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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9.13 13:38 수정 2019.09.20 10:38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한국전쟁 발발 후 산내에서 학살된 이들과 유족의 삶을 8주에 걸쳐 살펴봅니다.[편집자말]

여순항쟁 당시 미군이 기관총을 든 가운데 운동장에 모여있는 여수시민의 모습을 찍은 사진. ⓒ 심명남

운택이 여수동국민학교에 도착했을 때 날씨는 쌀쌀했다. 1948년 11월 초라 날씨가 매섭지는 않았지만 군인들이 학교에 반란군과 빨갱이들을 잡아놨다고 하니 한껏 움츠려졌다. 날씨보다는 마음 탓이었다.

그렇게 정문에서 쭈뼛거리고 있으니, 보초를 서고 있던 군인이 "뭔 일이다냐"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형님 만나러 왔는디라." 잠시 후 형 김운경(1926년생, 23세)을 만났을 때 16세 소년 김운택(1933년생)은 자칫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잡혀간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형님의 볼이 쑥 들어가 남같이 느껴졌다.

"형님, 어치케 지내라우?" "괘안타. 부모님은 무고하시고?" 김운택의 입에서는 말이 많이 나오지 않았다. 주변에 있는 군인들의 눈초리가 살벌하기도 했지만, 형의 초췌한 모습을 보니 목이 막혔기 때문이다.

"형님, 이장로(李長老)한테 얘기해 놨으니 괜찮을 낍니다."
"그래. 내는 죄 없응께, 걱정 안한다."

여수동국민학교 운동장에서의 짧은 면회는 이렇게 끝났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 군인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제주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여수동국민학교에 구금된 이들은 여순 반란군에게 협조했다는 죄목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10대 소년부터 60, 70대 노인들도 있었다.

김운경의 아버지 김순조는 똥줄이 탔다. 당시 전남 여수군 율촌면에 짜르르 소문난 말이 있었다. "어떤 빨갱이도 이장로(李長老)한테 쌀 6가마를 갖다 주면 풀려난다"는, 바로 그 말이었다. 지역의 유지이며 우익계의 거물이었던 이장로에게 뇌물을 쓰면 죽을 사람도 산다는 것이었다.

김순조가 며칠을 동분서주했지만, 살림 형편이 고만고만한 시골에서 쌀 여섯 가마를 구하기는 언감생심이었다. 결국 그 절반인 세 가마니만 구할 수 있었다. 구한 쌀을 이장로 집에 급하게 갖다 주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아들 김운경이 마을 청년들과 함께 여수경찰서로 넘겨진 것이다.
 
쌀 세 가마 모자라 학살당해

김해김씨와 경주김씨 집성촌이었던 전남 여수군 율촌면 취적리 율촌마을의 김운경, 김양석, 김종원, 김창식, 김형수, 박종태는 '반란군 협조세력'이라는 혐의로 끌려갔다. 어떻게 손 써볼 새도 없이 김운경은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동생 김운택은 어머니 박계심과 함께 대전형무소로 면회를 갔다. 여수에서 대전까지 가는 데만 온종일이 걸렸다. 다음 날 새벽부터 서둘러 면회를 신청했다. 아들을 마주한 어머니는 내내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김운경은 동생에게 "나가 죄 없승께, 곧 나갈끼다. 앞으로 엄니 못 오시게 해라"라고 했다.  

가족들은 '언제나 감옥에서 나올까'하고 김운경을 기다렸지만 종내 무소식이었다. 그러다 6.25가 터진 후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대전형무소에 있던 이들이 모두 죽었다드라." 전쟁이 터진 후 3개월 만에 온 이야기였다.

가족들은 김운경이 '살아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마포형무소에서 수감됐다가 6.25 직후 석방되어 온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율촌국민학교 교사 류제령(율촌면 신풍리)이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류제령에게만 손을 들어 주었다. 끌려간 마을 청년 여섯 명 중에 김양석은 목포형무소에서 학살됐고, 김운경을 포함한 나머지 5명은 대전형무소에 있다가 산내에서 학살됐다.
 
낙지잡이 배 타던 청년, 빨갱이가 되다
 

여순항쟁 당시 국군이 투입된 가운데 불타고 있는 여수시내 모습을 찍은 사진. ⓒ 심명남

 
전남 여수군 율촌면 취적리 율현마을은 21호가 살던 작은 마을로, 어업이 주 생계수단이었다. 주민들 대부분은 풍선(風船)으로 전어와 낙지를 잡아 시장에 내다 팔았다. 보통 전어 배는 4명이 타고, 낙지 배는 2명이 탔다. 아버지 김순조는 큰 집에서 전어 배를 탔고, 아들 운경은 이웃집의 낙지배를 타 생계를 해결했다.

1948년 10월 말, 그날도 운경은 밤새 낙지를 잡고 새벽에야 집에 왔다. 피곤했던 운경은 집에 오자마자 골아떨어졌다. 그런데 해가 중천에 뜬 대낮에 경찰 세 명이 김운경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집에는 운경의 동생 김운택이 있었다. "김운경이 어디 있어?" "왜요?"라는 김운택의 되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탕탕" 소리가 연달아 났다. 경찰이 마루에 앉아 있던 김운택의 좌우로 총질을 해댄 것이었다.

16세 소년 김운택은 총소리에 몸이 얼어붙어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경찰들은 다짜고짜 방문을 열고는 잠자고 있던 김운경을 끌고 갔다. 당시 전라남도 순천군 해룡면에 살던 집안사람 한 명이 좌익 활동을 했다. 가족들은 그 집안사람 때문에 김운경까지 연행됐다고 짐작했다. 

그런데 율촌지서 경찰이 새로운 증언을 했다고 한다. 김운택(87세, 전남 여수시 율촌면)의 증언에 의하면 율촌지서 경찰이 전근가면서 "그 마을에 공산당 물 들은 문○○를 잡아 조사하니까, 율현마을 청년 6명을 불었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경찰의 강압수사에 의한 거짓자백을 한 것이다. 결국 율현마을 청년 여섯 명은 본인들의 활동과는 전혀 관계없이 거짓자백 때문에 사지(死地)로 끌려간 것이다.
 
말목을 세우고 7명에게 총질

여순사건 진압군이 여수를 점령한 직후인 1948년 10월 말. 주민들에게 면소재지 광장으로 모이라는 전갈이 왔다. 율촌면 취적리에서는 소년 김운택을 포함, 10여 명이 참석했다.

그곳 광장에는 율촌면 주민 백여 명이 모여 있었다. 이윽고 반란군인 14연대 군인들에게 협조한 혐의를 받은 청년 7명이 끌려 왔다. 형사 박승부가 부하 2명에게 광장 한가운데에 말목 7개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잡아온 청년들을 말목에 묶고는 눈가리개를 했다. 눈이 가려진 청년들은 이미 정신 줄을 놓은 상태였다. 그들은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끄윽 끄윽'하며 눈물만을 주르르 흘렸다.

"빨갱이 새끼들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잘들 봐!" 박승부는 말목 가까이 가더니 청년들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들이대고 사정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소리에 목이 꺾였다. "탕탕탕" 총소리가 이어졌지만 누구도 숨소리를 내지 못했다. 경찰들이 물러간 뒤에서야 곡소리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말목에 묶인 청년들 시신 가까이에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다. 경찰들이 청년들을 공개처형을 하고는 시신을 면소재지 한가운데 전시용으로 놔둔 것이었다.

아버지 대신 동원돼 공개처형을 본 김운택은 사지가 떨렸다. 이날 경찰들은 봉기군에 협조했다고 의심 받은 사람들의 집을 모두 불태웠다. 김운택 집도 전소돼 오랫동안 큰 집 사랑방 신세를 졌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운경이 여수경찰서로 끌려간 뒤 아내는 친정으로 갔다. 결혼한 지 2개월도 안 되어 여순사건이 났기 때문에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김운경의 아내는 남편 연행 당시에 경찰이 쏜 총소리에 놀라 천질병(간질로 추정)이 생겼다.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간 지 4개월 만에 집에서 불을 때다가 병이 도져 불에 타 죽었다.
 
구루마에 영사기 싣고 다녀
 

고등학교 시절의 김운택

 
장남 운경을 잃은 김순조는 차남 운택에게 "형은 그렇게 죽었으니께 니는 니하고 싶은 대로 살아라"라고 했다. 때문에 김운택은 학창 시절부터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그는 순천음성고등학교에서 담배를 피다가 훈육주임에게 걸려 퇴학당했다. 1년 후 여수공고에 진학했고, 졸업하자마자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운택의 첫 사회 생활은 특이했다. 그는 광주에서 영사기를 빌려 구루마에 싣고 시골을 다니며 영화를 틀어주고는 돈을 받았다. 전라도 일대와 경상도 일부 지역을 다녔는데, 섬도 많이 갔다. 고흥군의 나로도, 여수 거문도, 완도, 흑산도, 경상도 남해 등지였다.

시골에 가면 대형 천막을 치고 영화를 상영했는데, <산유화> <김삿갓> <나그네 설움> <장화홍련> 등이 인기였다. 이런 영화 상영은 1950년대 시골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영화를 틀 때마다 300여명의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김운택은 천막 입구에서 매표원 일을 했다. 관객들 대부분은 돈을 갖고 왔지만 일부는 문어·낙지를 갖고 와 표를 달라고 했다.

이 일이 재미있기는 했지만, 손익은 적자였다. 3년하고 나니 논 두 마지기가 날아 갔다. 다음 직업은 신문기자였다. <대한여론조사>라는 회사였는데, 취재를 하기보다는 명함을 들고 다니며, 한량처럼 지냈다. 이후에 김운택은 농촌지도자와 수협지도자를 지냈다. 율촌수협 조합장 14년을 지냈다. '민족통일협의회' 활동으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이른바 그는 여수의 유지였다.
 
"광주지검에 재판자료 신청해놨어."

순천에 있는 유족회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김운택은 전화통화로 바빴다. 회원들에게 걸려오는 전화 받으랴, 과거사법 개정에 대해 문의하는 전화 받으랴 정신없었다. 요즘 그는 여순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산내에서 학살당한 이들의 재판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증언자 김운택 ⓒ 박만순

 
"한 달 전에 광주지검에 재판자료를 요청했는데요. 휴가라고 하대. 휴가 끝나면 자료를 일괄적으로 받기로 했어요."

김운택은 지난 2002년부터 '대전산내사건' 전남지회장을 맡고 있다. 매일 유족회 사무실로 출근한다. 여수에서 순천까지 왕복교통비 2500원, 점심식대로 8000원이 그가 쓰는 하루 경비다. 그렇게 17년을 살아왔다. 노무현 대통령 때 만들어진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을 집단적으로 냈고, 그 결과 명예회복과 피해배상을 받았다.

이제는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 출범에 대비해 미신고자 신청접수와 여순사건 재심(再審) 준비에 바쁘다.
 
요즘 같은 장수 시대라도 87세이면 사회활동을 그만둘 때다. 하지만 그는 아직 청년이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정열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얼핏 보면 70대로 보인다. 그의 열정이 여순사건으로 대전 산내에서 학살당한 이들의 억울함을 씻어주고 유가족들의 눈물을 씻어주는 데 밑거름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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