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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19.11.04 14:39 수정 2019.11.04 14:39

황포군관학교초기 모습. 맨 오른쪽 벽에 쑨원의 유언 첫 구절(革命尙未)이 보인다.(황포군관학교 기념관에서 촬영) ⓒ 조종안

 
제1차 국공합작 산물로 1924년 6월 광저우에 세워진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 이 군관학교는 자금과 무기를 소련에서 지원받아 설립한 소련식 사관학교였다. 그러나 항저우 젖줄 주강(珠江)의 장주도 황포에 자리한 연유로 '황포군관학교'로 불린다. 장주도는 시내 동남쪽 교외에 있는 삼각주로 예전에는 배를 타고 건너다녔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황포군관학교는 우한(武漢), 차오저우(潮州), 뤄양(洛陽), 쿤밍(昆明) 등 7개 분교와 교수부·교련부·관리부·군수부·군의부·정치부·총교관실 등으로 구성됐다. 최고 운영기구인 교본부(校本部) 총리는 쑨원(孫文), 초대 교장은 장제스(蔣介石)였으며, 예젠잉(葉劍英, 교육부 부주임), 저우언라이(周恩來, 정치부 부주임) 등 공산당 유력 인물이 운영에 참여하였다.
 

황포군관학교 차오저우 분교 정문(황포군관학교 기념관에서 촬영) ⓒ 조종안

 
본교는 물론 우한 분교에도 조국 독립을 꿈꾸는 조선의 애국청년들이 교관 및 학생, 입오생(예비생) 등으로 다수 입교하였다. 그들은 이중국적(한국과 중국)을 소지하였고, 이름도 대부분 가명을 사용하였다. 출신 지역도 동북삼성(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중 한 곳으로 위장하였다. 이유는 일제 정보망 포착과 이로 인한 국제적인 분규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황포군관학교는 쑨원 사망(1925) 후 국민당 정권을 잡은 장제스가 우경화되고 1927년 '국공합작'이 결렬되면서 개교 3년 만에 문을 내린다. 짧은 기간임에도 200명 넘는 한국 청년이 졸업하였고, 교관도 배출되는 등 우리 독립운동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최림(崔林)'이란 가명으로 입교하여, 졸업 후 교관을 지낸 약산 김원봉을 꼽는다.
 
황저우의 상징, 월수공원의 '오양석상'
 

월수공원의 오양석상 ⓒ 조종안

 
지난 6월 1~8일, 기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26년의 발자취(상하이에서 충칭까지)를 따라 걷는 '임정로드 탐방단 1기' 단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탐방 다섯째 날(5일)은 광둥성 성도 광저우에서 시작하였다. 현지 가이드와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임정로드 4000km> 저자) 안내로 동산백원, 동교장, 광주기의열사능원 등을 돌아보고 월수공원(웨슈공원)에 들렀다가 '황포군관학교 구지 기념관'으로 이동했다(관련 기사: 조선 청년들이 중국 혁명에 참여한 이유).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월수공원은 숲이 우거진 자연 친화적 공원으로 많은 시민에게 사랑받고 있다. 1929년 국민당 정부가 이곳 월수산(越秀山)에 인공호수 3개를 만들고 공원을 조성했다. 공원에는 다섯 마리 양을 형상화한 오양석상(五羊石像), 쑨원의 유언이 새겨진 중산기념비, 명나라 때 바다와 강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지어졌다는 진해루(鎭海樓) 등이 자리한다.
 
그중 오양석상은 오곡(五穀)을 의미하며 먹을거리가 다채로운 광저우를 상징한다. 그 유래는 전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마다 흉년으로 기근이 들자 주민들이 하늘에 기도를 올렸더니 신선들이 입에 볍씨를 문 다섯 마리 양을 타고 내려와 나눠주고 올라갔다는 것. 이후 양을 숭상하게 됐고, 해마다 추수감사절이면 양들에게 제사 지내는 풍습이 내려온단다.
 
'광둥요리' 본고장에 딱 어울리는 전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 네 개 달린 것 중 책상, 하늘을 나는 것 중 비행기 빼고,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고 할 만큼 식자재가 풍부한 도시. 점심은 당연히 '광둥요리'였다. 현지 가이드는 이곳 요리는 국물부터 마셔야 한다고 권한다. 국물이 담백하면서 시원하다. 요리들이 제각기 독특한 향과 색깔을 지니고 있고 식감도 뛰어났다.
 
'황포군관학교 구지 기념관' 가는 길
 

황포군관학교 구지 기념관 입구 ⓒ 조종안

 
식당에서 나와 황포군관학교 구지 기념관으로 방향을 잡았다. 무심코 창밖을 응시하다가 수염을 늘어뜨린 모양의 가로수와 야자나무, 망고나무 등을 보며 열대의 나라에 온 착각에 빠진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갰다'를 반복한다. 굵은 빗방울이 차장을 때리는가 싶더니 어느덧 해가 뜬다. 이색적인 거리 풍경과 변덕스러운 날씨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후 1시 20분 식당을 출발한 버스는 2시 15분 '황포군관학교 구지 기념관(아래 군관학교 기념관)'에 도착한다. 정문에는 옛 명칭인 '陸軍軍官學校·육국군관학교' 간판이 걸려 있다. 초창기 군관학교는 중일전쟁 때 폭격으로 본부 건물과 함께 사라졌다가 1960년대에 복원했다고 한다. 정문 앞에 재현해 놓은 두 개의 위병소가 추억여행을 떠나게 한다.
 
기념관 부속건물 벽에 써놓은 글귀(革命尙未成功·혁명상미성공)가 눈길을 끈다. 중국 혁명 사업에 신명을 바쳐오던 쑨원이 1925년 베이징에서 세상을 뜨기 전 자신을 간호하던 동지들에게 삼민주의와 오권헌법 실현을 부탁하며 남긴 유언(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동지들은 모름지기 노력하라(革命尙未成功 同志仍須努力)의 첫 구절로 알려진다.
 
설립 초기에는 배를 타고 오갔다는 황포군관학교, 당시 주강은 홍콩과 마카오로 나가는 물길이어서 군함 출입이 잦아 다리를 놓을 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복원한 군관학교 기념관 부근에 생도들이 훈련받는 중국 사관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진 촬영이 금지되고, 입장할 때도 여느 관광지와 달리 절차가 까다로웠다.
 
약산 김원봉과 황포군관학교
 

쑨원의 유언 첫 구절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김종훈 기자 ⓒ 조종안

 
김종훈 기자는 "중국은 1924년 6월부터 3년간(국공합작에 의한 운영 기간) 유지됐던 황포군관학교를 완벽하게 복원해서 기념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자세히 돌아보려면 세 시간쯤 걸리는데, 기차 시간에 맞춰야 하니 한 시간 후 다시 이곳으로 모여 달라"며 "기념관 안에서는 촬영할 수 있지만, 배(경비정)를 비롯해 생도들 생활공간은 찍지 마시라"고 당부한다.
 
"황포군관학교 교육은 약산 김원봉이 의열단원과 입교하는 4기부터 1기~3기와는 다르게 6개월씩 받습니다. 그리고 쑨원이 유언을 남겼음에도 국민당과 공산당 측이 싸우기 시작하죠. 1927년 12월에는 이곳에서 함께 수학한 장교들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게 됩니다. 그해 장제스 총통이 내부 좌파와 공산당을 깨부숴야 한다며 청당운동을 시작하죠, 그 반대급부로 나타난 게 광동코뮌, 아까 봤던 기의열사능원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의열단 의백이고 현상금이 3백억이나 걸린 김원봉 장군이 왜 여기를 택했을까요. 약산이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한다고 했을 때 내부에서 반발이 대단했어요. 왜 중국군이냐. 그것도 초급장교, 소위가 되겠다는 건데 무슨 소리냐, 그런데 제가 누차 강조하지만, 약산의 최종 목표는 군대를 통한 조국 독립이었어요. 그래서 러시아(소련) 장교들이 신식 군대 교육을 가르치는 이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한 겁니다.
 
약산은 여기를 졸업한 뒤 난창봉기(난창기의)에 참여합니다. 근데 광동봉기(광동코뮌)에는 안 와요. 이미 당신이 교육받을 때부터 내부 갈등이 보였던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약산이 상하이에 가 있는 동안 그 일(광동코뮌)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수학했던 4기생들이 참여합니다. 그렇게 동기들이 서로 쏘고 죽이고 난리가 난 거예요. 결과론적으로 저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하고, 우리 민족사에 최초로 좌우 합작이 일어나고. 그렇게 이어지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물론 갈등은 여전했습니다만..."
 

김 기자는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도 황포군관학교와 연관이 있다. 여기에서 교육도 받고 교관도 했다. 조선 청년들이 여기로 몰려들기 시작한 건 장제스 총통이 조선 청년들에게 장학금을 베풀기 시작하는 4기 때부터다, 중산대학도 쑨원이 장학금을 베풀면서 우리 청년들이 많이 모여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념관에서 만난 중국 청소년들이 부러웠던 이유
 

황포군관학교 생도들 침실 ⓒ 조종안

 
일행은 군관학교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항일 무장투쟁의 한 축을 담당했던 조선 애국청년들이 피땀 흘리며 군사교육을 받았던 공간이다. 실제 3년밖에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쑨원이 사용했던 총리실을 비롯해 교장실, 교육실 등이 완벽하게 복원돼있다. 침구가 가지런히 정돈된 침실에서는 훈련을 마치고 잠자리에 든 생도들 모습이 그려졌다.
 
약산의 흔적을 찾아보시라는 김 기자 당부도 있고 해서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다가 4기생 단체사진(북벌 앞두고 열린 출정식 사진)을 발견했으나 안타깝게도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카메라로 찍어 확대하면 어떨까 싶어 일행과 상의했으나 결론은 불가능. 그래도 약산이 교육받은 기간(1926년 3월~10월)을 확인할 수 있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황포군관학교 교장 시절 장제스 모습 ⓒ 조종안

 
황포군관학교 교장 시절 장제스 사진과 기록물들을 쑨원 사진과 나란히 배치해서 놀라웠다. '광주기의(광동코뮌)'가 말해주듯 한때는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했던 원수 같은 존재 아니던가. 그런데도 중국 당국은 역사를 왜곡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10대 청소년들이 안내문을 읽으며 대화도 하고, 기념사진도 찍는 모습이 부럽게 보이기도...
 
역시 반가움과 아쉬움이 교차했던 군관학교 기념관. 공허한 느낌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검은 구름이 몰려오면서 소나기가 쏟아졌다. 유저우(柳州)행 야간열차를 타기 위해 기차역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빗줄기가 차장을 때리는 소리가 경쾌한 음률로 다가왔다. 하지만 버스에 중요한 서류철을 놓고 내린 사람처럼 가슴 한편이 허전하고 허탈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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