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11 15:36최종 업데이트 19.10.11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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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한국전쟁 발발 후 산내에서 학살된 이들과 유족의 삶을 8주에 걸쳐 살펴봅니다.[편집자말]
김윤백은 이웃 집 일을 하고 얻어 온 보리쌀 한 됫박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 걸로 또 며칠을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에 망연자실했다. 그는 곧 정신을 수습하고 아내에게 "할멈 밥 좀 앉히게"라며 담배를 입에 문다. 아내는 보리쌀을 맷돌에 갈아 산에서 채취해 온 나물과 섞어 쌀을 앉힌다.

반찬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오늘은 그냥 죽이라도 먹을 수 있어 다행이지'라고 생각한다. 마침 밖에서 놀다 온 손자에게 "아가! 밥 먹자"라며 죽을 권한다. 신나게 뛰어 놀다 온 개구쟁이 김상수(1946년생)에게 한 그릇의 죽은 입에 풀칠도 못할 형편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같은 사정이기에 투정은 할 수가 없다.


일찌감치 잠이 든 상수는 그날따라 엄마 꿈을 꾸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자신이 엄마를 따라가면, 엄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걷기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수는 도저히 엄마를 따라잡지 못하고, 그저 목청껏 부르기만 한다.

"엄마, 엄마."
"야가 뭔 꿈을 꾼다냐?"


할머니의 손이 이마에 닿자 상수는 꿈에서 깨어났다. "쯧쯧, 불쌍한 것" 며느리가 아들 한명만 데리고 집을 나갔으니 상수는 엄마 없는 자식이 된 것이었다.

잠시 후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어머님, 어머님 계세요?" 너무나 익숙한 소리에 김윤백 내외와 상수는 너무나 놀라 방문을 열었다. "아가, 네가 웬일이다냐?" 며느리는 옷고름으로 눈물만 닦고 아무런 말을 잇지 못했다.

며느리는 개가(改嫁)해서 아등바등 살려고 노력했지만, 어린 아기를 데리고 살기에는 세상이 녹록지 않았다. 상수보다 세 살 아래인 5살배기 동생은 엄마가 놓고 간 이후 시름시름 앓았다. 결국 몇 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 아이는 세상을 떴다.

갈치 잡이 배 탔던 형제

갈치, 방어, 낙지를 잡는 일이 김호철 형제에게는 이력이 난 일이었다. 그날도 남의 집 배를 타고 종일 갈치를 잡느라 몸이 녹초가 되었다. 김호철은 집에 오자마자 방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잠시 후에 "김호철이 나와" 하는 소리와 함께 군홧발을 신은 이들이 방문을 벌컥 열었다. 잠에서 깨어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김호철은 대꾸 한마디 못하고 진압군에게 끌려갔다. 1948년 11월 초 전라남도 여천군 삼일면 신덕리 섭도에서 있었던 일이다.

진압군에 끌려간 김호철(1921년생)은 어려서부터 남의 배만 타면서 죽도록 일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여순사건으로 '반란군 협조자'라는 누명을 쓰고 끌려갔다. 며칠 후 그의 동생 김홍석도 진압군에게 연행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안에 화(禍)가 났지만 김윤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집안에 재산이라도 있어야 '뇌물'을 쓸 텐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그들에겐 딴 세상 이야기다.

결국 형 김호철은 대전형무에 있다가 한국전쟁 직후에 산내에서 학살되었다. 동생 김홍석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불행 중 다행으로 징역 5년형을 받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런데 뒤늦게 잡힌 여순사건 관련자들이 자신들의 죄를 김홍석에게 뒤집어 씌워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었다.

그렇다면 김호철 형제는 과연 여순사건 당시에 어떤 일을 했을까? 김호철 아들 김상수(74세, 전남 여수시 여서동)의 증언에 의하면 "실제 좌익활동 했던 사람의 모략으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엄하게 죽었어요"라고 한다. 여순사건으로 김호철·김홍석 형제가 이승을 하직한 후 집안의 생계는 순전히 그의 노부모 몫이 되었다. 김호철의 아내는 바로 개가를 했다.

하류인생
 

1948년 10월 여순 사건 때 자식을 잃고 오열하는 주민들


아버지는 여순사건으로 한국전쟁 직후에 학살되고, 어머니는 개가한 상황에서 김상수가 의지할 사람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뿐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남의 집 날품팔이를 해서 그날그날을 연명했지만, 그 일도 매일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상수는 제 나이가 되어서도 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상수와 딴 세상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결국 상수는 남들보다 2년 늦은 10살에 전남 여천군 삼일면 상암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니 그에게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자유는 사치였다. 막내삼촌이 군대를 가면서 초등학교 학비를 줄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결국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를 작파했다. 이전부터도 그랬지만 그때부터 김상수의 '하류인생'이 본격화되었다.
 

증언자 김상수 ⓒ 박만순


10대 때 남의 집 머슴 일을 시작했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걸었던 갈치잡이 배도 탔다. 세상에 누구 하나 의지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20대 후반인 1972년부터는 육지생활을 시작했다. 한 정유회사에서 경비원으로 7년 7개월 일했다.

40대에는 밑천 들지 않는 장사를 했다. 리어카에 수박을 싣고 여수 서시장으로 가 노점상을 했다. 노점상은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노점 단속반이 수시로 뜨면 정신없이 도망가야 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불안정한 생활을 할 수 없기에 새로운 직업을 선택했다.

그가 뒤늦게 선택한 직업은 목수였다. 목수 역시 안정적인 직업은 아니었지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 하류인생의 비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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