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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5.30 12:01 수정 2019.05.31 14:33

1960년대 후반 항공사진으로 찍은 중앙고 교정 ⓒ 김한용

    
1970년대 후반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하며 계동골목을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이 골목, 이 지역은 많은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았다. 어린 나이에도 이 지역의 건물이나 골목은 범상치 않은 기운이 휘감긴 곳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창경궁과 창덕궁을 지나 버스에서 내려 계동골목을 오르기 시작하면 초입 우측에 휘문고등학교가 있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역시 우측에 대동상업고등학교가 있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언덕 끝에 다다르면 중앙고등학교가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골목에 큰 학교가 세 군데나 있는 것도 대단했지만 더 신기했던 것은 그 학교 주변에 널려 있는 한옥과 일제강점기 즈음에 지어진 것 같은 고풍스러운 건물, 그리고 근래에 지어진 신식 고급 양옥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이곳이 조선시대 벌열(閥閱) 양반들이 살았던 북촌 지역의 중심이라는 것은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특히 계동과 가회동이 맞붙은 지역에 있는 큰 집들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의 위세가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이 집들이 누구나 살 수 없는 집이라는 것은 TV 연속극에서 부잣집 마나님이 앉아 '계동 마님', '가회동 사모님' 등으로 불리는 것을 보고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한 골목 안의 라이벌 중앙고와 휘문고

이 세 학교 외에도 북촌 지역은 한국 근대 교육의 요람이라 할 만큼 한국 근대기 명문학교들이 몰려 있었다. 초등학교로는 교동, 재동, 수송초등학교가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중등학교로는 화동에 있는 경기고를 중심으로 근처에 덕성여고, 풍문여고, 창덕여고가 있고, 수송동 쪽에는 배재고, 중동고, 숙명여고 등이 있어 가히 교육의 산실이라 할 만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이후 강남 등 다른 지역이 개발되면서 경기고, 휘문고, 배재고, 중동고, 숙명여고, 창덕여고 등이 이사를 가고 현재는 몇 학교만 남아 있다. 이들 학교는 근대기의 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배출하여 한국의 근대화를 이루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60년대 휘문고 전경 ⓒ 휘문교우회

 
북촌의 많은 학교들 중 계동골목 양쪽에 있던 중앙고와 휘문고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다. 두 학교 모두 1906년(휘문고)과 1908년(중앙고) 비슷한 시기에 설립되어 110년을 훌쩍 넘긴 유서 깊은 학교로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었던 명문학교이다.

중앙고는 인촌 김성수가 민족계열 학교인 기호학교를 인수하여 설립하여 민족학교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휘문고는 자작(子爵) 직위를 받은 세력가 민영휘가 세워 당시 신교육을 받은 훌륭한 교사를 많이 초빙하는 등 매우 세련된 학교 운영을 하였다. 특히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이 대거 몰려들어 뛰어난 성과를 내었다.

학업 외에도 두 학교는 일제강점기에 드물게 야구부를 창설하여 학교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 두 학교는 오랫동안 서로 경쟁하듯 좋은 성적을 내며 한국 야구계를 이끌어왔다. 현대 한국 프로 야구가 이렇게 뿌리를 내린 데에는 두 학교가 오래 전부터 씨를 뿌린 영향도 상당히 있을 것이다. 특히 휘문고에 다녔던 화가 '이쾌대'와 미술품 수장가 '전형필'이 야구부에 많은 관심을 가진 것은 매우 유명한 일이다.

실제 두 학교의 야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두 학교 근처가 들썩였는데, 휘문고가 강남으로 가기 전 1970년 대 후반까지도 두 학교의 시합을 있는 날이면 학교에 휴교령이 내릴 정도였다. 두 학교에는 야구부 외에도 적극적인 여러 문화 활동 모임이 많아 유명하였는데, 배재·양정·보성고와 함께 세칭 '5대 사립'이라 불렸다. 이들에 비교하여 경기·서울·경복·용산·경동고 등은 '5대 공립'이라 불렸다.

중앙고, 휘문고와 문화 예술

근대기의 중등학교는 한국 근대 예술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데, 중앙고와 휘문고는 많은 문학가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중앙고 출신의 문학가로는 채만식, 서정주 등이 유명하였고, 휘문고 출신으로는 정지용, 이태준, 박종화 등이 문명을 드날렸다.

미술 쪽에서의 활동도 눈부셨는데 두 학교가 가까이 있어 고희동이나 이종우, 김용준 등이 두 학교에 모두 수업을 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미술을 공부한 한국인이 적어 한 사람이 여러 학교에 촉탁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좌부터) 김용준, 김용준 작품 '동십자각', 동십자각 ⓒ 황정수

중앙고의 미술교육은 일본 도쿄미술학교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미술교사를 시작하면서 시작된다. 뒤를 이어 역시 도쿄미술학교 출신인 이종우가 고희동의 뒤를 이어 이곳에서 미술교사를 시작하였다.

이들의 존재는 중앙고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어 많은 학생들에게 미술가를 꿈꾸게 하였다. 또한 당시 중앙고 교장이었던 심형필도 청전 이상범에게 배우며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라 미술에 대한 교육은 더 열성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김용준이나 이여성 등 재주 있는 학생들이 이들의 영향을 받아 훗날 좋은 화가가 된 것이다. 특히 김용준은 고보 재학 시 폐허가 될 위험에 처한 경복궁 동십자각을 그린 '동십자각'이란 작품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화제가 되었는데, 이 작품을 제작한 곳이 바로 중앙고보 이종우의 미술실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한국 최초의 3층 건물 휘문고 희중당. ⓒ 휘문고

 
휘문고에서는 중앙고보다 훨씬 많은 미술계 지망생들이 나타났다. 미술교사였던 고희동의 영향은 장발, 서동진, 오지호, 이승만, 윤희순 등 많은 능력 있는 근대미술가들이 배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고희동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고려화회'는 휘문고 학생들을 미술로 이끄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훗날 한국 미술계를 이끄는 중심인물이 된다.

중앙, 휘문 두 학교를 다닌 화가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단연 이여성, 이쾌대 형제이다. 이여성은 중앙고, 이쾌대는 휘문고를 다닌 후 화가로서 활동하였는데, 6.25 전쟁이 일어나자 둘 다 월북하는 비운의 삶을 공유한다. 계동골목에서 일어난 역사의 작은 소용돌이였다.

또한 중앙고는 1921년에 개최된 서화협회의 첫 전시회 장소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안중식과 조석진이 이끌던 서화협회는 결성 후 전시 할 곳을 물색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인촌 김성수의 도움으로 중앙고보 강당에서 첫 전시를 하게 된다.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서화협회 첫 전시를 연 곳이 당시 민족학교를 표방하였던 중앙고보에서 열렸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 전시회가 열렸던 강당의 모습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그 얼마 후 확장하여 신설한 강당만으로 당시의 모습을 추정할 뿐이다.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설계한 동관과 서관 ⓒ 황정수

 
중앙고보는 현재까지 같은 자리에서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오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중앙고보는 계동 길 끝자락 언덕 위에 창덕궁 후원과 담을 같이 하고 있다. 10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지닌 명문학교답게 근대기 학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고풍스러운 건물과 넓은 운동장을 가진 캠퍼스로 유명하다.

대부분 강남으로 이사 간 학교는 교사를 새로 지어 옛 모습을 추측하기 어렵다. 그에 비해 중앙고보는 돌과 벽돌로 지은 옛 건물이 그대로 있어 한국 근대 교육 현장의 모습을 시공을 초월하여 증언하고 있다. 특히 덕수궁미술관을 설계한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설계한 동관과 서관은 아름다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 학교의 교정은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한때 엄청난 인기를 누린 TV드라마 '겨울연가'의 무대로 쓰이기도 하였다. 이 드라마가 일본, 중국, 동남아에까지 인기가 있자 한류의 확산에 따라 외국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기도 하였다. 지금도 그 명성을 찾는 외국인들이 심심치 않게 있다. 이후에도 많은 대중 매체에 노출되어 마치 명승지처럼 북촌 지역의 명물이 되었다.

관상감 터에 세워진 휘문고와 현대사옥

휘문고는 본래 조선시대 관상감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학교이다. 그런데 1978년 오랜 역사를 뒤로 하고 정부의 시책에 따라 강남으로 학교를 이전한다. 휘문고가 강남으로 이전할 계획이 만들어진 초기에는 휘문고 자리가 공원으로 조성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였다. 창덕궁 옆 유서 깊은 학교가 공원으로 조성된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희망적인 기대감을 품었다.

그런데 그런 소문과는 달리 휘문고 부지는 현대그룹에 판매되었고, 결국 이곳에 현대그룹 본사가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건설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던 현대그룹은 휘문고의 유서 깊은 건물을 모두 없애버렸다. 그래서 한국 최초의 3층 건물이라는 '희중당'마저도 없어지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 있는 매우 중요한 조선시대 유물조차 없애고자 하였다.
                 

현대사옥 우측 앞에 있는 관천대. ⓒ 황정수

  
남쪽 끝에 돌을 쌓아 만든 '관천대(觀天臺)'가 바로 그것이다. 이 유물은 한국 천문학계의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경주 '첨성대'와 같이 별을 관측했던 곳이다. 이런 중요한 천문학 자료를 없애려 하였으니 한국 최고 기업의 문화인식으로서는 참으로 비문화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결국 이를 인지한 많은 문화인들의 이의 제기로 '관천대'는 살아남을 수 있었고 옹색하나마 지금의 위치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창덕궁과 운현궁을 가로 막고 서 있는 현대사옥 ⓒ 황정수

 
1983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휘문고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건물 두 동이 완성된다. 공원이 될 것이라 기대한 곳에 뜬금없는 거대한 대기업 사옥이 들어서자 시민들 사이에는 정권과 경제계가 서로 담합을 하여 이루어진 일이라 의심하며 달갑지 않게 생각하였다. 사람들이 현대사옥을 정경 유착의 결과물로 이야기 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건축의 허가가 정당했는지의 문제이다. 지금 존재하는 현대사옥 건물은 정상적으로 이곳에 들어설 수 있었을 지 누구나 의심할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큰 규모이다. 지금도 너무 커 위압감을 느낄 정도인데 1983년에는 어떤 정도였을지 상상이 될 것이다.

이곳은 고궁인 창덕궁이 바로 옆에 있어 건축법 상 이렇게 높고 큰 규모의 건물이 들어설 수 없는 곳이다. 실제 주변에 이런 규모의 건물이 들어서지도 않았고, 주변 다른 곳의 경우 실제 많은 고도의 제한을 받는다. 그런데 이런 높은 규모의 건물이 어떻게 허가가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정경유착이 의심받은 가장 큰 이유이다.

둘째, 이 장소는 오랜 역사를 가진 휘문고 자리일 뿐 아니라 조선시대 천문대인 관상감이 있었던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공사를 시작하며 지역에 대한 충분한 미술사적 조사와 보존에 대한 고민을 했을 텐데, 이러한 문화재 보존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도 알 수 없다. 분명 이곳 지표를 조사하며 발굴했을 때 많은 건축에 장애가 되는 유물들이 나왔을 텐데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험했던 군사정권 시절을 의심하는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완성된 건축의 결과물이 주변과의 조화가 잘 되는가의 문제이다. 주변 환경과 규모와 디자인 면에서 어울리는가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현대그룹은 휘문고의 오래된 건물들을 고민도 없이 모두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엄청난 규모의 단순한 사각 형태의 건물 두 동을 세웠다. 미학적 고려는 전혀 없이 단순하게 사각으로 반듯하게 공간의 효율성만을 고려하여 지은 사무실용 건물이다.

문제는 이 거대한 건물이 들어서자 이 지역이 모두 초라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임금이 살았던 창덕궁은 왜소한 공간이 되어버렸고, 바로 옆에 있는 건축계의 거장 김수근의 '공간사옥'은 현대 건물 숙직실 같이 되어버렸다. 관상감 자리임을 알려 주는 관천대는 어느 대갓집 굴뚝을 뜯어다 놓은 장식물처럼 되어버렸다. 이런 무지막지한 건물이 문화 유적이 많은 문화보존 지역에 어떻게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인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필자는 이제라도 이 무지막지한 건물이 지금이라도 다른 어느 곳으로 이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요즘 일부 미술계 인사들이 좋아하는 풍수지리 관점이 아니더라도, 이곳은 이런 큰 규모의 건물이 들어설 자리가 아니다.

바로 옆에 창덕궁이 있고, 건너편에 운현궁이 있는 데다 북촌의 한가운데 우뚝 솟아 조선시대 정신을 지탱하고 있는 북촌 지역을 짓누르고 있는 형상이다. 이런 건물이 존재하는 한 창덕궁이나 운현궁이 당당한 모습을 유지하기 어렵고 북촌이 전통 문화 보존 지역으로 유지되기는 더욱 요원하다. 그런 면에서 현대사옥은 문화적으로는 괴물과 같다.

필자는 감히 말한다. 조선총독부의 건물이 경복궁 앞에 자리 잡아 조선의 좋은 기운을 막아버린 것이나 현대사옥이 창덕궁 옆에 자리 잡아 창덕궁의 기운을 죽인 것이나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일제하의 조선총독부 건물 배후에 식민지 아래 민족 수탈의 주체인 제국주의가 있다 한다면, 이 현대사옥은 유신시대에서 이어지는 독재 정권의 산물이 아니겠는가? 이제라도 현대사옥을 북촌에서 멀리 떨어진 제격에 맞는 곳으로 이전하라. 이런 괴물 같은 건물이 대한민국의 전통이 숨 쉬는 곳에 존재해서는 국가의 위엄을 세울 수 없다. 이 또한 지난날의 비극적인 적폐이고 슬픈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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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