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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8.23 16:39 수정 2019.08.24 11:20
구녀성과 이티재가 소재해 있는 충북 청주시 미원면 대신리는 원래 충북 증평과 내수 미원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길목이다. 가깝게는 증평 좌구산과 연결되고, 멀게는 속리산과 이어지는 곳이다. 대신리 새터는 3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김해김씨 집성촌이었다. 1950년 10월 이 마을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이 빨갱이 새끼, 죽어봐라."
"아이구구, 살려 주시유."

지게 작대기는 공중에서 춤을 추며 김정제(1891년 생, 당시 60세)의 허리와 어깨, 얼굴을 향했다. 당시 60세면 상노인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손주뻘 되는 미원지서 경찰은 노인이라고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북한군에게 밥을 해줬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똑바로 얘기해! 빨갱이들 밥 해줬지?" 김정제가 "안했습니다"라고 했지만, 지게 작대기는 다시 한 번 춤을 추었다. 젊은이도 당해낼 수 없는 매질에 노인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잠시 후 작대기는 김정제의 아내 이정자와 며느리 민호녀에게까지 향했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이루어진 이 날의 광기어린 소동을 지켜본 마을 주민들은 착잡했다. 사실 북한군 패잔병과 지방 좌익으로 구성된 빨치산에게 밥을 해 준 것은 김정제 집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빨치산의 강요로 마을의 모든 집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밥을 해 주었다. 그런데 왜 유독 김정제 가족만 경찰의 뭇매를 감당해야 했을까?

그 일이 있기 전 마을 반장이 주민들에게 신신당부했다. "경찰이 와서 빨갱이들 밥 해줬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해요. 거짓말 했다가는 큰 코 다쳐요." 그런데 김정제는 이 얘기를 전해 듣지 못했다. 경찰에게 화를 당할까봐 밥을 해 준 사실을 부정했고, 그 결과 경찰에게 '괘씸죄'로 치도곤을 당했다.

그렇다면 마을 반장은 왜 김정제에게만 귀띔을 해주지 않았을까?

징역 10년 선고해 놓고 학살
 

김동수 판결문 ⓒ 박만순

  
김정제의 아들 김동수(1922년생)는 마을에서 인기가 좋았다. 미원국민학교를 졸업한 그는 한글을 모르는 여성과 아이들을 상대로 야학을 운영했다. 그는 수원우체국에서 1년간 근무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미원국민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후 그는 시대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청주지방법원이 작성한 판결문을 보면 그의 활동내역은 다음과 같다.
 
"1947년 7월 6일 남로당에 가입한 김동수는 그해 12월 포고령 제2호 위반으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고향에서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그에게 '남로당 영동군당 조직책'이라는 막중한 책임이 부여되었다. 1949년 5월에 있었던 일이다. 김동수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농민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했던 오중순과 영동읍 심원리에서 회의를 하고 조직 확대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영동군 학산면 도덕리 뒷산에서 무장유격대(01부대, 02부대) 활동관련 회의를 했다.
- 청주지방법원 판결문

김동수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949년 8월 31일 청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받는다. 판결문의 내용을 100% 믿는다손 치더라도 재판 결과는 지나치게 과했다. 재판부가 언급한 그의 범법행위는, 기껏해야 몇 차례 회의를 진행한 것뿐이다. 폭력, 방화, 살해 행위 같은 구체적 범죄행위는 전혀 없었다. 어쨌든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그는 얼마 후 대전형무소로 이감된다.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몇 차례 면회를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바람결에 실려 온 소문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다름 없었다. 마을에서 천재 소리를 듣던 귀한 아들이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당했다는 것이다. 김동수의 어머니와 아내가 시신을 수습하러 대전형무소에 갔지만, 산내에서 죽었다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며칠을 허둥댔지만 시신 수습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렇게 학살된 아들을 둔 김정제 집안은 '빨갱이 가족'으로 미원지서에 찍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지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이장과 반장은 마을에서 김정제 집안을 따돌렸다. 

전 재산이 논 470평

김동수가 대전 산내에서 학살된 뒤 남은 가족들의 생활은 피폐하기만 했다. 김동수 아버지 김정제에게 남은 전 재산은 논 470평이었다. 이것으로는 가족들 생계가 불가능했다. 결국 남의 땅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김정제가 1953년에 사망하자 그의 며느리 민호녀가 가장의 역할을 떠맡았다.

민호녀는 논농사를 지으며 한편으로는 행상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비단 장사를 하다가 나중에는 녹용을 팔았다. 그녀의 발걸음은 충북 청원군 내수를 시작으로 음성군에 이어 경기도 이천까지 향했다. 심지어 서울 홍은동과 사당동 등지도 그녀의 손길이 미쳤다.

남편과 시아버지를 잃은 그녀의 생활력은 대단했다. 행상 보따리에 책을 여러 권 갖고 다니며, 마을에서 노인과 여성들을 상대로 읽어 주었다. 이야기책에 굶주린 그들에게는 그녀가 장사꾼 이전에 반가운 손님이었다. 민호녀는 어느 마을을 가든 환대를 받았다. 모든 거래는 외상이었다. 가을에 농작물을 수확하면 현물로 외상값을 받았다. 외상 거래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떼인 적은 없었다.

김동수 아들 김영환(1945년생)은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는 농사일을 했고, 제대 후에는 유리가게, 구멍가게, 신발가게, 용달차 운전, 자가용 운전, 여관업에 전전했다.
 

증언하는 김영환 ⓒ 박만순

 
아버지가 불법적으로 학살당한 뒤 야생마처럼 살아온 김영환(75, 대전광역시 중구 용두동)은 지난해(2018년)에서야 과거사법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TV에 산내위령제가 나오는 모습을 본 게 계기였다. 방송국과 충북경찰청을 찾아갔지만 아는 이는 없었다. 대전의 시민단체를 어렵사리 찾아갔더니 유족회를 연계시켜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김영환의 '아버지 찾기'는 국가기록원에서 찾은 아버지의 판결문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이유를 몰랐던 그에게 판결문은 궁금증의 실마리를 풀어주었다. 그는 판결문을 읽던 날 밤새 울었다.

판결문을 모두 믿는다손 치더라도, 10년이면 석방돼 자유인이 될 수 있었던 아버지는 대전 산내에서 학살되었다. 28세 젊디젊은 김동수의 청춘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그의 아내와 아들의 삶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청주시 습격사건이 보도된 빨치산 신문. 한림대학교, 빨치산자료집 7 ⓒ 박만순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김영환(당시 7세)은 서당에서 큰 목소리로 천자문을 외웠다. 열려진 문으로 빨치산이 따발총을 메고 골목길로 들어서는 모습이 모였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마루에 걸터앉은 빨치산은 김영환에게 "얘, 이리 와서 글 읽어 봐라"라고 했다. 배운 천자문을 술술 외우니, 빨치산은 "그놈 참 기특하네. 공부 열심히 하거라"며 김영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들은 집 주인인 서당훈장에게 옷을 있는 대로 달라고 했다. 무슨 해꼬지나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훈장은 안심하고 옷을 한 아름 안고 나왔다.

그렇게 서당에서 옷을 얻은 빨치산 십여 명은 새터에 보초 한 명을 세우고 아랫마을인 보도막골로 내려갔다. 훈장은 아이들에게 "얼른 집으로 가거라"고 했지만, 관심이 동한 소년 김영환은 멀찍이서 빨치산을 따라갔다. 그들은 보도막골 이장집으로 가서 옷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정보를 미리 입수한 이장은 또랑을 따라 미원지서로 내달렸다. 이장이 미원지서에 신고하러 가는 것을 눈치 챈 그들은 이장 집을 불 질렀다. 1951년 5월 27일, 빨치산 이동루트의 주요길목인 미원면 대신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날 대신리에 와서 민간인복을 빼앗아간 이들은 누구인가? 놀랍게도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부대의 유격대원이었다.

청주시 동공원에 집결한 부대원들이 숨소리를 죽였다. 1951년 5월 20일 속리산을 출발해, 청주에서 10km 떨어진 가래산(청원군 가덕면)에 도착한 것은 5월 23일이었다. 청주시 한가운데 있는 동공원에 도착한 것은 5월 26일 새벽 1시였다. 옷은 보슬비로 흠뻑 젖었다. 새벽 1시 45분 '투두두'하는 기관총소리를 신호로 유격대원들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청주해방작전' 이었다. 

유격대원 약 180명은 3개 소부대로 나뉘어 공격했다. 남부군 승리사단이 감행한 이날의 공격은 정치주임 김갑제의 지휘 아래 김흥복 부대장과 송관일 부대장의 현장지휘로 이루어졌다. 청주역, 청주형무소, 충북도청을 주요 공격지점으로 잡은 유격대원들은 청주방송국, 청주경찰서, CIC 사무실 등을 공격했다. 주요 관공서가 파괴되고, 방화되었다.

특히 김흥복 부대 박원길 분대장은 청주형무소를 공격해 사상범 전원을 석방시켰다. 형무소에서 나온 좌익수 140여 명이 빨치산대오를 뒤따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형무소생활에 허약해진 이들이 날다람쥐 같은 빨치산을 뒤쫓아 가기에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남로당 괴산군당 선전부장을 맡았던 김종한을 비롯한 수십 명이 빨치산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엄지섭(여) 순경(보안과), 오선표 순경과 도청 공무원 1명이 사망했다. 새벽 3시 30분 철수를 시작한 유격대원들은 미원을 경유해 속리산으로 퇴각했다.

한국전쟁기에 지리산, 덕유산, 신불산, 대둔산 등 전국 산악지역에서 유격대활동을 했던 빨치산들은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투쟁성과는 미미했다. 군·경 토벌대의 공격을 피해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이른바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맞아 죽는 게 그들이 처한 냉혹한 현실이었다.

그런 면에서 약 1시간 30분에 불과했지만, 유격대가 도청소재지를 공격한 것은 한국전쟁기 빨치산투쟁 중 유일무이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1951년 6월 6일 속리산에서 '청주해방투쟁 기념 경축대회'를 열었다. 반원형 야외무대에는 김일성·스탈린 초상화가 걸렸고, 김흥복, 송관일 부대의 경과보고와 연예대회가 진행되었다.(한림대학교 <빨치산자료집 4, 7>, 홍두표 <나의 여운>, 전창식 <5·26 청주피습사건전말>, 충북지방경찰청 <충북경찰사>)

즉, 이현상부대가 청주시를 습격한 다음 날 퇴각하면서 미원면 대신리에 들어와 민간인 옷을 구하려 한 것이다. 이 와중에 보도막골 이장집이 불에 타버렸다. 이 사건 외에도 인근 야산의 비트(비밀아지트)가 880부대에 의해 발각된 사건이 있었고, 크고 작은 유사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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