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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5.16 14:14 수정 2019.05.16 14:14

탑골공원 정문 삼일문 ⓒ 황정수


부처님 오신 날, 어디로든 나가고 싶기에 무작정 길을 나섰다.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를 갈까, 아니면 근교 어느 작은 절이라도 찾을까 망설이다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다른 절을 찾을 게 아니라, 코앞에 있는 탑골공원도 예전 원각사 터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탑골공원은 3.1절에 연중행사로 한 번 떠올리고 말뿐 곧 잊히기 일쑤였다. 더욱이 아름다운 '원각사지십층석탑'조차 유리관 속에 들어간 이후 기억에서 멀어져 잘 가지 않는 곳이 되고 말았다.
 
탑골공원에 도착해 처음 맞는 정문은 '삼일문'이다. 삼일운동의 발상지를 의미하니 그럴 법 하긴 하다. 한때 이곳의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 글씨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일본 육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의 친필 현판을 삼일 독립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곳에 걸 수 없다며 한 단체가 현판을 떼어 훼손시켰다. 그리고 장소에 걸맞게 독립선언서 글씨체로 한글 현판을 다시 만들어 달았다. 
 
그러나 이곳은 조선시대 '원각사'가 있었던 자리이고, '원각사지십층석탑'이 있어 '탑골공원'이라 불린 곳이다. 근대 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파고다공원'이 되었고, 이곳에서 1919년 3.1 만세를 불렀다.

이런 역사를 포괄적으로 생각해보면 현재의 문 이름이 대문 이름으로 적합한가에 의문이 따른다. 이곳의 현판은 본래의 의미를 고려하여 '탑골공원'이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삼일운동 기념 조형물
 

‘의암 손병희 선생상’과 ‘용운당대선사비’ ⓒ 황정수

 
삼일문에 들어서면 공원 안에 삼일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조형물들이 여럿 있다. 공원 초입 우측에는 독립선언서 낭독을 기념하는 '독립선언기념조형물'이 서 있다.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정오 정재용에 의해 처음으로 이곳에서 낭독한 후 뿌려진다. 정재용은 한때 경신학교 학생으로 알려졌으나, 후에 해주 의창학교 교감으로 밝혀진다.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의암 손병희 선생상'은 1966년 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에서 성금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용운당대선사비'는 삼일운동의 주역인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스님을 기리는 비이다. 마침 학생 시절 좋아하던 한용운의 시 '춘화(春畵) 1'가 생각이 나, 봄날 이곳에서 낮은 소리로 읊어본다.
 
따스한 별 등에 지고 유마경 읽노라니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린다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오.
 
우측 담장을 따라 '삼일정신찬양비'가 서 있고, 이어서 삼일운동에 참여한 전국 민중들의 투쟁모습을 담은 동으로 만든 부조 작품 10여 개가 서 있고, 이어 이은상이 지은 '탑골공원사적비'가 서 있다. 부조의 작가가 적혀 있지 않아 담당자에게 물었더니 모른다고 한다.
 
원각사의 역사유물
 

‘원각사지십층석탑’과 ‘대원각사지비’ ⓒ 황정수

 
'원각사지십층석탑'은 이곳의 상징이다. 원각사는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워졌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대리석과 유사한 무른 돌인 납석(臘石)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흰 빛을 띠어 오래 전부터 '백탑(白塔)'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곳의 또 다른 귀물 중 하나가 보물 3호로 지정된 5m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 '대원각사지비'이다. 거북 비좌와 용 문양으로 조각된 비석이 신비스러울 정도로 아름답다. 이 비는 원각사의 창건 전말을 기록한 비로 1471년에 건립된 것이다. 귀부는 화강석제의 기하학 무늬이고, 비좌로부터 배면에는 연꽃잎이 뒤덮여 있으며, 귀두는 목이 수평으로 돌출되어 있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비표를 지은 이는 김수온(金守溫), 글씨를 쓴 자는 성임(成壬)이고 비음을 지은 자는 서거정(徐居正), 글씨 쓴 이는 정난종(鄭蘭宗)이다. 이 중 정난종은 금속활자인 '을유자(乙酉字)' 기본 글씨의 전범이 된 저명한 서예가이다.
  

팔각정 ⓒ 황정수

 
공원의 한복판에 있는 '팔각정'은 지붕이 팔각형으로 되어 있어 이름 지어진 것이다. 5단 석축 기단 위에 마루를 깔지 않고, 직접 기둥을 세운 구조로 되어 있다. 조선 고종 때 영국인 브라운이 신식공원으로 조성하며 함께 건립된 건물이다. 1902년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위하여 군악대의 연주 장소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공원의 이름은 주로 '파고다공원'이라 불렸다.
 
유리관 속 신세 원각사지십층석탑
 

유리관 속 탑과 본래의 탑 모습 ⓒ 황정수

  
탑골공원에 와서 가장 당황스러운 일은 이 공원의 상징인 '원각사지십층석탑'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1998년부터 유물 보존을 위해 유리 보호관으로 탑을 온통 에워싸 가두어 탑골공원에 가더라도 탑을 온전히 볼 수 없다. 당시 산성비에 노출되고 풍화가 지속되는 데다, 비둘기가 배설물로 오염시켜 탑이 급속도로 훼손되어 간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유리관을 씌워 이 세상 사람 누구도 영원히 이 탑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은 탑이 훼손되는 것보다 더욱 비극적인 일이다. 이제 세월도 많이 지나 문화재에 대한 시각도 달라졌고, 비둘기도 사라져 예전과 환경이 다르니 이 무지막지한 유리관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다.
 
본래 파고다 공원을 '탑골공원'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원각사지십층석탑'이 있기 때문이다. 이 탑은 기단부터 탑신 꼭대기까지 온갖 동식물과 인물상이 빈틈없이 조각되어 있어 조선시대 석탑으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우수한 조각 솜씨를 보여준다.

높이 또한 12m로 높은 건물이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주변 어디서든 보여 사람들을 이곳을 '탑동(塔洞)'이라 부를 정도로 유명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 탑은 이 공원의 주인일 뿐 아니라 이 근처 동네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제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둘러싸고 있는 유리관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근래의 연구에 따르면 보호관 설치 이후에도 새로운 환경에 따른 훼손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다고 한다. 한편으론 문화재의 보존이란 면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도 있다. 인간 세상과 유리된 문화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한 한국인은 물론 전 세계사람 누구도 영원히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는 문화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탑의 입장에서도 유리관 안에 들어 앉아 영원히 면벽 수행을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석탑 또한 비록 비바람에 풍화가 되고 비둘기 똥으로 산화가 가속된다 하더라도, 비바람을 맞으며 사람들의 눈길을 마주하고 싶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것이 순리인 것처럼 문화재도 자연 속에서 늙어갈 권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굳이 더 이상 낡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만이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지금의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고 있노라면, '백탑'이라는 별명의 '하얀' 이미지처럼 측은하기 짝이 없다. 이제 유리관을 없애라!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경천사지십층석탑'처럼 박물관으로 이전하고, 복제품을 이곳에 세우라. 그리하여 '탑골'에 탑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을 국민들이 보게 하라. 그리하여 이곳이 '원각사지십층석탑'이 있는 '탑동'임을 알게 하라.
 
유리관 설치가 그때는 옳았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옳지 않다. 이제 유리관을 없애고, 탑이 국민들과 함께 숨 쉬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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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