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12 09:30최종 업데이트 19.07.12 09:30

이중훈 증언자 이중훈 ⓒ 박만순


새벽닭이 울자마자 소년 이중훈은 벌떡 일어났다. 졸음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간단한 짐을 꾸리고 방문을 살짝 열었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동생의 얼굴을 보자 순간 울컥했지만 눈을 질근 감고 방문을 닫았다. 충남 부여군 내산면 주암리 큰집에서 논산역까지 걸어가는데 맥이 빠졌다. 아침도 먹지 못했는데, 90리(36km) 길을 걸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큰집에서 더 이상 눈칫밥 먹기가 싫어 가출을 감행한 것이다.

막상 기차역에는 도착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마을을 떠나 이렇게 멀리 온 것도 처음이고 기차를 구경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쐑쐑' 하는 기차 소리에 소년 이중훈의 간은 한없이 졸아들었다.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표를 어떻게 끊는지도 몰랐지만, 설령 알았다손 치더라도 그의 수중에 돈 한 푼 없었기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기차는 서울을 향해 힘차게 달렸다.


용산역에 도착했을 때, 비상상황이 발생했다. "검표(檢票)가 있겠습니다. 표 보여 주세요." 역무원의 소리에 다른 이들이 호주머니에서 표를 꺼내 보여주는데, 이중훈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안절부절 못했다. 이중훈의 차례가 되자 역무원은 그의 모습에서 사태를 알아차리고 대뜸 소년의 귀뺨을 갈겼다. "새파란 새끼가 도둑 기차질이나 하고 말이야"하며 귀를 잡아끌었다. 볼도 얼얼하고 귀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주변 사람들의 '킥킥'거리는 소리가 더욱 신경 쓰였다. 역장 앞으로 끌려갔다. "이 놈의 새끼, 무임승차 벌로 3일간 변소 청소해." 냉혹한 현실과 처음으로 맞부딪히는 순간이었다.

서울에 도착했지만 소년이 갈 곳은 없었다. 이번에는 부산으로 가는 하행선을 탔는데 충북 추풍령역에서 무임승차한 것이 걸렸다. 용산역에서의 상황이 재연되었고, 그는 다시 기차에 탔다. 부산 못 미쳐 구포에서 또 한 번의 시련이 반복되었다. 약 일주일 동안 세 차례의 곤혹을 치른 그는 더 이상 무임승차를 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거지 왕초가 되다

구포역에서 변소 청소를 하는데 웬 시커먼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승객들에게 구걸을 하는 것이었다. "한 푼 줍쇼." 새까만 양손을 벌려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연신 절을 했지만, 거지소년들에게 동전을 주는 이는 거의 없었다. 저녁때가 되자 소년 거지떼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들을 하루 종일 유심히 지켜본 이중훈은 거지떼들을 따라 나섰다. 어차피 그가 갈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거지떼들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기찻길 아래였다. 커다란 구덩이 안이 그들의 주거지였다. 그곳은 그럴 듯한 집도 아니고 움막집도 아니었다. 거의 노숙이나 마찬가지였다.

거지소년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말하자, 거지들은 아무런 주저함 없이 이중훈을 한 식구로 받아들였다. 드디어 거지생활이 시작되었다. 거지의 하루는 피곤했다. 아침에 일어나 마을이나 기차역으로 향했다. 시민들에게 하루 종일 구걸해도 밥 한 끼 해결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편법이 동원되었다. 기차가 잠시 정차해 있는 사이에 올라타서, 승객들의 짐을 '슬쩍' 하는 것이다. 완행열차의 상단에 있는 짐 보따리를 승객들이 잠자고 있는 사이에 몰래 훔쳐 나오는 것이다.

보따리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간혹 떡 보따리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훔친 보따리와 구걸한 음식을 그들의 숙소(?)로 갖고 와 공평하게 나눠 먹는 것이 가장 행복한 때였다. 간혹 인근교회 목사에게 가면 떡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중훈의 구걸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거지 왕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15세의 나이였지만, 그는 친구들보다 키가 한 뼘이나 컸다. 키도 컸지만 주먹질도 잘해, 자연스레 조직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거지생활 2년을 하고 나니 생활이 무료해 견딜 수가 없었다. 무작정 기차를 타고 상경을 했다.

싸움, 술, 돈... 밑바닥 삶

청량리역에 도착한 이중훈은 우연찮게 588 근처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흔히 '588' 하면 대한민국의 가장 유명한 성매매 집결지를 일컫는다. 그곳에는 '기둥서방'이라는 이름으로 깡패들이 거의 상주 하다시피 했다. 성매매여성들을 보호한다는 것인데, 그 명목으로 '보호비'를 받는 것이다.

그가 기둥서방은 아니었지만, 성매매 집결지에 자주 가 여성들에게 밥도 얻어먹고, 용돈도 얻어 썼다. 17세의 어린나이에 그에게 거칠 것은 없었다. 폭력조직에 가입해 술과 싸움, 돈에 심취했다. 소위 '동대문파'에 속했던 것으로, 조직의 최고 보스는 이정재였다. 4년간의 달콤한 생활에 날벼락이 쳤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였다. 전국의 깡패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일제 검거령이 내렸다.

동대문파 보스인 이정재는 사형대에 올랐고, 나머지 깡패들은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정재파 '똘마니'였던 이중훈은 강원도로 끌려가야 했다. 5·16 직후인 1961년 5월 23일 한신 내무장관의 "검거 깡패는 군법재판에 회부하여 엄격히 처리할 것이며, 형을 치르고 나와 개전의 정이 있는 자는 탄광 또는 도로공사에 종사케 하여 혁명정신과 국민근로정신을 터득케 하겠다"고 다짐하는 인터뷰(조선일보 1961년 5월 23일자)에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권력을 불법적으로 탈취한 군부는 자기 정권의 정당성을 '폭력배 일소'를 통한 '개혁적이고 도덕적인' 정권으로 포장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치안국(현재의 경찰청)은 5·16 이후 만 명의 깡패를 검거하여 그 중 3088명을 국토건설사업공사장에 보냈다.(조선일보 1961년 7월 2일자)

깡패들만 국토건설단에 동원된 것은 아니다. 부랑자와 성매매여성들도 동원되었다. "정부는 거리의 부랑자와 윤락녀들을 잡아들여서 서해안의 갯벌공사에 투입했다. 그렇게 수백 명이 충남 서산 바닷가로 끌려갔고 '양아치 총각'들과 '창녀 아가씨'들의 집단 결혼식이 올려졌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상반기 보고서>) 민초들에게 '인권'이란 단어는 사치에 불과하던 시대의 풍경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중훈은 강원도 춘천으로 끌려 가 도로작업에 동원되었다. 수 백 명이 소양강변에 대형천막을 치고 생활했다. 사람이 사는 게 아니었다. 밥은 굶지 않을 정도만 주고, 군인들은 수시로 공포를 쏘며 동료들을 위협했다. 결국 그는 몇 명의 동료와 함께 3일 만에 탈출을 결행했다. 춘천에서 걸어서 청량리까지 왔다. 청량리에 도착해서 반 거지 반 미치광이의 모습으로 허겁지겁 밥을 먹는데 동대문경찰서의 호출이 내려졌다.

경찰서장은 "너네 다시 강원도로 가라. 거기 가면 인간적으로 대해 주고, 임금도 준다"며 감언이설로 꾀었다. 그래서 간 곳이 강원도 삼척군 도계면 황지리였다. 그곳에는 기찻길을 뚫는 공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중훈은 국가폭력으로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와는 다른 경우지만 또 다른 국가폭력으로 인권을 유린당했던 것이다. 지옥 같았던 1년 생활을 마무리했을 때는 입영 영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왜 밑바닥으로 흘러갔을까

이중훈이 어릴 때부터 밑바닥 생활을 전전긍긍했던 이유 한 가운데에는 전쟁이 있었다. 충남 부여군 은산면 내지리에서 반장을 보고 있던 아버지 이희영은 마을 유지였다. 밭은 12마지기로 자작농에 불과했지만 정미소를 운영해 부유층에 속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부여를 점령한 북한군은 내지리에서도 인민위원회를 통해 식사를 준비할 것을 명령했다. 반장을 맡고 있던 이희영은 된장, 고추장 등을 걷어 북한군 식사마련에 참여했는데, 이것이 후일 화근이 되었다. 군·경이 수복하면서 부역자 검거가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군·경만이 아니라 우익 치안대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50년 10월 초 경찰에게 뒷결박 지어 끌려간 이희영은 부여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그해 10월 10일 부여경찰서에서 학살된 부역자들은 백마강 구두레나루터에 수장되었다. 

그런데 당시에 이중훈 집안에서는 아버지 이희영만 학살된 것은 아니었다. 이중훈의 외사촌 형 임영규는 이희영과 함께 부여경찰서에 끌려가 백마강 구두레나루터에 수장되었다. 이중훈의 외사촌 형 임병규(1927년생)는 부역혐의로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51년 2월 8일 고문후유증으로 병사(病死)했다(임병규 제적등본). 또한 이중훈의 외숙부 임흥조는 한국전쟁 초기에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되었다.
 

제적등본 임병규가 부산형무소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제적증명서 ⓒ 박만순

 
가장이 죽었다는 사실을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이를 직접 확인하지 못한 가족들은 가장 이희영이 살아 있을 것으로만 믿었다. 그런데 경찰과 치안대원들이 와 협박과 회유를 했다.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해라. 그러면 이희영이 석방된다." 이 말을 순진하게 믿은 가족들은 땅문서를 그들에게 주었다.

이번에는 치안대원과 외지에서 온 김아무개 일가가 와서 집을 내놓으라고 겁박했다. 이중훈의 어머니 임경희와 이중훈(1942년생), 그리고 그의 어린 동생들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몇 차례의 폭언과 구타가 있었고, 결국 이중훈 가족은 집을 빼앗겨, 마을에서도 쫓겨났다.

당장 잘 곳이 없었던 그들이 찾아간 곳은 이웃면이었던 충남 부여군 내산면 주암리로 갔다. 이중훈의 큰 아버지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눈칫밥을 면하지는 못했다. 결국 어머니 임경희는 딸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 이중훈도 큰아버지 집에서 약 3년 정도 머슴처럼 일하다 가출을 했다. 그러면서 그의 밑바닥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어둠을 벗어나다
 

결혼식 이중훈의 결혼식 ⓒ 박만순

 
1963년 8월 논산훈련소에 입대한 그는 직업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1971년 봄 베트남 다낭에서 베트남전 생활이 시작되었고, 1980년 5·18 때는 광주 한복판에 있었다. 계엄사령부에 있었던 그는 5·18을 하나의 '전쟁'으로 생각했고, 잊고 싶은 '기억'으로 인식했다.

아내가 암으로 2000년도에 사망했고, 그는 현재 광주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다. 그는 현재 '부여유족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을 받아 피해보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유족회 활동에 열심이다. 미신고 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다.

또한 그는 전쟁 때 집과 땅을 강제로 뺏긴 것에 대한 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향후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구성되면 이 문제도 공식적으로 제기할 참이다.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 이희영이 국가폭력으로 학살된 것이 이중훈의 인생행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살기 위해 먹을 것을 구걸하던 것이 거지왕초에서 깡패 똘마니 생활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어둠의 생활을 지속하지는 않았다. 직업군인의 길을 택하면서 자신의 삶에 충실했고, 아버지의 명예회복도 이루었다. "강제로 빼앗긴 재산을 되찾는 것과 미신고자의 명예회복을 돕는 것을 남은 생의 과제"로 삼는다는 이중훈(79세. 광주광역시 남구 방림동)의 말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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