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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19.10.10 09:48 수정 2019.10.10 09:48
평양화단을 대표하는 3대 인물이라 하면 옥경(玉磬) 윤영기(尹永基, 1833-1927), 석연(石然) 양기훈(楊基薰, 1843-1911), 그리고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을 꼽는다.

윤영기는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 문하에서 활동하며 새로운 미술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미술교육자라 할 만한 인물이다. 또한 양기훈은 서울의 장승업과 함께 청나라 미술의 영향을 받으며 각각 독특한 미술세계를 갖추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이들 선배들에 이어 물밀듯 밀려들어오는 서구 근대화 물결과 전면에서 부딪히며 미술계의 거물이 된 서화가가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다. 김규진은 하나의 예술 통로만으로는 설명이 쉽지 않은 복합적 인물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서화가로서 유명하였을 뿐 아니라, 미술 교육자로서도 영향력이 매우 컸고, 사진 기술 도입의 선구자로서도 공이 크다. 또한 근대적 의미의 화랑 발전사에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서화가로서의 김규진   
 

김규진 사진. 1919년 <김해강유묵>(우일출판사, 1980) 재촬영 ⓒ 우일출판사

 
김규진은 평안남도 중화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외숙부인 서화가 소남(少南) 이희수(李喜秀, 1836-1909)로부터 서화의 기초와 한문을 공부하였다. 이희수는 평양의 유명한 서예가인 눌인(訥人) 조광진(趙匡振, 1772-1840)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라 김규진도 은연 중에 조광진 필법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스승 이희수의 능력에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미술세계에 갈증을 느낀다.

김규진이 비로소 서화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은 청나라를 주유하며 유명한 중국 서화가들과 교유하면서부터이다. 그는 18세 되던 1885년 중국으로 건너가 8년간 서화를 공부한다. 북경, 양주, 상해 지역을 돌아다니며 오창석(吳昌碩), 오대징(吳大澂) 등과 교유하며 청에서 유행하는 화풍을 배운다. 한편으론 상해에 망명하고 있던 운미(雲楣) 민영익(閔泳翊, 1860-1914)과도 만나 서화에 대한 견해를 나눈다. 

젊은 시절 8년간의 경험은 김규진의 서화 수준을 몰라보게 발전시킨다. 그는 1894년에 귀국하여 정열적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서화가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청나라 유학으로 갖춘 대륙적 필치와 호방한 필력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글씨에서는 전·예·해·행·초의 모든 서법에 능했다. 특히 일반 대자보다 규모가 큰 글씨에서는 당대의 독보적 존재였다. 이제 더 이상 그는 평양 지방 출신 서화가가 아니라, 전국에까지 이름이 널리 퍼진 거물 서화가가 되었다. 

김규진의 큰 글씨는 개인 감상용으로도 써졌지만, 주로 기관의 주문에 의해 쓰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절이나 부잣집의 현판으로 주문 받는 경우가 제일 많았다. 그의 대범하고 활달한 필치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노출된 공간에 사용되는 글씨로 좋았다. 지금도 전국 절집에 걸려 있는 현판 중에 김규진의 글씨가 압도적으로 가장 많다. 김규진의 큰 글씨로 가장 유명한 것은 금강산 구룡폭포 옆 바위에 새긴 '미륵불(彌勒佛)' 글씨이다. 

1918년 김규진은 불교도들의 청으로 금강산 바위에 새길 '미륵불' 세 글자의 주문을 받는다. 김규진은 이 어려운 주문을 위해 '이왕가미술공장'에 특별히 큰 붓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한다. 결국 그의 키보다 더 큰 붓이 만들어졌고, 그는 20여 미터에 달하는 '미륵불' 세 글자를 완성한다.

이 글씨는 성공적으로 벽면에 새겨졌고, 이후 한국 근대 석각 글씨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돌이켜보면 자연을 훼손한 면은 없지 않으나, 워낙 빼어난 글씨라 큰 비난을 받지 않는 경향도 있다. '예술의 힘'을 느끼게 한다.
          

김규진 ‘차군도(此君圖)’ <김해강유묵>(우일출판사, 1980) 재촬영 ⓒ 우일출판사


김규진의 회화 세계를 대표하는 것은 역시 '대나무 그림(묵죽)'이다. 난초나 모란 등 다른 갈래의 그림을 못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화가로서 유명하게 만든 것은 역시 대나무 그림이다. 그의 대나무 그림은 힘이 넘치면서도 유려하고 과감한 필력을 보인다는데 장점이 있다. 얽매임 없이 화면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왕죽(王竹), 풍죽(風竹), 세죽(細竹) 등을 거침없이 그렸다. 

그동안 조선시대 화가들의 사군자가 문인화를 대변하기는 하였지만, 선비들의 취미 그림처럼 소심한 면이 많았다. 그러나 김규진의 묵죽을 중심으로 한 수묵화는 활달한 필치를 바탕으로 거침없는 예술가의 포효를 보이며 회화적으로도 완성된 경지를 보인다. 특히 그의 굵은 대나무를 그린 '왕죽'은 청나라 화가들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양식은 후배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으로 김규진은 다재다능하여 산수화나 영모 등 다른 갈래의 그림도 잘 그렸다. 말 그림이나 폭포 그림, 화조 등에도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수묵화 이외의 그림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1920년에 그린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의 벽화 '내금강만물초승경(內金剛萬物肖勝景)'과 '해금강총석정절경(海金剛叢石亭絶景)'이다. 

이 두 작품은 1917년 화재로 창덕궁 내전 전각이 소실된 후 1920년에 재건할 때 서화협회가 주문을 받았을 때 김규진의 몫으로 할당받은 것이다. 그는 3개월 간 금강산을 사생 여행한 후 만이천봉 절경 중 '만물상'과 '총석정'을 선택하였다. 희정당 벽면에 맞게 화면을 넓게 잡고 호방한 필치로 화려한 채색을 넣어 그렸다. 평소 채색화를 잘 그리지 않았던 김규진의 숨겨진 능력을 엿보게 하는 역작이 나왔다. 

채색의 정교함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시야, 궁궐에 맞는 고급스런 화면 등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명품이다. 실제 풍경에 창조력을 발휘하여 실제 금강산 풍경보다 더욱 신비로운 장면을 연출해 내었다. 마치 신령스런 상상 속의 봉래산을 보는 듯하다. 이 창덕궁 재건 사업에는 '서화미술회' 회원들도 여럿 참여하여 벽화를 남겼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은 김규진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술교육자로서의 김규진

청나라에서 쌓은 김규진의 서화 실력은 압도적인 면이 있어 그와 어깨를 겨룰 만한 화가로는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 서예가로는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7)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더욱이 김규진은 빼어난 지도력까지 있어 금방 서화계의 지도적 인사가 되었다. 이렇듯 걸출한 인품과 실력은 많은 제자를 따르게 하였고, 그는 한국 서화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거물이 되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김규진은 1896년 궁내부 외사과 주사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친 후,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1897-1970)에게 글씨를 가르치는 '서사(書師)'에 임명되었다. 영친왕을 가르친 명예는 훗날 서화가로서 활동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을 맡기도 하였고, 총독부 또는 일본과 관계되는 일을 하는데 많은 제약을 줄일 수 있었다. 

김규진은 또한 1915년에는 미술 연구 단체인 '서화연구회'를 창설하였는데, 이는 1911년에 발족한 '서화미술회'에 이어 두 번째 출현한 근대적 미술 교육기관이었다. 수업 과정은 3년이었다. 이때 배운 제자가 이병직(李秉直), 김진우(金振宇), 이응로(李應魯), 민택기(閔宅基)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서화가로서 일가를 이루었다.

김규진은 자신의 서화에 대한 이론을 책으로 내 교과서로 사용하였는데, 영친왕의 스승 시절 서화교본으로 만들었던 것이 '김규진 화첩'이며, 서화연구회에서의 서화교육을 위한 교재로 만든 것이 '서법진결(書法眞訣)'(1915), '육체필론(六體筆論)'(1915), '해강난죽보(海岡蘭竹譜)'(1916) 등이었다. 이들 책은 서화 교재가 귀했던 근대기에 초보자들의 눈을 뜨게 한 미술사적으로 귀한 출판물이었다. 

사진술 도입과 화랑 경영의 선구자
               

김규진. 고종 초상. 1905년 <빛의 길을 꿈꾸다>(덕수궁미술관, 2018)에서 재촬영 ⓒ 덕수궁미술관

 
김규진의 활동 중 특이한 업적이 일본에서 사진 기술을 배워 온 것이다. 1907년 이후 두 차례나 도쿄로 건너가 사진기 조작법을 배우고 돌아와, 서울 소공동에 '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개설하였다. '천연당'이란 이름은 소공동의 일제강점기 이름이 '천연동(天然洞)'이었기에 붙인 것이다.

근래에 김규진이 찍은 사진이 화제가 되었다. '고종' 임금의 얼굴을 찍은 초상 사진이다. 이 사진은 미국의 재벌 '에드워드 해리먼(1848-1909)'이 1905년 대한제국을 방문했다가 고종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다. 2015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노력으로 이 사진의 존재가 알려졌다. 1884년 지운영(池運永, 1852-1935)이 고종 황제를 처음 촬영한 후 두 번째로 한국인이 찍은 임금 사진이다. 

촬영 장소는 덕수궁 중명전(重明殿) 1층 복도이며, 사진의 오른쪽 위에 '대한황제진 광무9년 재경운궁(大韓皇帝眞 光武九年 在慶運宮)'이라는 글씨가 있어 1905년에 촬영된 것임을 알려준다.

사진 속의 고종은 익선관(翼善冠)에 황룡포(黃龍布)를 입고 앉아 있다. 뒤로는 국화 그림과 창포 그림이 그려져 있는 일본식 병풍이 둘러져 있어 시대적 상황을 보여준다. 인화한 후에 황룡포, 병풍, 카펫 등의 사물에 실감나도록 옅게 채색을 하였다. 

'천연당사진관'을 경영하던 김규진은 1913년 사진관 1층에 한국 최초의 근대 상업화랑인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을 설립한다. 고금서화관은 김규진 자신의 작품을 주로 주문을 받아 제작 판매하였으며, 다른 명가들의 서화를 위탁 판매하기도 하였다. 또한 전문 표구 기술자를 데려와 병풍, 대련, 두루말이 축권 등 표구도 맡아 하였다. 요즘 말로 표구화랑의 원조 격이다.

또한 미술품뿐만 아니라 비문, 상석, 현판, 간판 글씨도 주문을 받아, 마치 현대의 광고회사와 같은 면모도 갖추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업이 확장되자 조각, 도금, 취색 등 환경 미술까지도 맡아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제작해 주기도 하였다. 고금서화관은 당대 작품 매매뿐 아니라 조선시대 이전의 고서화를 매매하기도 하고, 위탁 전매하는 역할까지 다양한 역할을 했던 복합 문화공간이었다. 

김규진이 '고금서화관'을 언제까지 경영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1920년 그가 '천연당사진관'을 폐업했을 때 '고금서화관'을 타인에게 물려주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금서화관'은 1929년 우경(友鏡) 오봉빈(吳鳳彬, 1893-?)이 설립한 '조선미술관'과 함께 일제강점기 한국인에 의해 운영된 대표적인 미술관이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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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