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31 13:45최종 업데이트 19.09.10 17:50
 

중국 난징 '김원봉 유적지' 가는 길. 경기 김포지역 학교와 학생들이 이정표를 만들어 붙여놨다. ⓒ 윤근혁

 
버스에서 내렸다. 산 쪽으로 폐가 두 채가 보인다. 두 건물 사이는 1.5m 정도. 우리 탐방단을 안심시킨 것은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진 단 하나뿐인 이정표였다.

"천녕사. 김원봉, 정율성, 이육사, 윤세주가 활동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터 가는 길. -김포청소년역사문화탐구단."

'난징 천녕사 가는 길' 알림판, 누가 만들었나 봤더니

지난 22일, 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의 임정100주년 역사탐방단 소속 교직원 등 42명은 중국 난징에 있는 천녕사를 찾았다. 의열단장 김원봉이 교장을 맡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터다. 이곳에선 1935년에 3기생들이 훈련받았다.


천녕사 가는 길엔 도로표지판은 물론 변변한 안내판도 없다. 이런 형편에서 이 이정표는 탐방단에겐 샘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정표 안내대로 안심하고 길섶과 잇닿은 건물 사이를 지났다. 곧바로 30도 이상 각도의 산비탈이 나왔다.

비탈엔 보일락 말락한 토끼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걷는 탐방단원들의 바지를 늦여름 수풀이 자꾸 잡아당겼다. 
 

경기 김포지역 한 학교 학생들이 만들어놓은 '천녕사 가는 길' 이정표. ⓒ 윤근혁

 

한 초등학생이 만든 천녕사 이정표. ⓒ 윤근혁

 
'이 길이 맞나' 생각하며 나뭇가지를 쳐다봤다. 화살표 모양의 붉은 종이에 '천녕사 가는 길'이라고 쓰인 매직 글씨가 보였다. 조금 더 걸어가니 글자 하나하나에 붉은 하트 모양으로 테두리 한 '천 녕 사'란 글귀가 적혀 있는 팻말이 또 보였다. 삐뚤빼뚤한 손 글씨 안내판엔 '김포대명초 6학년 홍채희'란 이름이 적혀 있다.

'아 여기가 천녕사 가는 길이 맞구나' 하고 안심했다. 10분 가량 걸어가니 빨강, 노랑, 파랑 바람개비 수십 개가 돌아가고 있었다. 이 바람개비엔 태극기 속 붉은 문양이 그려져 있다. 김포지역 학생들이 만들어 꽂아놓은 것이다.

이정표와 안내판, 바람개비를 만들어 붙인 이들은 다름 아닌 경기 김포 대명초, 하성중, 은여울중, 통진중 등 4개교 학생 89명이었다. 김포교육지원청에 따르면 이 학생들은 올해 7월 25일 천녕사를 찾아 이 같은 활동을 벌였다. 이 교육지원청과 김포시청이 함께하는 혁신교육지구 사업인 '김포청소년역사문화탐구단' 활동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였다.
 

천녕사 앞에서 바람개비를 꽂아놓고 있는 경기 김포지역 학생과 교직원들. ⓒ 김포교육지원청

   
팻말 하나 없던 유적지... 초등학생들도 매직 들어

학생들은 답사 전 사전학습을 통해 '팻말도 없이 천녕사 터만 덩그러니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표지판과 리본, 바람개비, 위치 알림표 등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학생들이 어른보다 더 깊은 마음과 더 빠른 몸놀림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김포교육지원청의 안은숙 장학사는 "사전 답사단이 천녕사 인근 지방 관리를 만나 역사적 사실에 대해 말하고 표지판 부착을 허락받았다"면서 "표지판을 붙인 날에도 이 관리를 다시 만나 '표지판과 등산로의 표식'들을 잘 관리해달라고 부탁했다"고 전했다.

이처럼 학생들이 만들어놓은 알림판이 있었기에 한 달여 뒤 우리 교직원들은 마음 편하게 이곳에 올 수 있었다. 한 교사는 "정부나 어른들이 할 일을 학생들이 해냈구나" 하고 놀라워했다.

84년 전 이곳에서 땀 흘리던 전사들 가슴에도 이처럼 젊은 기운이 샘솟았을 것이리라. 김포지역 학생들이 꽂아놓은 바람개비 바로 앞에 다 허물어져 가는 건물이 서 있었다.

이 건물 들머리에 있는 시멘트 기둥엔 '天寧寺'란 글귀가 한자로 적혀 있다. '一九八二'라는 글자도 보인다.

이날 안내를 맡은 홍소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추진위 자료실장은 "천녕사는 천년고찰로 깊은 산골에 있어서 일제의 눈을 피하기 좋아 훈련장소로 삼은 것으로 전해진다. 1, 2기도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훈련을 했다"면서 "하지만 중국 문화혁명 때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지금 남은 건물도 삼림보호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새로 지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천녕사 모습. ⓒ 윤근혁

 
지금은 지름 1m 크기의 우물과 훈련터만이 전사들의 땀방울을 대신 보여주고 있다. 탐방단은 천녕사 앞마당에서 술잔을 올렸다. 손으로 직접 만든 무궁화도 여러 송이 꽂았다. 그러면서 그 시절 독립운동가들처럼 '압록강 행진곡'을 함께 불렀다.

"우리는 한국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우리는 한국 광복군 악마의 원수 쳐 물리자.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등잔 밑에 우는 형제가 있다. 원수한테 밟힌 꽃포기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가자 조국에...."

탐방단은 지난 20일부터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일대를 돌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랐다. 윤봉길 의사의 함성이 들리는 듯한 상하이 훙커우 공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독립지사들이 묻혔던 상하이 만국공묘, 주푸청 일가의 목숨을 건 도움으로 김구 선생이 피난할 수 있었던 매만가 76호와 재청별장 등을 탐방했다.

일제의 참상을 알 수 있는 난징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과 난징대도살기념관도 둘러봤다. 특히 교직원들은 리지샹 위안소 기념관에서 위안부 피해자인 박영심 할머니 동상 앞에 모여 한 동안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1만5689명. 올해 8월 15일 현재, 우리 정부가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포상한 숫자다. 홍 실장에 따르면 이 가운데 6000여 명은 후손을 확인하지 못해 훈장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 사이엔 '3가지 각오'가 있었다. '매 맞아 죽을 각오, 굶어 죽을 각오, 얼어 죽을 각오'가 그것이다. 실제로 이 같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 상당수는 후손을 이어갈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천녕사 가는 길을 안내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먼저 안내판을 만들었던 우리 학생들이 바로 이들의 자랑스런 후손이란 생각이 들었다.

"독립운동, 글로만 보다가 눈으로 직접 보니 몸이..." 
 

중국 난징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 건물 앞에 세워진 박영심 할머니 동상 앞에서 한국 교직원들이 지난 23일 고개를 숙였다. ⓒ 윤근혁

 
23일 오후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 교직원들은 다음과 같은 소감을 밝혔다.

"국가가 자기나라 사람을 지켜주지 못할 때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 눈으로 똑똑히 봤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역사를 글로만 봐왔다. 눈으로 직접 경험해보니 몸으로 직접 느껴졌다.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진실된 마음으로 설명할 것을 다짐한다."
"이제 우리나라도 일본에게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되기 위해 싸우는 게(쟁두) 아니라 발이 되기 위해 싸워야(쟁족) 한다는 김구 선생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다."
"임시정부기념관이 중국에는 있는데 한국에는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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