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04 08:19최종 업데이트 19.10.11 14:22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한국전쟁 발발 후 산내에서 학살된 이들과 유족의 삶을 8주에 걸쳐 살펴봅니다.[편집자말]
부산으로 가는 배는 그날따라 심하게 흔들렸다. 3등 칸의 선실은 남녀가 뒤섞여 주저앉아 있고, 사람과 짐이 분간이 안 되는 곳이었다. 구석에 앉아 있던 여성은 처음 배를 타는지 멀미를 했다. '욱'하며 입을 막고는 지상의 갑판으로 가는 사다리로 뛰어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얼굴은 핼쑥했다. 벌써 몇 번째 토악질인지 모른다. 삼등칸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삼류인생을 살아온 서민들이라 행색이 고만고만했다.

부산행 연락선 삼등칸에 몸을 실은 황원순은 심경이 괴로웠다. 하늘같이 생각했던 남편이 '반란사건' 와중에 감옥으로 갔으니 말이다. 대구형무소에 있다는 전갈을 받자마자 급전을 만들어 면회를 가는 중이다. '반란사건으로 감옥에 간 이들은 대부분 중형(重刑)을 받는다는디'라는 생각을 하면서 한숨부터 쉬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아랫배를 꽉 잡고 있었다. 실은 아랫배가 아니라 전대(纏帶)를 잡고 있는 것이었다.


면회를 가려면 교통비도 적지 않게 들지만, 음식 장만하랴, 겨울 옷 준비하랴, 많은 돈이 필요했다. 결국 음식과 옷은 대구에 가서 장만하기로 하고, 주변에서 빌린 돈을 전대에 넣고 꽉 쥐고 있었다.

새벽같이 집을 나서 항구에 가서 배를 타느라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피곤이 몰려왔다. '잠들어서는 안 되는데'라고 생각했지만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였다. 잠시 후 배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가난한 면회

황원순은 간단하게 꾸린 보따리를 안고 배에서 내렸다. 대구로 가는 버스정류장을 물어, 걷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대가 홀쭉했다. "아이구머니나"하며 주저앉았다. 전대를 살펴보니 아랫부분이 면도칼로 찢어져 있었다. 배에서 잠든 사이 절도범이 전대를 찢고 돈을 슬쩍해 간 것이다. 한참을 주저앉아 울었지만, 운다고 돈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는 법.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대구형무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면회 시작"하는 소리와 함께 그토록 보고 싶었던 남편 윤신영이 면회실로 들어섰다. 그런데 남편의 얼굴은 불과 몇 개월 만에 반쪽이 되었다. "잘 계셨소?" "나야 잘 있지. 부모님은 안녕하시구?" "임자는 어떻소?" "지야 뭐 잘 있죠." 그렇게 짧은 면회를 하는 내내 황원순은 불안했다. 돈을 절도 당해 음식이며, 옷을 하나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윤신영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남편의 한마디 말은 그녀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빵 좀 갖다 줄 수 없소?" 순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맺혔다.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치 죄인처럼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푹 숙인 채 있었다. 윤신영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운 시절이라 하더라도, 가장 '가난한 면회'를 한 것이다. 가난한 면회는 그렇게 끝이 났다.

좌익 동생 둔 죄로 처형

"한 집에 한 명씩 나와."

소리치며 옆집으로 달려가는 이는 이장이었다. 윤신영(1918년생)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광장으로 갔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이장 옆에는 지서에서 나온 경찰과 우익 청년단원들이 총과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경찰이 이장에게 눈짓을 했다. 이장은 마을 사람들이 서 있는 곳을 한 바퀴 돌며 손가락질을 했다. 소위 '반란군 협조자'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사실 20호가 사는 전라남도 여천군 소라면 죽림리 원죽마을은 조용한 마을이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고래 싸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윤신영의 동생 윤형영은 뚜렷한 신념을 가진 좌익 활동가가 아니었지만, 나라에서 하는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장과 사사건건 부딪혔다. 

사정이 이러니, 이장 눈에 윤형영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1948년 10월 19일 여순봉기가 일어났다. 진압군이 마을에 오기 직전 윤형영은 후환이 두려워 다른 지역으로 몸을 피했다.
 

무기징역에 처한다는 윤신영 판결문 ⓒ 박만순

 
우익청년단과 마을 이장을 앞세운 소라지서 경찰은 '반란군 협조자'를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장은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 윤형영의 형 윤신영을 지목했다. 당시 손가락질은 '사형'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윤신영은 사상이나 이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였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그의 백부는 일본인으로부터 철탑공사를 하청 받아 일했다. 윤신영은 그런 백부 밑에서 막일을 하는 이였다. 해방 후에는 논 13마지기(2600평)와 밭 700~800평을 소유한 중농(中農)이었다. 그랬기에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토지개혁'이니 하는 소리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동생 윤형영이 마을에서 반장 일을 보면서 이장과 다투게 되었는데, 이것이 윤신영이 이장으로부터 '손가락 총질'을 받게 된 연유다.

결국 윤신영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고,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이후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대전 산내에서 총살되었다. 좌익 동생을 둔 죄로 처형당한 것이다.

총 한방에 아버지와 아들이
 

1948년 10월 여순 사건 때 자식을 잃고 오열하는 주민들


윤신영이 지서로 끌려간 지 며칠 후 집안에 또 사달이 났다. 이번에는 윤신영의 막냇동생 윤경영(1931년생)이 경찰에게 끌려간 것이다. 윤경영은 당시 순천농고 재학 중이었는데, 좌익 활동에 관여되었던 듯하다. 경찰들은 무슨 혐의를 잡았는지, 마치 중죄인을 체포한 듯 윤경영의 몸을 밧줄로 묶어 연행했다. 가족들이 울며불며 뒤따랐다.

경찰들은 이웃면인 전라남도 여천군 삼일면 중흥리에 있는 당산나무 아래에 소년티를 막 벗어난 윤경영을 세웠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으면 해"라는 소리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당시 집 나이로 18세인 그는 죽음을 앞두고 부모님 걱정만이 앞섰다.

지휘자의 명령으로 경찰들이 '무릎쏴' 자세로 조준하고 있는데, 한 노인이 뛰어들었다. "이놈들아, 내 아들이 무슨 죄가 있길래, 죽이려 드냐. 차라리 나를 죽여라." 뛰어든 이는 윤경영의 아버지 윤선관이었다. 윤선관의 절규는 이어졌다. "나도 같이 죽여라." 노인의 사정과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찰들의 총구에서는 불이 뿜었다.

"탕 탕 탕."

중흥마을 당산나무 아래에는 두 명의 생명이 고꾸라졌다. 아버지와 아들이 '빨갱이'라는 이름 아래 죽어간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순천농고생 윤경영이 빨갱이라는 이름 아래 처형된 것이고, 윤선관은 그런 아들을 두었다는 죄로 처형된 것이다.

할머니의 유언

"니는 어느 파당(派黨)에도 가입하지 마라."

이 말을 하며 눈을 감은 이는 윤상수(77세, 전남 여수시 덕충동)의 할머니다. 1948년과 여순사건과 뒤이은 한국전쟁 난리 통에 남편 윤선관과 두 아들 신영, 경영을 잃은 여성의 한 맺힌 절규였다. 어떤 이념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념이니 정당이니 하는 것에 진력이 난 그녀였다. 그러다보니 죽음을 앞두고 손자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도 위와 같았다. 
 

증언자 윤상수 ⓒ 박만순


윤상수는 할머니의 유언을 80세를 가까이 둔 지금까지 착실히 지키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그가 가진 직업은 학교 선생님이었다. 순천사범학교를 나온 그는 상암국민학교, 소라남초등학교에서 근무하다 여수 한려초등학교에서 정년퇴직했다. 학교 선생이다 보니 정당에 가입하기도 불가능했지만 이유가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다. 의지만 있었으면 정년퇴직하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는 할머니의 유언이 현재까지도 '삶의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버지와 삼촌, 할아버지가 이념의 파고에 휩쓸린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부 수립 직후에 벌어진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하지만 윤상수 가족의 희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와중에 벌어진 국가폭력이 국민들의 삶을 어떻게 파괴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지난 3월 21일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대법원에서 열린 1948년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를 받고 사형당한 민간인 희생자의 재심결정에 대한 재항고심에 참석해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내란 및 국권문란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장 모씨 등 3명의 재심결정에 대한 재항고심에서 재심개시를 결정한 원심 결정을 확정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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