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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4.26 14:18 수정 2019.04.26 14:32
 

독일 언론 슈피겔에서 보도한 손기정에 대한 기사 "가장 슬픈 올림픽 우승자" ⓒ Der Spiegel


나치의 시대, 히틀러는 세계인들에게 독일의 막강한 힘을 선전하기 위해 베를린 최대 규모의 건축물을 세운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올림피아 슈타디온'이다. 그의 야심은 역설적이게도 올림픽을 통해 독일이 세계평화를 사랑하는 국가임을 알리는 것이었다.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라톤 경기 영상 속 관중들은 평화롭고 행복해 보인다. 그 중간중간 팔뚝에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 띠를 두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마라톤의 마지막 코스인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 입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승자를 기다리고 있다. 응원하는 관중들 속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국기는 일장기였다.
 
곧이어 손기정 선수가 고개를 숙이며 경기장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독일 해설가는 일본인이 우승이라고 외친다. 이 영상에서는 당대 유럽의 악명 높은 제국주의 국가인 독일과 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의 축제 분위기가 오묘하게 풍긴다. 결국 손기정은 마라톤 우승 월계관을 쓴 채로 일장기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만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베를린 인적 드문 곳의 손기정
 

베를린에 있는 손기정 동상 ⓒ 권은비

 
2016년 손기정기념재단은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 인근에 손기정 동상을 세운다. 이 동상에는 일장기는 사라지고 382번이라는 당시 손기정 선수의 참가번호가 크게 들어가 있다.
 
나는 직접 동상을 보기 위해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으로 향했다. 경기장 앞에 도착했지만 동상을 안내하는 지도를 따라 1.4Km나 한참 걸은 뒤에야 손기정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길을 걷는 동안 지나가는 행인은 한명도 볼 수 없었다. 인적 드문 '루돌프 할빅'이라는 스포츠연습장 안에 들어선 후에야 달리는 모습의 손기정 동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동상을 보며 나는 1936년을 그려보았다. 올림픽 경기가 끝난 후, 손기정 선수는 베를린의 한 두부 공장에서 우승 파티를 했다고 한다. 일본인의 눈을 피해 조선인들끼리만 몰래 모인 자리였다. 축하하자고 모였지만 분위기는 가벼울 수 없었다. 후에 손기정은 그때 두부 공장 벽에 걸린 태극기를 보고 전율했다고 자서전에 썼다.

그 두부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이 바로 안봉근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형으로, 이 공장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후원했다고 한다. 손기정의 삶은 대한민국의 온 국민들이 아는 역사적 이야기지만, 안봉근의 삶은 대중에게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저 손기정의 우승파티를 열었던 두부공장의 운영자이자, 항일투사 안중근의 사촌형. 그것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찍이 유덕고려학우회가 있었다
 

오토 부르하드박사 (좌측), 1923년 독일신문 ‘보시헤’에 보도된 관동대지진 이후 재일조선인 학살 기사 (우측) ⓒ 권은비

  
1936년 손기정이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베를린에 도착하기 이전에, 일찍이 베를린에는 이극로와 이미륵, 그리고 안봉근이 있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1921년에 세워진 최초의 재독한인단체 '유덕고려학우회'를 짚고 넘어가야한다. 다소 생소한 이 이름의 단체는 최근 영화 <말모이>의 주인공 이극로가 서기를 맡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민족 언어를 지키기 위한 한글운동을 펼친 이극로는 해방 이후, 남한에서 조선어학회를 재건하고 결국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함께 활동한 이미륵은 독일에서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출판하여 일약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독일에서는 최근 이미륵을 '한국의 토마스 만'이라고 평가하며 그의 기념 현판을 뮌헨 인근의 플라네그 지역에 설치하기도 했다. 

1923년 10월 26일, 이들은 베를린에 있는 한인들과 독일어로 쓴 선언문을 뿌린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폭압 통치"라는 제목의 이 선언문은 일본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들이 무참히 학살된 사실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말'로 항일운동을 펼친 이극로의 행보답다.
   
유덕고려학우회가 이 선언문을 발표하기에 앞서, 베를린에 있는 한인들은 1923년 독일신문 <보시헤>를 통해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에 있는 조선인들이 무참히 죽어가고 있다는 기사를 보게 된다. '오토 부르하드'라는 이름의 박사에 의해 세상에 공개된 사실이었다. 
 
그는 직업 기자가 아니었다. 독일의 유명 미술작품 수집가이자 동양미술전문 큐레이터였다.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에 미술품 수집을 위해 머물던 중, 일본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조선인들을 보게 됐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유덕고려학우회는 오토 부르하드 박사의 기사를 본 후, 그와의 면담을 진행하여 1923년 10월 독일 최초의 한인운동인 '재독한인대회'를 개최했다. 
 
아직 발굴되지 못한 역사
 

‘유덕고려학우회’가 있던 건물(좌측), 안봉근의 자택으로 알려진 곳 (우측) ⓒ 권은비

  
나는 유덕고려학우회의 사무실과 안봉근의 자택이었다던 베를린 칸트길(Kantstrasse)을 찾아갔다. 물론 그곳에서는 현재 유덕고려학우회와 안봉근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1921년 유덕고려학우회가 있던 자리에는 비행 실습장이 있었고, 안봉근의 자택이었던 곳에는 동남아 레스토랑과 카지노장이 나란히 들어서 있었다.
 
1920년대, 말 그대로 '탈'조선을 해야만 했던 그들의 삶과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여 도착한 독일 베를린에서의 조선 독립운동활동을 생각하며 나는 한참 동안 칸트 길에 머물렀다. 유덕고려학우회의 자료에 의하면 1923년 독일에 거주했던 한인들은 총 88명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각각 무슨 연유로 조선에서 독일 땅까지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다.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올해, 한국에서는 100년의 발자취를 되새기고 독립운동의 주역들을 기념하는 프로젝트가 많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독일 땅에서 최초로 한인운동을 했던 이들에 대한 기록과 연구는 그들의 노고에 비해 아직 턱없이 초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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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독일해외통신원. 한국에서 공공미술가로 활동하다, 현재 독일 베를린에서 대안적이고 확장된 공공미술의 모습을 모색하며 연구하고 있다. 주요관심분야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 공동체안에서의 커뮤니티적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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