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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9.09 08:56 수정 2019.09.09 11:22
상해에서는 정신 없이 보낸 반면, 자싱(가흥 - 매만가), 하이예현(해염 - 재청별서)에서는 임시정부의 피난기라는 시기라는 어려움과 대조적으로 자연 경관이 빼어나, 앞서 임정로드의 무거웠던 마음을 조금 내려 놓을 수 있었다.
 
본국을 떠나 상해에서 생활한 14년간, 다른 사람들이 남경·소주·항주의 산천을 즐기고 이야기하는 말도 들었으나, 나는 상해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서지 못해 산천이 그립던 차에 매일 산에 오르고 물에 나가는 취미는 비할 데 없이 유쾌하였다. 산 앞으로 바다 위에는 범선(帆船)·윤선(輪船)이 오가고, 산당의 좌우에 푸른 소나무와 가지가지 단풍이 어우러진 광경은 떠도는 사람에게 더욱 가을 바람의 쓸쓸함을 느끼게 하였다.11) 세월가는 줄 모르고12) 매일 산에 오르고 물구경하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14년 동안 산수(山水)에 주렸는데, 10여 일 사이에 실컷 산수를 즐겼다. - <백범일지> 중에서(P341)

하이예현(해염)에서 다시 항저우(항주)로 이동 3일차 항저우 일정을 시작했다. 첫 일정으로 유명한 서호의 유람선을 탔지만, 그 아름다움을 대하는 태도가 여느 여행과는 다른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한국 분들을 만났는데, 타국 땅에서 그저 한국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서슴없이 독립운동사와 중국 여행의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특별한 경험이었다.

항저우 임시정부 청사에 도착했다. 이곳은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에 비해서 규모가 있었다. 단단해 보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 탐방단 일행들은 안내원을 따라 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벽면 빼곡히 사진들과 자료들이 잘 정돈되어 전시되어 있었다. 임정로드를 함께한 일행 분들은 놓칠세라 전시물들을 열심히 찍으며 안내자의 말을 들었다.
 
사진들을 가리키며 안내자의 말이 이어졌다. 일행들은 안내자의 말과 별도로 사진 한 장이라도 더 남기기 위해 계속해서 사진 찍기에 열심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안내자 분은 단호하게 말했다. 사진 찍는 시간은 별도로 드릴 테니 자신의 말에 집중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설명을 중단 하겠다고 했다.

마음이 상한 듯 했다. 자신이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것과 무관한 듯 자기 옆의 사진을 찍는데 집중하는 듯 하니, 안내자로서 무시 당하는 느낌이 들었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다. 그러나 사진을 찍었던 분들은 그럴 분들이 아니었다. 분위기는 순간 싸늘해졌다. 웃으며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의 것을 넘어섰다. 오해의 순간이었다.

전시관 안내자의 강한 책임감

마음이 상했을 안내자를 생각하니 나라도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라고 한마디라도 건네고 싶었다. 분위기는 순간 너무 차분해졌지만, 그 분이 얼마나 책임감을 가지고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느껴져서 감사함이 더 해졌다.

이후 다행히 순조롭게 설명이 잘 마무리 되고, 조금 전 일에 대해서 일행 중 누군가 말을 꺼내려 하기도 전에, 이번엔 관장님이 먼저 직접 올라와 안내자로서 조금 과했을지 모르는 표현에 대해 사과를 하셨다.

우리 일행들은 더 몸 둘 바를 몰라 일제히 손사래를 치며 오히려 세심하지 못한 것을 사과했다. 이 일로 오히려 서로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마련된 듯했다.
 
관장님은 친절하게 우리 일행들의 질문에 답해주셨고, 이 임시정부 청사 구석구석에 얽힌 사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청사 주변의 환경 변화 등등 자료에는 미처 담겨있지 않은 생생한 증언이었다. 표지판 글에 한자 외에 한글을 병기할 수 있는지, 병기 할 수 있다면, 위치와 크기는 어때야 하는지까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곳을 지키고 계시는 그분들의 노고가 다시 한번 느껴졌다.
 

대한민국임시정부항저우지구기념관을 알리는 출구쪽 표지판 ⓒ 오마이뉴스

  
그런 분들의 노고 덕분인지 항저우(항주)에서는 상하이(상해)에서 많이 아쉬웠던 표지석도 보였다. 임시정부 청사 근처 한국독립당 본부가 있는 사흠방과 임정요인 가족들이 살았던 오복리 2가에 작년에는 없던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임정로드 일정 중 기억에 남는 한 순간이었다.

비록 한글로 써 있는 표지석은 아니지만, 많은 노력들이 실제로 이뤄진 생생한 순간을 보는 감동적인 일이었다. 항주는 옛 것을 지키고 그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잘 공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겉모습은 우아하면서 아기자기한 골목인데, 그 안은 젊은 이들이 좋아하는 유행하는 상점들로 가득했다.
 

오복리 2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거주지를 알리는 표지석 ⓒ 오마이뉴스

  
우리는 다시 난징(남경)으로 이동했다. 난징은 부자묘(푸쯔먀오)로 유명하다. 공자를 존경하는 의미의 '공부자(孔夫子)'에서 이름이 유래됐다 한다. 이 거리는 중국에서 가장 큰 시가지 중 하나로 1991년 중국 40대 여행지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공자 사당 주변이 모두 전통 가옥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서 운치가 있고, 옛날 과거 시험을 치렀던 교육의 성지이며, 밤에 야시장이 볼 만하고 하고 여러 가지 중국 전통 놀이나 공연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지만, 우리가 그곳에 간 이유는 그 거리를 지나 '회청교'를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난징 부자묘 거리 모습 ⓒ 오마이뉴스

   
나는 부득이 가흥의 여자 뱃사공 주애보를 매월 15원씩 본가에 주고 데려와, 회청교(淮淸橋)에 방을 얻어 동거 하였다. 나는 직업을 고물상이라 하고, 여전히 광동 해남도(海南島) 사람으로 행세하였다. 경찰이 호구조사를 와도 애보가 먼저 설명하고, 나는 직접 말하는 것을 삼갔다.
- <백범일지> 중에서( P355)

회청교는 김구 선생님이 고물상으로 계셨다는 곳이다. 번화한 부자묘거리를 관통하고, 한적한 골목이 나오고, 조금 더 지나자, 물길이 보이고 '회청교'가 나타났다. 조금 전 거리와 대조적이라 저절로 숙연해졌다.

마침 그 다리에는 몸이 불편해 보이는 걸인이 있었다. 고물상과 구걸하는 사람은 엄연히 다르지만, 임시정부의 수장으로서 김구 선생님이 고물상으로 지내셨을 것을 생각하기에 그 걸인이 그 다리에 현재 존재한다는 것이 더 마음이 불편했다. 괜히 더 감정이 올라왔다.

우리는 미리 준비한 국화꽃을 한 송이씩 들고 서서 둘 곳 없는 마음의 무게를 실어 김구 선생님을 생각하며 조용히 꽃을 강물에 흘려 보냈다. 나에게 있어서 이런 의식 아닌 의식을 마련해주신 것이 너무 감사했다. 이런 작은 의식은 김구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보다 이런 일들에 대한 나의 무지와 무관심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 하면서, 어떤 해소로 작용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화청교에서 내려다 본 모습. 이곳 어딘가에 김구 선생님이 계셨다. ⓒ 오마이뉴스

  
다시 부자묘거리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숙소로 향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숙소는 김구 선생님이 당시에 묵었던 난징 중앙반점이었다. 잠깐 들러 보고만 지나 가는 것이 아니라, 직접 머물 수 있는 일정이었다.

당시 숙소라 혹시 낡고 허름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고풍스럽게 그대로 잘 유지된 모습이었다. 내부로 들어가자 몇몇 현대적 시설을 제외하고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 당시 고급 호텔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역사의 현장에 직접 들어온 것이다.

(4일차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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