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09 14:37최종 업데이트 19.08.09 17:42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 똥을 먹고 살 수는 없다!!"

강당 안은 숨막힐 정도로 뜨거웠다. 여기저기서 구호가 터져나왔다. 징과 북소리는 드높아졌다. 강당 앞에 걸었던 펼침막을 떼어든 참가자 수백 명이 행진을 시작했다. 김용자도 다른 해고자들처럼 앞에 섰다. 건물은 이미 동대문경찰서 기동경찰과 사복경찰 사오백 명이 포위했다. 웅성웅성 모여 구경하는 시민들 뒤로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돌아나갔다.


수백명의 사람들은 용암이 흐르듯 2층 강당에서 1층으로, 다시 현관으로 나아가 경찰과 맞닥뜨렸다. 순간 "작전 개시" 외침이 '지지직' 하는 무전기 소리와 함께 경찰들 뒤편에서 들려왔다. 방패를 앞세운 경찰이 곤봉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사복경찰은 대열 옆을 치고 들어왔다.

머리끄덩이를 잡힌 김용자는 주먹으로 옆구리를 얻어맞으며 끌려갔다. 경찰이 호송차에 밀어 넣으려 하자 "안 돼! 안 돼!"하며 발버둥쳤다. 그 와중에도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발버둥치던 김용자는 잠에서 깼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기독교회관에서 연행된 날은 꿈에 자주 나타난다. 창밖에는 아직 어둠이 남아있다. 창문을 여니 새벽 공기가 밀고 들어온다. 상쾌하다. 오늘은 법정에 가는 날이라 어젯밤에 이런저런 상념이 많았다. 그래서 옛 기억이 찾아왔나 보다.

2018년 12월. 고등법원으로 가는 길은 맑고 차가웠다.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법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면에는 '법원'이라는 글씨가 황금색으로 도톰하게 새겨져 있었다. 김용자는 발걸음을 죽이며 자리에 앉았다. 둘러보니 부순이, 춘분이, 태순이 얼굴도 보인다.

김용자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2000년부터 시작된 싸움이 오늘 마침표를 찍는다. 그래서 마음이 더 무겁다.
 

김용자의 최근 모습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계승연대집행위원장과 복직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 민병래

     
"일동 기립." 정리의 외침이 날카롭게 법정을 갈랐다. 재판정 벽에 부딪친 소리는 김용자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들 엷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판사가 주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옆자리 수자 언니와 맞잡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똥물과 함께 온 운명의 그날

충청도 촌구석에서 초등학교만 나와 동일방직 '여공'이 된 김용자. 언니들따라 노동조합 사무실을 기웃거리기만 하던 그에게 1978년 2월 21일은 운명처럼 왔다. 그날은 동일방직 노동조합 대의원 선거일이었다.

새벽 6시경 야근반이 퇴근하고 투표가 시작될 즈음, 박복례와 박성기 등 민주노조 반대파 대여섯 명이 화장실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 고무장갑을 낀 그들은 방화수통에 똥물을 퍼담고 있었다. "저 년에게 먹여!"라는 악다구니가 한겨울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그들은 투표를 하려고 기다리던 여공들에게 똥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공장 안으로, 기숙사로, 목욕탕으로 영문도 모른 채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들은 늑대처럼 쫓아다니며 똥물을 옷에 바르고 얼굴에 문지르고 가슴에 쑤셔 넣었다. 조합 사무실에는 통째로 들이부었다.

허겁지겁 똥물 세례를 피해 도망다니던 김용자는 공장에 있던 경찰에게 달려갔다. 노조 대의원선거를 앞두고 인천 동부서는 새벽부터 형사를 여럿 보낸 상태였다. "아저씨, 뭐해요, 말려주세요. 네!?" 허리춤을 붙잡고 애원했다. 그들은 "야! 쌍년아 가만있어, 이따가 말릴 거야"라며 김용자를 내팽개쳤다.

겨울 추위보다, 공장의 시멘트 바닥보다 그 욕지거리는 더 차갑게 김용자의 뺨을 휘갈겼다.
 

동일방직 똥물 투척 사건 현장 사진 당시 이총각 집행부는 회사 앞 사진관에 증거사진 촬영을 의뢰했다. ⓒ 김용자제공


똥물 세례를 받은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명동성당에서 목숨을 걸고 단식에 들어갔다. 김수환 추기경과 강원룡 목사를 비롯한 사회 원로의 중재에도 회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78년 4월 1일 동일방직은 근무지 이탈을 빌미로 124명을 해고했다. 김용자도 명단에 있었다.

2010년 6월 30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는 동일방직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똥물 사건을 배후 조종했고 해고조치를 지시했다"고 밝혔다. 막연하게 떠돌던 '중정 개입설'의 실체를 온 세상에 드러내며 국가권력에 의한 범죄임을 인정한 것이다. 이에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2015년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그런데 대법원은 동일방직 해고자들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아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서 생활지원금을 받았기 때문에 국가는 정신적 위자료 의무가 없다고 판결했다. 불복한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2017년 헌법소원을 냈고, 헌법재판소는 "정신적 손해배상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금지는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그래서 김용자를 비롯한 동일방직 해고자 14명은 2018년 12월 18일 파기환송심 선고 자리에 오게 된 것이다.

"제1심 판결 중 원고들에 대한 부분을 아래와 같이 변경한다."

판사는 또박또박 판결문을 읽어나갔다.

"국가는, 원고 동일방직 노동자들에게 별지목록에 기재된 손해배상금을 지불하라. 그리고..."

판사는 '손해배상금'이란 단어를 또박또박 읽었고, 그 음성은 법정을 휘돌아 김용자와 동료들을 감쌌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김용자의 손등에 눈물 한 방울이 톡 떨어졌다. 훌쩍이는 소리들이 잔잔히 메아리쳤다. 다들 육순이 넘은 나이지만, 아직도 78년 4월 1일에 얽매여 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손해배상'이라는 그 말이 사무치게 다가왔다.

"손해배상금을 지불하라"

법정은 언제나 김용자에게 매몰찼다.

1978년 9월 22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는 연극 공연이 있었다. 김용자의 꿈에 자주 나타나는 바로 '그날'이다. 연극 막바지, 똥물을 퍼붓는 장면이 나오자 감정이 북받친 해고자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연극하는 사람도 울고 관객도 울고, 강당은 울음 바다였다. 결국 밤 9시쯤 사람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똥물을 먹고 살지는 않았다"며 뛰쳐나갔다.
 

원직복직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는 모습 동일 방직 해고자들의 복직투쟁은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 김용자 제공

   
그리고 김용자의 꿈에서처럼 경찰이 물밀 듯이 밀어닥쳤다. 닥치는 대로 곤봉을 휘둘러 노동자들을 던지다시피 해서 연행했다. 현장에 있던 고 문익환 목사도 타박상을 입었고,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조화순 목사는 머리를 가격 당해 실신하기까지 했다.

이때 성동경찰서로 연행된 김용자는 '20일 구류'를 받았다. 그때 세 번이나 치안본부로 끌려갔다. 그들은 하얀 자술서를 내밀었다. "산업선교회의 조화순 목사가 배후"라고 적으라며 왼쪽 뺨을 계속 때렸다. 끼니 때면 책상 네 개를 붙여놓고 속옷만 입고 올라가 거기서 빵을 먹으라고 했다. 굴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조사가 끝나고 유치장으로 돌아온 김용자는 동료들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울었다. 야속하게도 9월의 유치장은 추웠다.

구류만이 아니었다. 83년에는 삼익가구, 신도실업 해고자들과 같이 '블랙리스트'에 항의해 노동부 인천지청을 점거하다 폭력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렇게 법정은 구류와 구속으로 김용자를 외면했다. 그렇게 차가웠던 법정이, 국가로 하여금 "그에게 불법적인 행위를 인정하고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한 것이다.

재판이 끝나고 김용자와 동료들은 법정을 나섰다. 12월 겨울 날씨는 추웠지만 시원했다. 파란 하늘은 반짝였고 실뭉치같은 구름들이 축하하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고생했어, 수고했어." 모두 얼싸안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래, 이게 몇 년 세월이니... 우리 잘해냈지..." 등도 두드리며 서로 위로했다.
"우리 사진 하나 찍자!!" 부순이가 외쳤다. "그래 그래, 모두 모여. 활짝 웃고 만세 불러봐." 영자가 거든다.
"하나 둘 셋." 우습게도 약속이나 한 듯 "동일방직 만세!"를 외쳤다.
 

2018년 12월 18일 손해배상을 인정받고 찍은 사진 이날 김용자와 동지들은 누가 먼저라할 것도 없이 동일방직 만세를 외쳤다. ⓒ 김용자제공


동일방직 공장 안은 늘 40도가 넘었다. 온 몸에선 땀이 빗물처럼 흘렀다. 얼굴과 손에까지 땀띠가 번졌다. 휘날리는 솜먼지는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발가락이 짓물러 다들 무좀을 달고 살았다. 미치도록 가려워 시멘트 바닥에 발바닥을 북북 문지르기도 했다. 시원했지만 살갗이 헤져 피가 새어 나왔다. 밤일을 할 때는 '타이밍'을 먹으며 잠을 쫓았다. 서로를 꼬집어주고 또 꼬집어주며 버텼다.

사진을 찍고 나니 용순이가 외쳤다. 우리 '그때처럼' 달려 보자고. 이제 육십이 넘은 몸들이다. 허리도 어느새 구부정하고 뱃살도 한 움큼 잡힌다. 무릎이 시큰거린 지 오래다. 겨울 외투에 목도리까지 둘렀는데, 그래도 김용자와 무리들은 '그날처럼' 법정 마당을 뛰기 시작했다.

경찰들 앞에서 알몸 시위를 벌이던 그날처럼

1976년 7월 23일. 동일방직 이영숙 지도부를 와해시키려고 회사와 반대파 조합원들이 '집행부 불신임 대의원대회'를 긴급 소집했다. 조합원들이 접근 못하게 기숙사 입구에 못질까지 했다. 하지만 소식을 접한 조합원들은 기숙사 2층에서 뛰어내리고 입구 문을 밀쳐내며 뛰쳐나왔다. 그들은 마구 달려 노조 사무실로 모여 들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회사 마당에서 "노조탄압 중단하라"는 농성이 시작됐다. 사흘째 되던 날, 인천 동부서 형사와 기동경찰 들이 출동했다. 경찰들은 이영숙 지부장이 조합비를 횡령해 땅을 샀다고 거짓말을 해댔지만 농성자 팔백여 명은 흔들리지 않았다. 공장 밖에는 농성자 가족들이 걱정하며 모여들었다.

동일방직의 싸움이 인천공단으로 퍼지는 것을 두려워한 경찰은 집행부를 체포하기로 하고 농성장을 에워쌌다. 그리고 포위망을 조금씩 조금씩 좁혀왔다. 농성하던 어린 소녀들이 여기저기서 울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그랬다. "벗고 있는 여자 몸엔 경찰 아니라 그 누구도 손을 못 댄대."

그 중얼거림에 모두 파란 작업복을 벗었다. 모두 속옷만 입은 채 알몸이 되었다. 더운 날씨에 사흘간 농성하느라 옷도 갈아입지 못해서 팬티와 브라자는 꼬질꼬질 더러웠다. 생리하는 사람까지 있어 비릿한 냄새에 퀘퀘한 땀 내음이 더해져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잠시 주춤거리던 경찰은 이내 연행을 시작했다. 노조 집행부를 하나씩 끌어내 차에 밀어넣었다. 차바퀴 밑에까지 들어가 저항했지만 군홧발에 채이면서 끌려나왔다. 수십 명이 널브러졌다. 사람들은 호송차에 태워져서도 유리창을 깨면서 저항했다. 거친 몸싸움에 브라자 끈이 떨어져 나가고 빤스 고무줄이 끊어져 거의 알몸이 되다시피 했다.

그렇게 72명을 강제로 태우고 경찰 버스는 공장을 떠났다. 동일방직 조합원들은 알몸인 채로 "우리 모두 주동자다, 우리 모두를 잡아가라"고 외치며 경찰차를 쫓아갔다. 그날 그렇게 달린 기세처럼 김용자와 벗들은 법원 마당을 달렸다.
 

경찰기동대가 동일방직을 포위한 모습 인천 동부서는 수시로 경찰력을 동원, 동일방직 노조를 탄압했다. ⓒ 김용자제공

 
"야야, 용자야 힘들어. 이제 그만 뛰자! 그래 이제 그만 쉬자!" 영화와 창순이가 숨을 헉헉 거리며 난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제는 걸음을 멈췄다. 서로 바라보다 웃음이 터져 나온다.

"야! 너희들 단식할 때 생각나지?" 장규가 말을 꺼낸다. 그때 얘기만 시작하면 수다는 늘 구만리 강산이다.

"야야, 그때 물은 먹으라고 했잖아. 보리차 먹다가 찌꺼기가 나왔는데 너무 맛있었어."
"아이고, 나는 옷 단추가 과자처럼 보였다니까. 잠들면 엄마 젓도 보이구."
"나는 잘 때마다 밥 먹는 꿈을 꿨는데 깨면 너무 신경질이 났어."
"야, 나는 친구가 수건을 들고 오는데 과자 봉지처럼 보였다니까."

와! 모두들 박수치고 웃는다.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다. 멈추지 않는 이야기 보따리에 법원을 드나드는 사람들도 뭔 일인가 둘러본다. 겨울바람도 그들 곁에 머물러 귀를 쫑긋 세운다.

"야,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달려보자." 금옥이가 다시 부추긴다.
"마지막은 무슨, 아예 동일방직까지 달려볼까?" 미연이는 한 술 더 뜬다.
"그래, 인천까지 가자!" 진영이와 병국이가 손을 붙잡고 모두를 일으킨다.

기세를 보니 서울 서초동에서 정말 인천까지 뛰어갈 모양이다. 김용자는 피식 웃음이 났다. 몇 걸음이나 더 가려구? 아니나 다를까 몇 걸음 못 가 "에고, 나 죽어"하며 명희가 뜀박질을 세운다. 모두 멈췄다. 잠시 다리쉼을 하며 김용자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실뭉치 구름은 언제부턴지 양털 모양이 돼있었다. 힘들 때는 파란 하늘도 노랗게 보였었는데...

10.26으로 박정희가 죽었을 때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모두 인천 도시산업선교회로 모여들었다. "대빵이 죽었으니 무조건 복직이다"하면서 기뻐했다. 이어진 80년 서울의 봄, 손에 잡힐 듯 복직이 다가왔지만 전두환의 5.17로 모든 것이 좌절됐다. 동일방직 복직대책위도 운영위원회 정도만 유지하기로 하고 생계를 위해 흩어졌다.

김용자도 이것저것 다른 일을 해봤다.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 활동도 하고 여성노동자 조직사업도 했다. 인천에서는 생활협동조합에도 몸담았다.
 

2006년과 2019년 김용자의 모습 왼쪽은 2006년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때 찍은 사진, 오른쪽은 2019년 모습이다. ⓒ 민병래/ 오마이뉴스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했다. 뿔뿔히 흩어진 동일방직 해고자들을 모아내고 싶었다. 1999년 김대중 정권이 열리면서 기회가 왔다. 민주화운동보상법이 시행되자 김용자는 석정남과 같이 동일방직 해고자들의 연락처를 확보했다. 그것도 경찰의 도움으로!

그렇게 해서 동일방직 해고자들이 '민주화운동 관련자'이며 '국가폭력의 피해자'임을 밝혀냈다. 그리고 '손해배상'도 받았다. 남은 것은 '원직복직'뿐이다. 내일 사표를 쓰더라도 현장에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다리쉼을 하더니 다시 힘이 났는지 춘분이가 다시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 오늘 기필코 '동일방직'까지 가자고.
그래, 가는 데까지 가보자, 모두 합창하듯 말한다.
김용자와 동지들은 다시 손을 잡았다. 그리고 뛰기 시작했다.
  
<못다 한 이야기>

1. 1972년 당시 조합원 1383명 중 1214명이 여성이었던 동일방직은 섬유연맹 최초로 여성 지부장 주길자를 탄생시키며 민주노조로 거듭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75년에도 이영숙 여성 지부장이 당선되었습니다. 노조비 지출명세 공개, 여성 종업원의 생리휴가, 회사 창립기념일의 유급 휴일화, 기숙사 온수시설 등 조합원의 요구를 대변하며 절대 다수 여성 조합원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섬유연맹체제의 균열을 두려워한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연맹 김영태와 인천 동부서를 직접 지휘하고 반조합파 남자 직원들을 앞세워 노조와해작전을 개시합니다. 이는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의 동생이며 중앙정보부 인천 조정관 최종선의 증언에 의해 소상하게 밝혀집니다.

2. 김용자 선생의 경력 중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버스 안내양 생활입니다. 당시 안내양은 하도 힘들어 별로 지원자가 없어 쉽게 취직이 되는 자리였습니다. 김용자 선생도 블랙리스트로 해고가 거듭되자 버스 안내양으로 취업했습니다다. 제물포여객, 선진여객, 항도여객에 다녔고 그때는 안내양이 현금과 토큰을 받을 때였습니다. 하루 만원을 '삥땅' 해서 기사에게 주고 기숙사에 들어가면 몸수색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래서 김용자 선생은 안내양을 설득해 사감 방문에 못질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여인숙으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일을 거부했습니다. 버스 운행이 중지되자 난리가 났고 '몸수색 중지'를 합의하고 농성을 풀었지만, 여기서 주동을 했다고 다시 구류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 동일방직 해고자임이 밝혀져 수배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3. 78년 2월21일 똥물 사건 때 이총각 지부장은 냉정하게 대처했습니다. 회사 앞 사진관에 촬영을 부탁했고 덕분에 증거사진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4. 동일방직의 뿌리는 1934년 10월 1일 인천시 만석동에서 조업을 시작한 도오요방적주식회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는 연소자나 부녀자에 대한 부당노동행위를 금지하는 공장법이 없었습니다. 일본 자본으로서는 천국의 땅이었지요. 해방후 적산으로 미군청에 귀속되었고 동양방적공사에 흡수되었습니다. 1955년 귀속면방업체 민영화방침에 따라 동양방적주식회사로, 1966년 1월 회사명칭을 동일방직으로 변경, 오늘에 이릅니다. 현재 본사는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있고 공장은 인천, 청주, 장항 등지에 있습니다. 한국거래소 상장기업으로 수천억의 연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5. 민사재판판결문의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 원문을 글 분위기에 맞게 수정했습니다.

1. 제1심 판결중 원고들에 대한 부분을 아래와 같이 변경한다.
가. 피고는 원고들에게 별지 2 손해배상금 목록의 '환송후 당심 인용금액'란 기재 각 해당 돈과 각 이에 대하여 2018.11.23.부터 2018.12.14.까지는 연 5%, 그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돈을 지급하라.
나. 원고들의 나머지 청구를 기각한다.

6. 지면관계상 싣지 못한 김용자선생의 더 많은 이야기는 민병래의 개인 블로그 https://blog.naver.com/pmsigni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사건일지
1972.5.10. : 대의원대회에서 한국 최초로 여성지부장 주길자 탄생
1975.2.10. : 주길자 후임으로 여성지부장이던 이영숙 선출
1976.7.23. : 인천 동부경찰서 이영숙 지부장 유인물배포혐의로 연행, 회사측 기숙사폐쇄하고 고두영 및 회사측 대의원만 참가한 상태에서 대의원대회 개최. 조합원 400여명 농성시작
1976.7.25. : 경찰 기동대 출동. 조합원 72명 연행
1977.4.4. : 이총각 지부장 선출
1978.2.21. : 새벽 5시55분 똥물사건 발생
1978.3.10. :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노동절행사에 동일방직 노동자 65명이 들어가 항의시위
1978.3.17. : 명동성당에서 41명 단식 농성
1978.3.26. :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부활절연합예배에 노동자 6명 마이크 탈취 "똥을 먹고 살 수는 없다" 구호 외침
1978.4.1. : 회사로부터 124명 해고 통보
1978.4.10. : 섬유노조 본조에서 김영태 명의로 블랙리스트 각 사업장에 발송 '
1978.9.22. :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동일방직 사건 연극' 후 농성과 시위.
1978.12.13. : 부당해고에 관한 재심청구가 중앙노동위원회에서 기각
1980.1.14. : 노총중앙위원회 참석. 동일방직 문제 해결 요구
1980.4.25. : 해고장 30명 노총위원장실 점거하고 석방과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 시작
1980.5.17. : 비상계엄 확대로 25일만에 단식 농성 해산 
2000. '민주화운동관련 명예회복 및 보상'신청 
2001. 민주화운동관련자 인정, 증서교부
2006년. 진실화해및 과거사진상위원회에 "동일방직 조합원들에 대한 해고 및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규명해 달라" 신청
2007년  2월 20일 직권조사 결정
2010년 6월 30일 "중앙정보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국가폭력임이 중정보관문서, 중앙정보부 인천조정관 최종선의 증언"에 의해 밝혀짐
2015년 국가폭력에 의한 정신적 위자료 청구소송에서 대법원은 "국가와 화해가 성립되었다"며 원고 패소판결 
2017년 헌법소원을 제기하고 헌재는 "정신적 손해배상에 대한 국가배상청구금지는 위헌"이라고 판단
2018년 12월14일 서울고등법원제15민사부 손해배상결정과 함께 금액 통보
 
<나머지 사진들>
 

똥물 투척으로 조합사무실도 더러워졌다. 조합사무실에는 방화수통을 들이부었다. ⓒ 김용자제공

       
 

명동성당 단식 현장 고 김수환 추기경이 조합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 김용자제공

    

가파도에서 찍은 사진 민사소송에서 승리하고 모두 가파도로 2박3일 놀러갔다. ⓒ 김용자제공

   

'우리들은 정의파다' 영화 상영 후에 간담회 이혜란 감독 연출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의 다큐 영화 '우리들은 정의파다'가 2006년에 만들어졌다. 가운데가 김용자 선생이다. ⓒ 김용자 제공

    

동일방직 다큐영화 ‘우리들은 정의파다’ 상영후 기념사진 2006년 동일방직 해고자들의 사연을 다른 영화가 이혜란 감독의 연출도 제작되었다. ⓒ 김용자 제공

    

남영동 인권기념관 앞에서 동일방직 복직대책위원회 동지들이 ‘계승연대’와 함께 한 사진이다. ⓒ 김용자 제공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