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23 11:58최종 업데이트 19.04.23 17:05
꽃은 어떻게 시절을 알까? 지난해 집 앞 라일락꽃이 향기로워 사진을 찍던 날이 4월 17일이었다. 올해도 같은 날에 라일락은 보라색 꽃을 활짝 피워올리고 있었다. 집 앞 골목에 라일락 향기가 가득하다. 아침에 집을 나서고,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서 라일락 아래 한참을 서성거린다. 그 향기가 내 안에 쌓인 기억을 불러낸다.

라일락 향을 맡으면 대학교 봄날 교정이 떠오른다. 그 향기를 따라 맵고 따갑고 질식할 듯한 최루탄 냄새가 이어졌다. 4월 17일 무렵이면, 4.19를 앞두고 있어서 교정이 평화롭지 못했다. 그래서 항상 라일락 향기는 오래 즐길 수 없는, 화들짝 사라져버리는 봄날 꿈같았다.


나는 큰 아이의 학교를 따라 안양에 10년을 살았다. 그때 위안이 되었던 것은 안양 창박골 초입의 라일락 한 그루였다. 까치발을 하고 담장 너머 라일락을 보면서, 그 집 주인을 고마워했고, 그 집을 탐냈다. 삼각형으로 생긴 마당에 집채보다 더 크게 자란 라일락이 꽃을 피울 때면, 창박골 초입에서 버스를 내려 라일락 향을 맡고 집까지 걸어왔다.

그런데 어느 해 신경질적으로 가지를 후려쳐서 풍성한 라일락을 몽당연필처럼 만들어버린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내가 봉변을 당한 것 같았다. 나무 학대죄가 있다면 집주인을 고발했을 것이다. 향기로움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는 것인가 아득하기만 했다.
 

집 앞 라일락꽃, 빛이 줄어들수록 향은 더 짙어진다. ⓒ 막걸리학교

 
경복궁 앞 삼청로에 사무실이 있어 출근할 때에, 시청 옆 프레스센터 앞에서 마을버스를 탔다. 그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보다 봄날을 더 기다렸다. 가지가 기품있게 퍼진 라일락 두 그루, 하나는 보라꽃 하나는 흰꽃 때문에 맞은 편 서울시의회가 달리 보일 정도였다. 프레스센터 라일락이 필 때면, 마을버스가 늦게 올수록 좋았다. 마을버스 한 대를 그냥 보내고 나면 적금을 탄 것처럼 뿌듯했다.

그런데 프레스센터의 라일락도 어느 해 송두리째 뿌리 뽑혀 사라져 버렸다. 정원의 구성이 달라진 것인데, 정원만 더 삭막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쁜 사람들, 이건 분명히 라일락을 도적질해 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나는 프레스센터 앞을 버리고, 궁시렁거리면서 먼 길을 돌아 출근했다.

먹는 것도 아니고 소유할 수도 없는데, 향기가 왜 좋은 것일까? 뇌 속의 어느 부분을 울리는지 알지 못해도, 향기는 나를 기쁘게 반응케 한다. 좋은 향기란, 좋은 기분을 선물 받고, 좋은 소식을 듣는 것 같다.

나는 술에서도 향기를 찾는다. 향수를 만드는 조향사를 만나, 우리 몸에 바르는 가장 응축된 액체가 향수라면, 우리 몸에 들어가는 가장 응축된 액체는 술이라고 말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향기를 가장 잘 살린 술은 과실주, 와인이다. 와인은 물을 쓰지 않고 포도든 사과든 원재료만으로 빚기 때문에 과일의 향기가 응축되어 있다. 와인에서는 원료에서 올라오는 향기를 아로마(Aroma)라 하고, 발효와 숙성 과정에서 생기는 향기를 부케(Bouquet)라 하여 구분한다.

향기를 맡을 때도 술의 표면에 올라오는 향을 맡고, 잔을 흔들어 술 속에서 올라오는 향기를 맡는다. 또 술잔에 코를 대고 들숨 향을 맡고, 술을 입안에 머금고서 날숨 향을 맡는다. 이렇게 향을 즐기는 것은 와인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술을 같은 방식으로 즐길 수 있다.
 

향기 체험장을 마련해 둔 제주맥주 제조장 ⓒ 막걸리학교

 
맥주도 향기를 담기 위해서 노력한다. 맥주의 부재료인 홉은 쓴 맛을 내기도 하지만 향기에도 관여한다. 홉향을 짙게 하려고 홉을 술덧 위에 뿌리기도 한다. 맥아를 굽고 볶아서 맥주에 커피향이나 초콜릿향을 담아내기도 한다.

향기를 잘 붙잡고 있는 술은 아무래도 도수가 높은 소주다. 위스키는 오크향으로 자신의 향을 대신하고 있다. 좋은 위스키는 좋은 오크나무가 만들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중국 마오타이주는 잔을 다 비우고 나도 다음날까지 잔에 향이 남아 있을 정도로 향이 강렬하다고 홍보한다. 명성을 얻은 증류주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향기로 존재감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우리 술에서는 어떤 향기가 나는가? 막걸리에 향기를 담기는 쉽지 않다. 막걸리가 익어갈 때에 발효실은 향기가 좋다. 쌀과 물을 같은 양으로 빚거나, 물을 더 적게 넣고 빚을수록 바닐라향과 아세톤향이 발효실에 가득 차서 넋을 놓을 정도다. 하지만 막걸리는 완제품을 만들 때에 물을 희석하여 알코올 도수를 6%로 낮추기 때문에 향기가 옅어지고, 잠잠해진다.
 

향과 맛은 비교해야 더 도드라진다. ⓒ 막걸리학교

 
곡물향, 누룩향이 강한 막걸리가 있는가 하면, 부재료가 들어가 향을 얻은 막걸리도 있다. 신평양조장의 '백련막걸리'에서 올라오는 연잎의 풀향을 맡거나, 남원 운봉주조의 '허브막걸리'에서 허브향을 맡는다면 대단한 후각을 지닌 사람이다.

개성이 강한 향을 지닌 막걸리로 부산 '금정산성막걸리'와 홍천 예술의 '만강에비친달'을 꼽아줄 수 있다. 이 두 술은 곰곰한 누룩향이 강렬하다. 누룩향, 누룩내 그 어느 쪽이든 무겁게 가라앉기에 개성은 있지만 향기롭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국 약주에서도 향기로운 술을 찾기가 어렵다. 약주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약주는 몸에 좋은 약재들이 들어가서 기능성을 높였지, 향기를 좇지는 않았다. "우리는 실리를 중요하게 여겨, 허례나 겉치레 같은 향기를 술에서 탐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소주는 어떤가? 도수가 높은 소주에 향기를 담기 좋은데, 향기를 즐길 만한 소주를 찾기 어렵다. 가장 대중적인 소주, '참이슬'이나 '처음처럼'에서 향기를 즐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정에 물을 희석하여 만든 이들 소주에는 곡물 재료의 향기가 담겨있지 않다. 그저 숙취가 적은 것에 만족하여, 알코올향만을 느끼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 예전에는 깡소주를 입안에 털어넣고 돌아서기 바빴고, 지금은 푸짐한 안주로 뒷맛을 정리하여 군말이 없다.

전통 증류주인 안동소주도 향이 여리긴 마찬가지다. 안동소주는 주원료가 쌀이라서 향이 순하고 튀지 않는다. 구수한 보리소주, 쿰쿰한 고구마소주, 꼬리꼬리한 고량주 향에 견주면, 투명하게 순하다. 무색 무미 무취하다는 보드카에 가깝다.

우리 전통 증류주에서 향기가 돋보이는 술로 이강주를 꼽을 수 있다. 이강주는 쌀과 보리를 주재료로, 누룩을 발효제로, 배, 생강, 계피, 울금, 꿀을 부재료로 삼아 빚는다. 이강주의 향기를 활달하게 만드는 것은 생강과 계피다.

생강은 확 트인 맛과 향이 소주와 잘 어울린다. 계피는 수정과에도 들어가고, 때로 단팥빵의 겉면에 옅게 뿌려지기도 한다. 계피 향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진정시킨다. 이강주는 이 약재들을 잘 침출하여 균형감 있는 향과 맛에 도달해 있다.

남원에 지리산 허브밸리가 있다. 남원 운봉주조의 최봉호 대표는 허브밸리의 허브로 막걸리를 만들어 대한민국 술품평회에서 대상까지 받았다. 그는 허브막걸리를 개발하면서 로즈마리와 라벤더를 주재료의 10%도 넘게 넣어보았지만, 향기가 강하다고 기호도가 좋아지는 것이 아니더라고 했다. 시음한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향기가 난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평할 정도로 향기가 여려야 한다고 했다.

고구마소주의 향기는 고구마가 얼어서 썩을 때 나는 냄새를 닮았다. 그 향은 청국장 냄새처럼 익숙하게 될 때라야 즐길 만하게 된다. 그래도 소주는 향이 독하거나 강하더라도 생존할 수 있다. 즐기는 이가 물을 타거나 얼음을 타서 그 농도를 직접 조율할 수 있다. 이때 도수가 독할수록 향이 강할수록, 즐기는 폭이 넓어져서 좋다.

꽃은 향기로 움직여서, 다른 생명체를 움직인다. 술에 향기를 담을 수 있다면, 술이 요란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을 찾아오게 만들 수 있다. 마시지 않고도 오래 내 앞에 향기로운 술, 말하지 않고도 오래 내 앞에 향기로운 사람, 그 둘만 있어도 생은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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