던 많은 이들을 발기인과 회원으로 모아 역사를 만들고 있다. 전노협 백서 발간으로부터 20여 년, 2008년 자료실 출범부터 보면 10년 세월 동안 한내의 수장 자료는 엄청나게 늘었고 출판, 전시활동도 매우 활발하다.
 
이미 2015년에 16만 건의 기록물을 소장했고 9만 8천 건이 전산화되었다. 지금도 민주노총이나 기타 단체로부터 수천 상자에 이르는 자료보존 의뢰를 받고 있다. 또 '마산수출자유지역 시절 여성노동자 구술기록'부터 '홍익대청소경비노동자 투쟁백서', '쌍용차 노조 10년의 복직투쟁' 등 수십 권의 기록물을 냈다. 2017년에는 87년 대투쟁을 기념해 '노동자인권선언'이란 대형 사진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 노동운동역사박물관을 위해

양규헌은 이제 박물관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적지 않은 돈이 모금되었고 이 빚 저 빚까지 끌어다 2019년 초에 전시실과 수장고 두 동을 세웠다. 건물 층고를 높이고 철근도 3배 이상 써서 지었다. 지금은 본관이 2층이지만 언제든 6층까지 증축이 가능하게 했다. 
 

한내 수장고 앞에서 전노협 현판과 한내 현판을 든 양규헌한내의 수장고엔 수십만 건의 자료와 물품들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 민병래

 
건물마다 태양광 공사까지 마쳐 전기를 판매하며 독립 재정을 꾸려나가기로 했다. 이는 양규헌과 한내의 철칙이다. 주변에서 정부 지원을 받으라 하지만, 정부가 박물관에 개입하면 노동운동 역사에 정부 시각이 개입될 수 있기에, 또 어떤 정권이냐에 따라 휘청일 수 있기에 재정 자립을 으뜸 원칙으로 삼았다.
 
얼마 전에는 국가기록원에서조차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느냐?"고 물어왔다. 또 일본의 오오하라 같은 유명한 사회문제연구소도 한내 운영을 둘러보며 "오도로끼 마시타(놀랍다)"라고까지 이야기했다.

경기도 일산 설문동 한내 터에 서 있으면 수십만 개의 문서와 소장품들이 소리를 낸다. 꼬질꼬질한 작업복과 누런 월급 봉투에서 새어나오는 한숨, "똥을 먹고 살 수는 없다"고 외쳤던 여공들의 흐느낌,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몸을 불태웠던 전태일의 외침들이 들린다.
 
간송미술관은 2020년에 재단장 복원공사를 마칠 예정이다. 아마도 재개관 고사가 열리면 간송은 제물(祭物)을 받으러 내려오실 게다. 기왕 다녀가시는 길이라면 일산 설문동에도 걸음하셨으면 좋겠다. 
 
오셔서 자랑스런 당신의 후예들에게 문화재로 독립운동을 하면서 겪었던 식민지 청년의 고뇌와 깨달음을 들려주고 어깨도 두드려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먼 길 떠나는 양규헌과 한내에게 큰 격려가 되리라.
 
<못다 한 이야기>

1. 이 글 중 간송 전형필에 관한 부분은 간송문화재단 홈페이지(http://kansong.org)에 소개되어 있는 일대기, <간송 전형필>(김영사,이충렬 지음)을 참고했습니다. 인터뷰는 2017년 10월 1차가 있었고 이는 필자 페이스북을 통해 소개된 바 있습니다. 이번 오마이뉴스 게재를 위해 보충 인터뷰를 했고 그 후 변화 발전된 내용을 반영해서 개작했습니다. 
 
2. 한내의 사업현황은 그 홈페이지(http://www.hannae.org)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내에는 양규헌 대표와 사무처장 정경원 자료국장 이황미 연구원 김미화 등 네 명의 상근자와 다수 기획위원, 집필진, 연구자들 그리고 많은 후원인들이 있습니다. 최근 미국대학도서관들에서 '전노협 백서 구입문의'가 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3. 당시 전노협 백서 발간팀의 면모는 아래와 같습니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발간팀-상근조직>
김종배 / 팀장(성균관대 역사교육과 졸, 전 전노협 총무, 조직, 조사통계, 정책위원 등)
김영수 / 연구원(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한국노동정책이론연구소 편집위원 등)
정경원 / 연구원(이화여대 법학과 졸, 전 전노협 후원회, 재정사업, 총무부장 등)
이상호 / 연구원(성균관대 한문교육과 중퇴, 전 지평기획 기획부장 등)
이훈구 / 연구원(인하대 기계학과 졸, 한국노동정책이론연구소 등)
박청석 / 고려대 철학과 졸
정용재 / 동국대 경영학과 졸
방승숙 / 전 방림방적
이상서 / 선문대 휴학
임동호 / 선문대 휴학
이호혁 /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졸
박동민 / 동국대 물리학과 졸
유현경 / 한림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집필 작업에 도움을 주신 분들>
 
--반상근--
안중영 / 동국대 사회학과
고계형 / 고려대 철학과
정재현 / 고려대 철학과
강지형 / 고려대 국문학과
이은호 / 고려대 국문학과
이택승 / 고려대 국문학과
이기림 / 숙명여대 국문학과 졸
 
--자료입력--
김정란, 최 진, 임서현, 정혜경, 이수진, 오수진, 이상은, 김진영 / 이상 이화여대 졸
송유나, 최은정, 최옥주, 이연전, 박귀천, 장선희, 손향미 / 이상 이화여대 졸
권준호 /학원강사, 정영복 / 회사원, 정영두 / 한양대 신문방속학과 대학원
정찬일, 이원만, 김경빈, 신준하, 배성근, 정희수, 안세진, 김필성, 이주미, 민동걸 / 이상 동국대
오은정, 오정아, 노정림, 조경하 / 이상 숙명여대, 박광현, 이화연 / 이상 동덕여대
정창영, 조민환, 김효섭 / 이상 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 김현식, 서정진, 최정훈 / 이상 외국어대 중국어과
오충환, 우혜정, 박소현, 박현숙, 김정숙, 김문희, 정민용 / 이상 외국어대 대학원
정상용 / 외국어대 일본어과, 도병호 / 외국어대 인도어과, 김경환 / 외국어대 이란어과
홍지명 / 노동자영상사업단 '희망', 이황미 / 민주노총 편집실,
차금옥 / 서울지하철 노조 전 차량지부 간사, 김종석 / 공익근무요원

--포스터, 사진, 화보작업--
임진우/고려대 영문과, 이상욱 / 중앙대 사진학과, 안재완 / 대학생신문사
 
--자료분류--
한동휘, 전선형, 한효정, 김은경, 허석재, 진희연 / 이상 고려대
전명숙, 장효정, 김영진, 문 을, 강양구, 정승철, 조오재, 안진희, 온창윤, 정순홍, 이재현 / 이상 연세대
배중원, 박행선, 임채웅, 서승희, 이소영, 이수진, 김유민, 이경주, 정찬필, 정채훈, 김정숙, 전경미 / 이상 선문대
신동준, 홍 석 / 이상 동국대
 
--사진분류--
박정숙 / 노동자영상사업단 '희망', 김점순 / 민주금속연맹 중소사업특위 위원장
 
--신문색인--
김경성, 박선영 / 이상 고려대, 주소영 / 학원강사, 김태균 / 매일노동뉴스(색인 및 광고지원) 편집국장
 
--자료 및 기타 편의제공--
진철두 / 전 대우조선 편집국장, 전제훈 / 기아자동차, 김삼차 / 사업, 정영숙 / 전 전노협 총무부장
신창화, 권명숙, 변은영 / 이상 민주금속연맹 서울지부, 박양희, 최윤정 외 / 민주노총 부천시흥지역본부,
김태연 / 민주노총 기획부국장, 윤화심, 한선주 외 / 민주노총 인천지역본부, 이정림 외 /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
홍여표 / 민주노총 마창지역본부, 이미숙 외 / 민주금속연맹 서부경남지부, 이창우 외 / 민주노총 부양지역본부,
유희양 외 / 민주금속연맹 광주지부, 이선규 / 민주노총 경기동부지역본부, 민동원 /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
김하경 / 작가, 마창노련 백서편찬위원회 사무국장
 
--각권 표지디자인--
심재형 / 선문대 재학
 
--백서 재편집--
박재범, 전주희, ---------------------- /이상 인하대

<양규헌 프로필>

1952년 경북 상주 출생
1968년 화남산업(고등재학중)
1976년 삼영전자
1977년 대한마루콘
1980년 대우전자부품
1988. 대우전자부품 노조위원장
1992년 경기노련 의장
1994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위원장
2001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대표
2007년 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양규헌을 추억하는 사진> 
 

전노협 해산대회에서 깃발을 끌어안은 양규헌 위원장1995년 12월 전노협은 민주노총에 합류키 위해 해산대회를 치렀다. ⓒ 양규헌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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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 줄여서 '사수만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를 빚어내는 일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조명을 비추고 의미를 부여코자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