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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7.11 10:47 수정 2019.07.11 10:47
한국 근대미술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으라면 서양화가로서는 고희동, 나혜석을 꼽고, 동양화가로서는 김은호와 이상범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 중 고희동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위치가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개화기에 서구적인 문화와 동양적 전통 사이에서 고민한 흔적이 분명한 인물이었다. 또한 나혜석은 당시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한 힘을 가졌던 여성임에도 서양미술의 학습과 함께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았고, 유교적 가부장 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한 용감한 미술가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양화를 전공한 고희동, 나혜석과 달리 김은호와 이상범은 서구 미술의 수용보다는 조선의 전통 미술을 계승하며 일본 미술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양식을 실험하였고, 일본의 화숙 문화의 영향을 받아 각각 개인 화숙을 창설하였다.

이들 화숙은 근대미술 교육기관이 없었던 시대에 비교적 체계적으로 미술교육을 담당했던 특별한 곳이었다. 또한 이들은 근대적 관제 전람회인 조선미술전람회에 참여하였고, 후에 심사 참여까지 맡은 근대 화가이기도 하였다.
 
김은호의 낙청헌과 이상범의 청전화숙
 

화실에서의 김은호 ⓒ 김은호 유족

  
특히 '낙청헌(絡靑軒)'이라 불린 김은호의 화숙과 '청전화숙(靑田畵塾)'이라 불린 이상범의 화숙은 북종화와 남종화를 대표하며 일제강점기 한국화단을 이끌었다. 많은 뛰어난 제자들 중 김은호의 제자인 장우성은 해방 후 서울대학교에 미술대학이 창설되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고, 이상범의 제자 배렴은 홍익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양상은 훗날까지 계속되어 두 학교의 화풍을 지배하는 흐름을 가져왔다. 그만큼 이 두 명의 화가에 의해 이룩된 화맥은 한국 근대미술사의 중요한 핏줄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근대미술계에 끼친 수많은 영향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하며 일본과의 연관성 때문에 때때로 평가에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생긴다. 특히 일제 강점 후기 일본에 협력한 친일 문제는 이들을 평가하는데 늘 장애가 되곤 하였다.
 
이들이 정치적 과오의 흔적이 있다하여 미술사에서도 미술가 또는 미술교육자로서 잊어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들 두 사람의 미술사적 발자취는 다른 화가로 대치할 수 없을 만큼 근대미술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들을 제외하고서는 한국 근대미술사를 논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특히 미술 교육과 관련해서 이들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한국의 인물화나 채색화는 김은호의 우산 아래 있을 수밖에 없고, 산수화는 이상범의 영향 아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현실은 점차 이들을 기억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들에 대해 공부하려 해도 오래 전에 연구의 맥이 흐려졌고, 이들의 작품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많이 사라졌다. 더욱이 그들의 교육자로서의 기능은 일본미술계 방식을 수용하였다는 이유로 전혀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과연 합당한가 하는 것에 대해서 이제 한 번쯤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인 듯하다.
 
근대 화가들의 삶의 흔적
 

고희동 가옥 전경 ⓒ 황정수

 
현재 고희동에 대한 흔적으로는 종로구 원서동에 있던 고희동의 집을 되살려 '춘곡 고희동 가옥'이 운영되고 있다. 유적지로서 역할과 기념관 역할까지 하고 있는데, 반응도 좋고 운영도 잘 되고 있다.

나혜석에 대해서도 고향인 수원에서 나혜석 거리를 조성하고, 점차 그의 미술에도 초점을 맞추어 기리는 사업을 하려 한다. 더욱이 나혜석의 페미니스트적 요소에 여성계가 지대한 관심을 가져 나혜석에 대한 관심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이상범은 친일 미술인사로 규정되어 친일인명사전에도 올랐던 불순한 화가였다. 그러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 등의 애국 행위로 관심을 받으며, 그의 청전화숙이 있던 누하동 집이 복원되어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더욱이 누하동이 있는 서촌 지역이 근대 유적지가 많은 아름다운 지역으로 소문이 나 많은 사람들이 찾으며 이상범 가옥은 서촌 유적지의 중심이 되었다.
 
이상범이 서촌 지역에 근거를 둔 것에 비해 그와 쌍벽을 이루었던 김은호의 집은 북촌 지역 창덕궁 근처에 있었다. 김은호가 한국미술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인물화의 명인으로 순종과 고종의 어진을 그렸다는 것과 남종화 일색이었던 당대에 북종화를 그리며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는 일이다. 이러한 일이 모두 그의 화실인 창덕궁 앞 권농동 집 '낙청헌(絡靑軒)'과 와룡동 집 '이묵헌(以墨軒)'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낙청헌과 이묵헌이 있었던 곳에는 그의 집이 보존되어 있지도 않고 표식 하나 없는 실정이다. 그가 한국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은호를 기억하자는 것이 그의 친일적 행위를 미화하자는 것도 아니고, 단지 미술가로서의 활동한 일을 지켜보자는 것인데, 이렇듯 아무런 흔적도 남아 않은 것은 미술계로서는 어딘가 허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은호의 자취를 따라 걷다
 

김은호의 원서동 집터. ⓒ 황정수

 
필자는 근래에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기록에 김은호의 흔적을 따라 창덕궁 근처를 샅샅이 조사하였다. 지금껏 출판된 근대미술 연구자들의 기록에는 김은호의 흔적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어 이를 찾아다니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몇몇 자료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었고, 근자에 김은호의 유족을 만날 수 있어 조금 더 진척된 밑조사가 가능하게 되었다.
 
김은호가 처음 서화미술회에 들어왔을 때에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 집 저 집을 이사하며 지낸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20여 군데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1912년 시천교 교령 김연국의 초상화 주문을 받아 창덕궁 옆 원서동에 처음으로 집을 마련하여 어머니를 모시게 된다.

현재 이곳은 원래 집은 사라지고 필지가 합쳐져 '덕은문화원'이란 곳의 정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2년여 살다가 다시 창덕궁 앞쪽 운니동으로 이사를 한다.
 

김은호의 권농동 집터 ⓒ 황정수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며 유명해지고 점점 그림 주문이 늘자, 1920년대 후반 좀 더 나은 공간을 찾아 이사한 곳이 권농동 집이다. 권농동 집은 비교적 괜찮은 규모의 집이었다.

이 집은 '낙청헌(絡靑軒)'이라 불렀는데, 근처 돈의동에 살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지어준 이름이다. "청년들과 연결되기도 하고, 단청과 연결되기도 한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곳으로 오며 백윤문, 이석호, 김기창, 장우성 등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후 김은호는 승승장구하여 결국 조선미전 심사 참여의 위치에까지 오른다. 그의 유명세는 더욱 많은 제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러자 좀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였다. 권농동 집은 늘어난 많은 제자들을 수용할 만한 공간이 되지 못해 다시 이사를 한다. 새로 이사한 집은 권농동 집 앞 바로 10m정도 밖에 안 되는 가까이에 있는 넓은 한옥이었다.
 

김은호의 와룡동 집터 ⓒ 황정수

 
새로 이사한 집은 원래 집 코앞이나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동이 달라져 행정적인 이름이 달랐다. 예전의 집 주소는 '권농동'인데, 새로 이사한 집은 '와룡동'이었다. 땅이 넓어 두 채의 집이 이어져 있었는데, ㄷ자집 두 칸이었다. 앞집은 살림집으로 쓰고, 뒤쪽 사랑채에 화실을 두어 제자들이 드나들게 하였다.
 
사랑채를 화실과 함께 화숙으로 쓰며 이곳을 '이묵헌(以墨軒)'이라 불렀다. 제자들은 오고 싶은 시간에 와서 화실 옆방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공간이 넓어지자 배우려는 학생들이 더욱 많아졌다. 제자들이 늘고 여러 전람회에서 많은 성과를 내자 이들은 모여 1936년부터 제자들의 모임인 '후소회(後素會)'를 만든다.
 
'후소회(後素會)'는 논어의 팔일편에 나오는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말에서 따온 말로 김은호와 가까이 지내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1950)가 지어주었다고 한다. 후소회 회원들은 당시 빼어난 능력을 보여 조선미전의 가장 중요한 세력이 된다. 향당 백윤문, 운보 김기창, 월전 장우성 등은 이미 조선미전의 대표적인 걸출한 화가들이었다.
 
서순라길 재생과 김은호 집터 복원
 
이렇듯 일제강점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낙청헌, 이묵헌, 후소회 등이 있었던 창덕궁 근처 김은호의 활동지에 아무런 기념 공간도 없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김은호의 삶에 부끄러운 부분이 있더라도 그는 분명 한국 근대미술사의 중요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그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넓은 와룡동 집은 그 필지 그대로 빌라가 지어져 있어 옛 모습으로 복원하기 쉽지 않으나 권농동 집은 그대로 있는 데다 주변이 개발되지 않아 지금이라도 옛 모습을 복원한다면 한국 근대미술의 중요한 장소가 되살아 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앞집인 문필가의 집은 옛 모습 그대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가능하면 이 고풍스런 집까지 인수하여 '낙청헌'을 복원한다면 창덕궁 앞 서순라길의 중요한 랜드마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바로 근처에 김은호의 수제자들인 백윤문, 이석호, 김기창, 장우성 등이 살고 있었고, 김은호의 선배들인 오세창, 권동진 등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적폐의 청산도 중요하지만 적폐를 기억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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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