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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8.22 19:54 수정 2019.08.22 19:54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주 유적지 기념관 ⓒ 조종안

 
대한민국임시정부(아래 임시정부) 활동은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1919년 4월 임시정부 수립부터 상해를 떠나기까지 '상해 시기'. 1932년 5월 청사를 항주(항저우)로 이전 후 남경(난징), 장사(창사), 광주(광저우) 등지로 옮겨 다니는 '장정 시기'. 1940년 중경(충칭)에 정착해 광복군을 창설하고 대일 선전포고를 하는 등 광복의 그날까지 독립운동을 펼치는 '중경 시기' 등이다.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상해를 떠나 항주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김철(임시정부 국무위원)이 거주하던 '청태 제2여사(현 한정쾌첩)' 32호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그곳을 계속 청사로 사용한다. 그러나 낯 모르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숙박업소여서 기밀 유지에 어려움이 많았다. 고민하던 임시정부는 1933년 1월 중국 국민정부 주선으로 장생로 호변촌 23호로 이전한다.
 
호변촌 23호 청사도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자 임시정부는 1934년 1월 강소성 진강(전장)으로 이사한다. 그러나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항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해(1934) 11월 판교로 오복리 2가 2호에 청사를 마련한다. 오복리 청사 역시 1년 후인 1935년 11월 가흥(자싱)을 거쳐 다시 진강으로 옮겨간다.
 

임정요인 가족들이 살았던 오복리 2가(항주 기념관) ⓒ 조종안

 
호변촌에 거주하던 임정 요인 가족들은 1934년 11월 청사를 따라 오복리로 이주한다. 그렇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요소마다 일본 밀정이 깔려 있어 은밀히 지내야 했다. 임정 국무위원들은 신분을 감추고 이곳저곳 흩어져 살았다. 국무회의나 의정원 회의도 임시정부 사무실이나 가흥, 남경, 진강 등지로 이동하여 개최하였다. 고난과 역경의 '장정 시기'였던 것.

임시정부는 1932년 5월 항주에 새 청사를 마련한 날부터 멀리 진강으로 옮겨가는 3년 6개월(32년 5월~35년 11월) 동안 5~6차례 이사 다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말이 좋아 '이전'이고 '이사'이지 그야말로 눈물겨운 피난살이였을 터.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가족들 생활이 풍찬노숙의 고행이었음을 암시한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항저우와 서호
 
지난 6월 1~8일, 기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26년의 발자취(상하이에서 충칭까지)를 따라 걷는 '임정로드 탐방단 1기' 단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탐방 셋째 날(3일)은 저장성 성도 항저우에서 시작했다. 탐방단은 중국 현지 가이드와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임정로드 4000km> 저자) 안내로 서호(중국 10대 명승지로 꼽히는 거대한 인공호수), 임시정부 항주유적지 기념관, 학사로에 위치한 사흠방, 한인촌이었던 오복리(五福里), 청태 제2여사 구지(舊址) 등을 돌아봤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서호 ⓒ 조종안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항저우는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힌다. '천상에는 낙원이 있고, 지상에는 항주(항저우)가 있다'는 말이 예부터 회자될 정도다. 농산물이 풍부하고 경치가 뛰어난 항주 지역을 '지상의 천당'으로 꼽았던 것.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예술이 발달했으며 문화유산도 산재해 있다. 명소도 많은데, 경관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서호(西湖)가 대표적이다.
 
오전 7시 30분 호텔을 출발한 버스는 서호로 방향을 잡았다. 임시정부 항주기념관 관람시각(9시 30분)에 맞추느라 계획을 변경한 것. 서호는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인 서시(西施)의 미모에 비견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주변엔 중국 최대 목조 좌상이 있는 영은사(灵隱寺), 실크박물관, 찻잎박물관 등이 자리하며 송나라 시인 소동파가 많은 시를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서호 주차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8시 30분. 기와를 얹은 청나라 건축양식의 비각과 정자들이 항저우가 중국의 7대 전통도시에 드는 이유를 말해주는 듯하다.
 
유람선에 오르니 잔잔한 옥빛 호수와 조각배, 노 젓는 뱃사공 등의 모습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다가온다. 자욱한 해무가 서정적 분위기를 돋운다. 아련하고 몽환적인 풍광에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일행은 서울에서 왔다는 관광객들과 김종훈 기자의 미니 강의를 듣고 하선, 임시정부 항주 유적지 기념관으로 이동했다.
 
기념관 입구에서 만난 항주 임시정부 '파수꾼'들
 
중국에는 상하이, 항저우, 충칭 등에 임시정부 청사 기념관이 있다. 그중 항저우 청사만 국가급 유물로 지정됐다. 항저우 인민 정부는 2002년에 보수를 시작, 200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주 구지 기념관'으로 정식 개관했다. 다른 도시의 임정 관련 안내판이나 기념비에는 한자만 보이는데, 항주 기념관은 한글 안내문이 위쪽에 새겨 있어 일행 모두를 기쁘게 하였다.
 

항주유적지 기념관 입구의 김철, 송병조, 차리성 선생 사진 ⓒ 조종안

 
대한민국임시정부 발자취가 담긴 영상을 감상하고 전시실을 돌아봤다. 놀라운 것은 김구 선생 흉상이나 인물사진이 걸려 있을 자리에 김철, 송병조, 차리석 선생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는 것. 김종훈 기자는 "임정 피난 시기 일제의 거센 압박과 감시 속에서도 '파수꾼'을 자처하며 항주 임시정부를 지켜낸 분들"이라고 소개한다.
 
"파수꾼은 경계를 서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어떤 임무를 맡아 처리할 때 성실하게 묵묵히 일하는 사람을 비유하기도 하죠. 김구 선생과 임정 주요 인사들이 자싱(가흥)에서 피난 생활을 이어갈 때, 세 분(김철·송병조·차리석)이 파수꾼 역할을 자처한 겁니다. 특히 김철 선생 공이 크죠. 김철 선생은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 일왕 저격사건, 같은 해 윤봉길 의사 의거 당시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역임하며 김구 선생과 같이 대업을 주도한 분이죠."
 

김철 선생 서거 소식을 보도한 1934년 7월 11일 치 동아일보 ⓒ 조종안

 
김철 선생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옛날 신문들이 그를 '조선ㅇㅇ당 거두'로 소개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1934년 7월 11일 치 <동아일보>는 김철 선생 서거 소식을 "상해 ㅇㅇ정부 위원으로 조선 ㅇㅇ당 거두인 김철(金澈=일명 永澤 38세)은 중국 항주(杭州)에서 지난 5월 4일부터 급성폐염에 걸리어 이래 당지 광제의원(廣濟醫院)에 입원 치료 중이던 바 6월 29일 오후 6시에 드디어 사망하엿다"는 내용으로 큼지막한 사진과 함께 보도하였다.
 
항주 임시정부는 김철 선생 생존 당시 국무위원 업무와 조직을 재편하고 군사, 외교, 재정 분야에 중점을 둔다. 중국 국민정부와 우의를 다지면서 일본과 대항하는 동아시아 국가와의 연대를 강화한다. 1933년 5월에는 김구-장제스(蔣介石) 회담을 통해 지원을 약속받는다. 이러한 활약은 외국 교포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했으며, 교포들이 보내온 자금으로 취약한 재정기반을 보완하였다.
 
1934년 1월 국무회의에서는 독립운동의 방향, 법률, 예·결산, 조약체결, 선전 강화, 사신 파견, 외교사절 접수 등을 의결한다. 그해 4월에는 국무위원과 각 직책 담당자를 선임하고 각종 법률과 규정, 예결산 안을 심의, 승인한다. 이렇듯 항주 시기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피신 상황임에도 독립운동 최고 기관으로서 체제 정비에 진력하였다.
 
사흠방, 오복리, '청태 제2여사'에서
 

한국독립당 본부가 있었던 사흠방 입구 ⓒ 조종안

  
탐방단은 전시관을 나와 한국독립당 본부가 있었던 사흠방(思鑫坊)으로 이동했다. 전시관 앞에서 큰길을 건너 7~8분 걸어가니 중국식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사흠방 골목이다. 1960년대 독립군 영화에서 본 듯한 옛 골목, 차이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김 기자는 입구 왼쪽 첫 번째 집을 임시정부의 기초정당인 한국독립당 항저우 본부로 추정했다.
 
"여러분은 지금 한국독립당 사무소 위치를 보고 있는데, 골목 이쪽은 짝수, 이쪽은 홀수 그래서 임정 요인들이 거주한 곳은 나란히 42호, 44호인 거예요. 여러분이 보시는 이 라인이죠. 독립기념관에서 규정한 한국독립당 사무소는 골목 왼쪽 첫 번째 집(학사로 사흠방 34호)입니다. 조금 이따 걸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부근은 굉장한 문화 유적지입니다."
 

김 기자 말대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사흠방 골목과 부근 거리는 항주에서 가장 많은 중국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항주 인민 정부가 세운 표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 기자는 "작년에 왔을 때는 표지석 하나 없었는데 무척 업그레이드됐다"고 감격해 하며 공중에서 보면 더욱 아름다울 것 같아 드론을 날렸다가 실패했던 경험도 들려줬다.
 
일행은 임정 요인 가족들과 한국인들이 살았다는 오복리로 이동했다. 골목 입구에서 표지석을 확인한 신영전 교수는 "저희 할아버지(신언준 기자: 1904~1938)도 맨 처음 중국으로 망명했을 때 항주에서 살았고, 동아일보 상해, 남경, 특파원 시절에도 한때 이 거리 어딘가에 살면서 상하이를 오갔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해서 주위를 숙연하게 하였다.

애국지사들의 발자취가 서린 항주 임시정부 유적지(사흠방, 오복리, 청태 제2여사 등)는 5~10분 거리에 위치해서 힘들이지 않고 찾아볼 수 있었다. 탐방단은 김철 선생이 6개월 정도 머물렀던 곳이자 임시정부가 항저우에 처음 판공처(임시정부 사무실)를 개설했던 청태제2여사를 돌아보고 점심을 먹은 뒤 강소성 성도 난징(남경)으로 이동했다.

(다음편에서 계속됩니다)
 

항주 임시정부 첫 사무실로 사용했던 청태 제2여사 건물 ⓒ 조종안

덧붙이는 글 자료출처: 대한민국임시정부 항주 유적지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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