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1
원고료주기
등록 2019.04.25 11:35 수정 2019.04.25 12:52
 

임득명 '가교보월' ⓒ 삼성출판박물관

 
조선후기 규장각 서리로 있던 임득명(林得明, 1767-1822)은 옥계시사(玉溪詩社)의 동인으로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다. 옥계시사는 천수경(千壽慶), 장혼(張混) 등 인왕산 옥동 주변에 살던 사람들이 모여 만든 모임이다. 이들은 산자락에 자주 모여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곤 하였다. 1786년 음력 7월 16일 달밤 이들은 인왕산 기슭 청풍정사에 모여 시사(詩社)를 결성하기로 결의한다.
 
이날 모인 13명은 각각 시를 한 편씩 짓고, 그 중 여섯 편의 시에는 임득명이 그림을 그린다. 이를 묶어 '옥계십이승첩'이라 이름 지었다. 그 중에 다섯 번째 시는 모임의 좌장이었던 천수경이 '가교보월(街橋步月)'이라는 제목으로 짓고, 임득명이 그에 걸맞는 그림을 그린다. 내용은 음력 정월 대보름 풍습인 답교놀이의 즐거운 광경을 노래한 것이다.
 
"대보름은 아름다운 명절이라서 술에 취하여 서로들 부르네.
달빛이 대낮처럼 밝으니 봄놀이가 오늘부터 시작되네.
노니는 발끝이 큰 길을 맑게 하고 무리들의 악기 소리가 광통교에 들끓는데,
통금도 없는 밤에 맘껏 이야기하니 기쁜 마음이 갑절이나 더해라.
적여재(積餘齋) 천수경(千壽慶)"

 
시의 주제가 된 아름다운 다리는 바로 청계천 '광통교(廣通橋)'이다. 당시 상업이 발달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던 광통교 주변의 번화한 풍경이 잘 드러나 있다. 술에 취할 수 있고, 악기 소리 들끓을 정도이니 당시 광통교 주변의 상황을 대충 알만하다. 시 속의 풍경을 임득명이 간결한 필치로 잘 묘사하였다.
 
임득명이 그린 '가교보월'은 일반적인 조선시대 산수화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성을 보인다. 청계천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게 그린 후 광통교를 반듯하게 포치하였다. 그렇다 보니 청계천가에 자리 잡은 집들이 위태롭게 사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기법은 당대에 유행한 서양화법의 일면으로 보인다. 하늘에는 등은 둥근 보름달이 떠있어 오늘이 정월 대보름임을 알려준다. 흐르는 물 위에 놓여 있는 다리 위에 여러 사람이 모여 달을 감상하고 있다. 대보름 답교놀이의 흥이 한껏 살아 있다.
 
집과 나무 등의 사물에 살짝 색깔을 넣어 감각적인 느낌을 주었다. 맑은 남종문인화의 성격이 보인다. 천변의 집들이 잇달아 이어져 있어 이곳이 매우 번성한 지역임을 보여준다. 그림의 건너편 쪽이 술집이나 여러 가게들이 몰려 발달한 번화가였다. 여기에 술집뿐만 아니라 서화가게 등이 있어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오원 장승업의 어린 시절
 

장승업 ‘왕희지와 도연명’ ⓒ 선문대박물관

 
임득명의 후배 격으로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 미술에 천재적 재능을 보였던 화가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이 주로 활동하였던 지역도 바로 이곳 광통교 주변이었다.

장승업은 몰락한 무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는다. 집안이 가난하여 의탁할 곳이 없자 한양으로 무작정 들어온다. 그는 갈 곳이 없자 수표교 근처에 살던 중인 출신 부자인 이응헌(李應憲)의 집에 기식하며 고용살이를 하였다. 사람에 따라 변원규(卞元圭)의 집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남의 집에 겨우 몸을 의탁하고 있다 보니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해 배움이 없었다. 공부를 할 수 없었던 장승업은 그림그리기를 좋아하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 붓과 물감 등 재료가 없으니 땅 바닥에 그리기도 하고, 종이가 생기면 그곳에 그리기도 하였다. 마침 주인이 그의 재주를 알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집에는 좋은 그림과 중국에서 출판된 그림 화보 책이 많았다.
 
주인이 자기 집의 명품 고서화와 화보들을 보여주자, 그는 모두 그 자리에서 외워버렸다. 그래서 미술공부를 따로 배우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그림이 완성되어 갔다. 전형적인 천재들의 학습 과정을 겪은 셈이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자 그는 산수, 인물, 영모, 화조 등 모든 미술 분야에 못하는 것이 없게 되었다.
 
광통교의 인기 화가
 

장승업 ‘기명절지도’ ⓒ 선문대박물관

 
장승업은 그림 실력이 늘자 광통교 서화 시장의 거간들과 가까이 지낸다. 그의 그림은 인기가 많아 많은 이들이 찾았다. 당시 광통교에는 청계천을 따라 시장이 줄지어 서 있었고, 그중에는 서화 가게도 여럿 있었다. 중국과의 교역이 늘어 광통교의 상업도 많이 발전하였고 그에 따라 서화 가게도 성황을 이루었다.
 
이곳에서 처음에는 민화와 같은 조선의 장식화가 많이 거래되었으나, 점차 화원 급 화가들의 정통화도 거래되었다. 더욱이 도화서가 무너진 뒤로는 여러 화원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당시의 서화 애호가들은 김홍도 화풍의 그림을 좋아하여 김홍도의 그림의 아류들이 제작되어 많이 팔리기도 하였다.
 
한편으론 점차 중국과의 교류가 많아지며 중국 미술품들도 들어와 판매되었다. 이런 흐름은 중국화풍의 그림을 잘 그린 장승업에게 큰 도움이 되어 더욱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장승업의 '기명절지도'와 '영모도'는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었다.
 
장승업은 주로 청나라 상해화파들의 그림과 유사한 화풍의 그림을 그렸다. 그의 솜씨는 중국 화가들 못지않아 나중에는 중국 화가들보다 더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당시 부자 서화 수장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장승업의 그림을 찾았다. 그가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는 말은 너무 많은 주문을 받다보니 정성을 다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그림을 그리다 어느 한 부분을 빠뜨리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한 번은 말을 그리다 다리 하나를 안 그린 적도 있고, 어떤 때는 꽃을 그리다 꽃과 줄기만 그리고 잎 그리는 것은 잊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낙관도 자주 잃어버려 근처에 살던 전각가 오세창이 다시 새겨 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장승업의 기행
 
장승업은 그림 실력뿐만 아니라 기행으로도 유명하였다. 특히 술과 여자 이야기는 늘 따라 다니는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그는 술과 여자 없이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릴 동안은 반드시 옆에 술과 여자가 있어야 했다. 그만큼 음주와 여색은 그에게 일상생활과 다름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술을 마셨다. 그러나 술을 한 번에 지나치게 많이 먹어 혼절하거나 하는 것은 또 아니었다. 대신 적당히 계속해서 마셨다. 그러니 술에서 깨어나는 일이 없으니 늘 취해 있는 것이었다. 그는 소매에 술을 넣어가지고 다니며 술이 깨면 꺼내어 마시곤 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취하지 않은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술 때문이지 그의 얼굴은 약간 기름진데다 서양 사람처럼 노란 동공을 가지고 있었고, 술독 때문인지 우뚝한 코가 늘 불그스레하였다. 코 아래로는 늘 수염을 길러 개성 있는 얼굴이었다. 생김새가 그다지 잘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주변에는 예술가다운 어떤 상서로운 기운이 돌아 훤해 보였다. 그는 또한 옷차림새로도 유명하였다. 늘 비취색 같은 푸른 색 창의(彰衣)를 입고 다녀, 멀리서도 그가 보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림 주문에서도 그는 특별한 성격을 보여주었다. 그의 집 앞에는 늘 그림을 찾는 사람으로 들끓었다. 그는 사람에 대한 편견이 없어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부탁은 웬만하면 다 들어주었지만,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이 와서 억지로 무례하게 그림을 청하면 목숨을 걸고 거절하였다고 한다.
 
장승업은 40이 넘어서야 겨우 아내를 얻어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그러나 첫날밤만을 보내고 얽매이는 게 싫어 도망가 버린다. 그렇게 유랑의 삶을 살았지만 전혀 여인과 가정을 꾸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어여쁜 여인과 함께 종로 탑골 공원 맞은편인 관수동 지역에 살았다는 말도 있었고, 또한 한동안은 창덕궁 남쪽 원남동에 거주하였다고도 한다. 그런 것을 보면 장승업이 여인을 꺼린 것은 아니고 집안에 묶여 사는 것이 힘든 성격이었던 것 같다.
 
화원 시절의 장승업
 
광통교에서 장승업의 이름이 높아지자 화원으로 추천되어 궁중의 그림을 맡아 그리게 되었다. 장승업이 술을 좋아하는 것을 안 임금 고종은 병풍 여러 첩을 그리게 하고 하루에 두어 차례씩만 두서너 잔의 술을 주도록 하였다. 장승업은 얼마 동안은 견디며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결국 이기지 못하고 채색을 사오겠다고 거짓을 고하고 야반에 탈주하여 잘 다니던 술집으로 도망갔다. 결국 임금에게 들켜 잡혀 들어와 더욱 경계를 강하게 하였더니, 이제는 감시하는 포졸들의 옷을 훔쳐 입고 달아나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 고종은 매우 화가 나 그를 잡아다 가두어 버렸다.
 
임금이 장승업을 제어하지 못하자 민영환이 나서서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민영환은 장승업의 옷을 몰래 감추고 술과 안주를 넉넉히 주고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장승업은 한동안은 또 그림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시장 통의 술집을 그리워하였다.

여인이 있고, 술이 있고, 춤이 있는 술집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는 다시 감시하는 사람이 조는 틈을 타서 몰래 도망가 버리고 만다. 자유로운 성격의 장승업에게는 민영환의 집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만큼 장승업에겐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어두운 감옥과도 같았다.
 
장승업의 회화의 특징
 

장승업 ‘호취도’ ⓒ 삼성미술관 리움

 
장승업은 그림은 조선조 정통 회화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명한 화가의 문하에서 공부한 것도 아니고, 도화서에 들어가 배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 역관 출신의 중인 부자 집에서 기거하며 그곳에 있는 고서화와 중국 화보를 보며 공부한 것이 그의 미술세계의 전부였다. 그 덕에 그의 그림세계는 당대 유명한 다른 화가들과는 매우 달랐다.
 
장승업은 조선의 화풍뿐만 아니라 중국 원나라 사대가로 불리는 황공망, 오진, 예찬, 왕몽을 매우 좋아했으며, 화보를 통해 그들의 작품을 보고 배우며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늘 새로운 그림 경향을 받아들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 속에는 김홍도의 신선 그림이나 정학교의 바위그림, 유숙의 매 그림 같은 소재들의 모습이 보일 뿐 아니라 남종 문인화의 화풍도 엿보인다.
 
장승업 화풍의 가장 큰 장점은 산수, 인물, 영모, 화훼, 기명절지 등 다양한 소재를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자유자재로 구사했다는 것이다. 능수능란 그의 작품은 짜임새 있는 구성과 힘차고 능숙한 필법을 갖추고 있고, 강한 먹의 사용과 섬세한 채색을 바탕으로 화면 전체에 생동감이 넘치게 한다.
 
그러나 정신적 사상을 드러내는 측면보다는 기교적인 표현에 능숙한 점과 인물묘사와 영모, 화훼, 절지 등 대부분의 작품에서 중국 화풍이 절대적이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화가로서의 재주만은 천재적인 기량을 보여 당대 제일의 화가로 칭송을 받을 만하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