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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9.06 08:06 수정 2019.09.10 13:54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무대 뒤 커튼에 몸을 가린 채 지켜보던 오병권은 마침내 얼굴이 활짝 펴졌다. 지금 막 서울시 교향악단의 마지막 연주가 끝난 것이다.
 
황홀한 빛과 색을 음악으로 표현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진은숙이 썼다. 정명훈의 지휘로 더블베이스는 묵직하게 바이올린은 가녀리게 장내에 퍼져나갔다. 타악기들은 성난 파도처럼 솟구쳤다가 실개천처럼 잦아들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앙상블은 소리로 빚어낸 빛과 색의 향연이었다.
 
중앙홀에서 터져나온 박수소리는 2, 3층까지 퍼져나갔고 관객들은 일어서서 "비스,비스(브라보, 브라보)"를 외쳤다. 정명훈과 단원들이 감사인사를 하자 박수는 더 커졌다. 단원들은 서로 얼싸안고 등을 두드려주며 "우리 해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평생 잊지 못할, 마린스키 무대

2005년 서울시향(서울시립교향악단)이 독립법인으로 출범할 때, 5년 안에 세계 수준의 교향악단이 되자고 다짐했었다. 그 뜻대로, 2010년에 이뤄낸 결실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러시아에 이르는 유럽투어는 4개국 아홉 개 도시를 거치는 장정이었고 오늘 마린스키 공연이 그 마지막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극장의 예술감독이면서 러시아에서 신이라 불리는 지휘자 바레리 게르기예프까지 찾아와서 "화음이 집중되었고 금관 파트가 특히 좋았다"고 칭찬을 해 기쁨이 더 컸다.
 
사실, 유럽공연은 서울시향에게 모험이었다. 백여 명이 넘는 단원에 악기와 무대의상만도 15톤 트럭 4대 분량이었다. 아홉 개의 극장 일정도 꼼꼼히 관리해야 했다.

공연장이었던 브레시아에서는 국제사이클대회와 겹쳐, 트럭이 시내에 진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단원들이 30분 거리를 걸어 나와 악기와 의상을 날라야 했다. 볼로냐에서는 공연이 끝나고 새벽 2시에 호텔에 들어왔는데 새벽 4시에 체크아웃을 해야 했다. 이런 어려움들을 딛고 이뤄낸 결실이었다.

투어가 끝난 후 오병권은 감회가 남달랐다. 그가 세종문회회관에 들어가 서울시향의 기획팀장과 사업팀장 등을 맡으며 재직한 지 26년 만에 이뤄낸 성과이기 때문이었다.
 

세종문화회관 기둥에 선 오병권그는 이 곳 서울시향에서 정년퇴직했다. ⓒ 민병래

  
오병권이 유럽투어를 처음 기획한 것은 1986년, 2010년 공연으로부터 24년 전이었다. 그는 지휘자 정재동과 의기투합, "교향악단이 발전하려면 투어와 레코딩을 해야 한다. 기왕이면 본 고장, 유럽에서 부딪혀보자"고 배짱을 맞췄다. 당시 아시아를 대표하는 교향악단은 NHK였고 한국은 20년 뒤져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때부터 32살 오병권은 분주히 뛰어다녔다. 매일 시청으로 들어가 (그때 세종문화회관은 서울시사업소였고 시향은 그 산하였다) 주무국장에게 예산을 요청했다. "이거 되겠어, 책임질 수 있어요?"하는 반응만 돌아왔다. 유럽 투어는 최소 1년 전에 대관을 해야 하고 위약금이 칠천만 원일 정도로 계약조건이 까다로운데 본청은 요지부동이었고 날짜는 다가오고 있었다.
 
난관은 또 있었다. 시향 사무국으로 항의 전화들이 왔다. "그 실력으로 유럽에 간단 말이냐?" "내가 베를린 필 공연을 들어봤는데 무모한 짓 하지 말라"와 같은 얘기들이었다. 오병권은 전화통을 붙잡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설득했다. "피나는 연습을 하고 갈 것이다" "이걸 계기로 발전할 것이다" "최종 리허설에 선생님을 초대 하겠다" 등등.
 
여론은 다소 진정되었는데 계약마감시한이 다가오도록 예산 승인이 나지 않았다. 결국 지휘자 정재동이 "안 되면 도곡동에 있는 아파트 팔지, 뭐"하고 결심하면서 겨우 극장 계약을 했다.
 
그때 준비를 열심히 해서 1988년 "동유럽의 1급 오케스트라는 된다"는 평을 받고 귀국했다. 이는 한국 교향악단이 최초로 추진한 해외 투어로 남았다. 그리고 22년 만에 추진된 투어에서 "놀랍다"는 찬사를 들었으니 시향은 또 한번 역사를 새롭게 쓴 셈이었다.
 
세종문화회관에 대중가수가 서다

오병권이 세종문화회관에 공연기획관으로 들어간 때는 1983년이었다. 한양대에서 작곡과 오케스트라를 배운 그는 스물일곱 살에 한성중 음악교사로 부임했다. 호주머니를 털어 스피커까지 사서 아이들에게 'G선상의 아리아'같은 음악을 들려줬다. 하지만 교감으로부터 "오 선생이 가르친 애들이 평균 10점이 낮아"라는 질책을 들었다. "즐기는 음악을 가르칠 수 없다"는 무력감에 그는 사표를 썼다.
 
그 후 우연한 기회에 세종문화회관 팝스콘서트 연주곡을 편곡하게 됐다. 관객들 반응이 좋았고 덕분에 세종문화회관 공연기획관으로 전문직 채용이 되었다.
 

세종문화회관을 등진 오병권그는 이곳에 공연기획관으로 입사를 해서 평생을 바쳤다 ⓒ 민병래

   

서울시향과 패티 김의 협연 모습오병권은 대중가수와 교향악단의 협연을 기획했다. ⓒ 오병권제공

  
입사 후 그가 제일 먼저 사고(?)친 일은 '패티 김'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세운 것이다. 그때가 1983년이었다. "뭐, 대학생들이 와서 아침이슬 부르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세종문화회관 '팝스콘서트 협연자'로 양희은을 세우자는 기획안은 한 번에 박살나고 말았다. 전두환 정권이 눈 부릅뜨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패티 김'을 부르기로 했다.

그렇지만 공연 전날까지도 말들이 많았다. "대중가수는 '세종문화회관'에 설 수 없다"며 클래식계는 반대했다. 위에서도 "전례가 없으니 신중해야 한다"는 얘기만 계속했다. 
  
당시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에서 밴드는 드럼, 베이스기타, 색소폰 등으로 하는 반주가 전부였다. 빅밴드라고 해봐야 현악기를 추가하는 정도였다. 오병권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이 '아바'처럼 발전하려면 반주를 고쳐야 하고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하면 제대로 된 노래가 나온다고 생각했다. 이를 클래식계에서 지원해야 하고 또 클래식도 청중에게 보다 재미있게 다가가려면 대중가수를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예매가 시작되었을 때 '매진' 안내장을 바로 걸어야 할 정도로 호응이 컸다.

파리에서 날아온 패티 김은 '메모리'를 뜨겁게 불렀다. 그에게 주어진 15분은 짧았고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시청 확대간부회의에 다녀온 관장은 "오병권, 자네 이번에 제대로 사고쳤어, 계속 해보자구" 웃으며 말을 했다. 주머니에 있던 사표는 그날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조영남을 비롯한 많은 대중가수가 섰고 대중가수와 협연은 흔한 일이 되었다. KBS에서 하는 '열린음악회 포맷'도 이를 참고로 만들어졌다는 후문이다.
 
오병권은 팝스콘서트 성공에 힘입어, 서울시향의 유럽투어에 도전했다. 그리고 2010년 마린스키 무대에까지 우리나라 교향악단을 세우는 데 노력했다. 그는 지금도 마린스키 무대를 본인 인생에서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런 그가 시향에서 정년퇴직하고 자리를 잡은 곳은 대전 예술의전당. 2015년에 2년 임기로 관장에 부임했다.
 
"여러분, 앙상블이 무엇일까요? 군인들이 행진할 때 가로 세로 줄을 잘 맞추죠! 만일 키도 같다면 모자 높이 벨트 라인까지 맞겠죠. 음악에서도 음정과 박자를 넘어서 템포와 표현 방식까지 맞추는 것이 오케스트라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솔로이스트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가 대전 예술의전당 '청년오케스트라' 출범식에서 한 말이다. 그가 관장이 되면서 객석점유율이나 유료관중 같은 수치보다 가장 공을 들였던 일은 예술의전당 부설 '오케스트라 아카데미'였다. 
 

대전예술의전당 청년 오케스트라 아카데미 단원과 함께청년 오케스트라 아카데미는 그가 제일 애정을 기울인 사업이었다. ⓒ 오병권 제공

   
대전시향 오디션에 삼백 명이 지원했는데, 솔로로서 훈련은 되어 있지만 앙상블에 대한 이해가 대부분 부족해 전원 탈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병권이 아카데미를 기획한 것이다. 레퍼토리 훈련을 체계적으로 하고 실제 오디션 준비를 하는 '오케스트라 아카데미'였다.

"오 관장, 적당히 임기 채우면 되는데 왜 그리 분주하게 움직입니까?" "저 사람 연임하고 싶어서 저러는 거 아니야."

무관심과 오해도 많았지만, 대전시의회를 어렵사리 설득, '청년 오케스트라' 예산을 마련해 50명 정도 되는 단원에게 연습수당과 연주수당을 주었다. 창단 6개월 만인 2017년 12월 1일 대전 예술의전당 '회원음악회'에서 고영일이 지휘를 하고 첫 공연을 했다. 청년들이 갖고 있던 절실함은 이날 공연에서 앙상블을 이뤄냈다.
 
프놈펜으로 간 오케스트라

2년 임기를 연임해 4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고 그는 올해 65세가 되었다. 이제 적당히 노후를 즐겨야 하는데 그는 어느 날 '프놈펜 오케스트라 창단준비위원장'이 되었다.
 
연세대학교 작곡과 교수로 정년퇴임한 이찬해 선교사가 몇 년 전에 모든 재산을 털어 캄보디아에 '국제예술원'을 세웠다. 킬링 필드의 아픔이 있는 땅에 음악으로 치유와 선교활동을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이 국제예술원에서 추진한 사업 중 하나가 캄보디아 최초로 오케스트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우연히 프놈펜에 다니러 갔던 오병권은 그의 노력에 마음을 뺏겼다.
 
현재 캄보디아는 클래식 토양이 척박하다. 연주자들이 거의 없고 수준은 우리나라 중고등 학생 정도다. 그래서 오케스트라는 꿈같은 얘기였지만, 오병권은 '오케스트라 전문가'로서 객원 단원을 모집, 창립을 돕는 데 발 벗고 나서기로 했다.
 
그는 귀국 후 시향 후배 단원들을 불러 모았다. 세종문화회관 근처 한 카페에서였다.
 
"이건, 역사를 쓰는 일이야. 스카라 극장에서 1945년 해방 후 첫 교향악단 연주가 있었지. 그때 지휘자가 계정식 선생이야. 이번에 프놈펜 심포니에 너희들이 자원봉사로 객원 단원을 해주면 우리 이름이 캄보디아 오케스트라 역사에 쓰여진다고."
 
후배들 눈이 조금씩 빛나자, 카페영업시간이 다 되었다는 안내에도 목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자네들 내가 배재학교 나온 거 알지. 정확히 134년 전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웠어. 그런데 얼마 전에 배재합창단이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다녀왔어. 그 사람을 보낸 교회에 '보은음악회'를 갔던 거지. 모두 껴안고 서로 감사하다며 울음바다가 되었대. 고마움을 제대로 표현한 거지. 언젠가 프놈펜 심포니에서 서울시향으로 '보은음악회'를 올 수도 있어. 멋진 일 아니야?"
 
그런 노력 덕인가. 다행히 50명 정도 되는 시향 단원과 희망 음악인들이 자원봉사를 하기로 결정, 현지에서 어렵게 준비된 단원 40명과 함께 첫 공연을 하기로 했다. 오병권은 그렇게 시향 후배들을 모아 8월 27일 캄보디아 프놈펜 짝뚜목 국립극장으로 떠났다.

오병권, 그는 배재중학교 시절 의사를 꿈꿨다. 중학교 때 실습 시간, 개구리를 해부하기로 한 날이었다. 마침 학교가 농구 선수권 결승에 올라갔고 전교생이 응원을 가게 되어 실습이 미뤄졌다. 할 수 없이 오병권은 준비했던 개구리를 집으로 가져갔다. 목욕탕에서 파리를 잡아 키우다가 친구와 함께 해부를 했다.
 
마취를 시키고 사지를 핀셋으로 고정하고 배를 갈랐다. 그런데 마취가 덜 되어 개구리는 깨어났고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치다가 내장을 흘리면서 튀어 올랐다. 욕조 바닥과 벽에는 핏물이 튀었고 개구리는 계속 파닥거렸다. 열세 살 오병권은 그 날로 의사되기를 포기했다. 
 

한양대 음대 작곡과 시절 오병권그는 한양대 음대에 들어가 작곡, 지휘, 오케스트라 등 다양한 경험을 했다. ⓒ 오병권 제공

 
나중에 진로를 고민할 때 성경 선생님이 "네 달란트를 찾아라" 했던 말을 새기며 중학교 때 현악 4중주 활동을 떠올렸다. 바이올린을 켜면서 즐거웠던 기억. 그래서 그는 음악을 하면 행복하리라 생각하고 한양대학교 작곡과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작곡과 연주, 지휘자로서 다양한 경험을 했다. 그런데 그는 묘하게도 기량보다는 오케스트라와 무대 공연의 경계를 허물거나 새로운 실험을 하는 것에 더 열정을 보였다.

'프놈펜 심포니 오케스트라 창단준비위원장', 다음에 그는 또 어떤 시도를 할까? 그리고 또 하나 궁금증. 그 날 개구리가 튀어 오르지 않았으면 그는 어떤 길을 갔을까?
 
<못다 한 이야기>
 
1. 8월 31일 프놈펜 짝뚜목 국립극장에서 프놈펜 심포니 오케스트라 첫 공연이 열렸습니다. 캄보디아의 새로운 역사를 쓴 일이었고 공연은 성공리에 이루어졌다는 후문입니다.

2. 1995년 해방 50주년을 맞아 시향의 창설자인 김생려 선생을 모시고 기념음악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김생려 선생은 휠체어에 의지했고 투석까지 하는 상황이었습니다만 애국가 연주를 지휘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김생려 선생은 오병권의 손을 꼭 잡으면서 "서울시향을 발전시켜 주시게, 내가 보니 당신은 할 수 있어"란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 후 김생려 선생은 석달 만에 눈을 감았는데 오병권에게 그 당부는 늘 가슴 속에 남긴 말이 되었습니다.
 
3. 오병권의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늘 의사를 접하던) 아버님은 아들이 의대 진학을 포기했을 때 못내 아쉬워 했습니다. 대신 집안의 어른, 3.1절 독립선언 33인 중 한 분인 오화영 목사를 얘기하시며 기왕이면 "음악으로 문화로, 애국하라"는 당부를 했고 이는 오병권에게 의미있는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4. 진은숙은 시향의 상임작곡가로 음악계의 노벨상인 그라벨마이어상을 받은 이로서 윤이상 이래 한국이 낳은 최고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오병권이 걸어온 시간들> 
 

여름성경학교에서 오병권81년, 그는 음악으로 성경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 오병권제공

   

88년 서울시향 유럽투어시절 오병권그는 서울시향 기획팀장을 맡아 유럽투어를 추진했다. ⓒ 오병권제공

   

프놈펜에서 오병권프놈펜 심포니 오케스트라 창단준부위원장으로서 현지에서 준비하는 모습 ⓒ 오병권제공

 
<오병권의 B컷>
 

성수동에 있는 할아버지공장 카페에서 그가 살아온 얘기를 들려주며 밝게 웃고 있다. ⓒ 민병래

   

세종문화회관 앞 커피숍에서 오병권오병권이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며 ⓒ 민병래

오병권의 프로필
1955  서울출생
1974  한양대 작곡과 입학
1976~1979 육군 사단 군악대 
1982 대학 졸업 및 한성중학교사
1989~2002 중앙대 예술대학원 예술경영학과수료

1982. 3~1983 .2 한성중학 음악교사
1984~1989 세종문화회관 공연기획관
1989~2005 서울시립교향악단 기획실장
2005~2013 (재)서울시립교향악단 전문위원                                     
2015~2019 대전예술의전당 관장

1986    미국 5개주요도시 순회공연
1988    국내 악단 최초 유럽순회공연
2005    서울시향 법인화 성공
2017   대전예술의전당 청년오케스트라 창단
2019. 8 캄보디아 최초의 교향악단인  프놈펜심포니 창단 준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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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 줄여서 '사수만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를 빚어내는 일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조명을 비추고 의미를 부여코자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