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2
원고료주기
등록 2019.05.17 09:40 수정 2019.05.17 16:49
현도분주소에 끌려온 안희영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치안대원에게 맞았는지 뺨은 붉게 물들었고, 퉁퉁 부었다. "야 이 새끼야! 어깨에 멘 건 뭐야?" "기타입니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소년이 말했다. 분주소장이 기가 막히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이 자식, 내무서로 보내." 분주소장의 명령으로 분주소원과 치안대원은 안희영을 끌고 나갔다.

"야, 그 새끼 메고 있고 기타는 놓고 가게 해!" 뒷결박을 지은 채 안희영은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충북 청원군 현도면에서 청주로 가려면 청원군 남이면 소재지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면소재지인 척산을 지나가는데 남이지서가 보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 지서장으로 근무하던 아버지는 1950년 7월 12일 동료들과 함께 영동으로 후퇴했다.

다른 가족들도 피난을 가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소년 안희영(1934년생)은 가족들과 함께 가는 피난길을 마다했다. 하지만 며칠 후 경찰 가족이라고, 청주로 끌려가는 신세이다 보니, 가족들을 따라가지 않은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50리(20km)를 걸어서 청주내무서에 도착했을 때는 안희영이나 끌고 오는 이들이나 모두 파김치가 되었다.

안희영이 청주내무서(청주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을 때에는 이미 십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며칠 후 이들은 무심천(無心川)으로 끌려 나갔다. "인민의 적, 반동들을 처단하시오"라는 상급자의 명령에 내무서원들의 총에 불이 뿜어졌다. 그렇게 안희영은 청원군 남이지서장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17세의 어린 나이에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1950년 7월 중순 학살되었다.
 
"청주로 가면 다 죽어!"
 

국군 수복 후에 찍은 남이지서 단체사진. 앞줄 가운데가 안만근지서장. 1950.10.2 ⓒ 박만순


안희영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길래, 소년 안희영은 학살되었을까? 소년의 아버지 안만근은 당시 충북 청원군 남이면 지서장이었다. 그런데 그는 정말 악랄한 행동을 해 주민들의 원성을 샀던 인물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놀랍게도 남이 보도연맹원 약 70명을 살려준 의인이었다. (관련기사: 밟혀 죽고, 숨 막혀 죽고... 시신 가득했던 부역자 이송 기차)

그런데 북한군과 지방좌익은 그 선행을 알지 못한 채 지서장과 그 가족을 무조건 '반동'으로 치부해 잡아들인 것이다. 현도면 죽전리가 집인 안만근이 경찰 동료들과 후퇴하자 그의 동생을 붙잡기 위해 남이분주소장이 부하들을 현도면으로 보낸 것이다. 하지만 남이분주소원들이 도착하니 안만근의 동생은 막 피신을 한 상태였다. 그들은 빈털터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안만근 가족들을 체포하려 했지만 고등학교 1학년이던 아들 안희영 밖에 없었다. 그는 늘 기타를 어깨에 메고 다니는 멋쟁이였다. 그런데 피난을 가지 않고 있다가 역사의 희생양이 됐다.

이번 취재 과정에서 놀라운 일을 알게 됐다. 남이지서장 안만근이 남이면 보도연맹원뿐만 아니라 현도면 보도연맹원들도 살려줬다는 증언이 나왔다. 남이지서장이 현도면 보도연맹원들을 어떻게 살려줄 수 있었을까? 사연은 다음과 같다.

6.25가 나자 상부의 지시로 현도지서장 신아무개는 현도국민학교에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다. 70명의 보도연맹원 중 3명을 선별해, 홍아무개 순경에게 현도면 상삼리 고개마루(밤고개)에서 처형할 것을 지시했다. 상삼리 김기모와 우록리 김종협과 정종태가 제물(祭物)이 되었다.

신 지서장이 나머지 보도연맹원들에게 "가라"고 했지만, 그들은 집으로 가라는 얘긴 줄 모르고 청주경찰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1950년 7월 8일이었다. 그들이 남이면 소재지를 지나갈 때, 한 사람이 "지서에 들려서 지서장님한테 인사나 하고 가세"라고 했다. 일행은 이구동성으로 동의해 지서 문을 열었다.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 안만근 지서장은 이들이 청주경찰서로 간다고 하자 펄쩍 뛰었다.

"이 사람들이 미쳤나? 지금 청주로 가면 다 죽어. 얼른 도망가게."

안 지서장의 소리에 현도 보도연맹원들은 기겁을 하고 면으로 되돌아갔다.(오경세, 85세, 충북 청주시 현도면 중척리) 이렇게 해서 현도면 보도연맹원 70명 중 3명만이 죽고, 전원이 살아날 수 있었다.

기존에 청원군 현도면 보도연맹원 대부분이 학살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었다. 첫째, 신아무개 지서장이 살려주었다는 설, 둘째, 안만근 남이지서장의 귀뜸으로 살아났다는 설, 셋째, 현도면 보도연맹원 오갑진(吳甲鎭)이 소집에 응하지 말라고 했다는 설이다. 이 세 가지 설이 모두 작용할 수는 있었으나, 결정적인 것은 안만근의 역할이었다.

안승갑이 쓴 1950년 5월 23일자(양력으로는 7월 8일) 일기에 보면 "보도연맹회원 청주 들어가던 중에 남이면에서 돌아오다"라는 기록이 있다. (안용근, <낙산유고(諾山遺稿)>, 양서각) 남이면 보도연맹원 일부와 현도면 보도연맹원 절대 다수를 살려 준 안만근의 선행은 북한군 점령기에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가족이 좌우로 내몰린 시대

청원군 현도면 시목리 오국진 집에 불이 환하게 빛났다. 1950년 7월 17일 북한군 진주 며칠 전 '오국진 환영대회'가 열린 것이다. 오국진은 일제강점기에 '동경물리학교'를 나와 개성 송도고보 교사를 지냈고 해방 후에는 청주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한국전쟁 전에 월북한 그는 전쟁이 나자 '정치공작대'에 소속되어 청주를 거쳐 전주로 가게 됐다. 와중에 고향 현도에 와서 하룻밤을 자게 되니 현도면의 유지들이 금의환향을 축하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당시 오국진의 집에는 오세균이 살고 있었다.

현도면의 대표 유지인 오영길이 손을 들어 오국진에게 물었다. "우리는 집이 부유해 일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공산당이 오면 모두 죽이는 거 아닌가요?" 그러자 오국진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공산당은 모두가 골고루 잘 살자는 것이지, 부자들을 죽이거나 괴롭히지 않습니다. 걱정 마세요." 오국진은 다음 날 청주로 출발했고, 후에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다시 북으로 올라갔다.(오세균, 86세, 청주시 분평동)

오국진 동생 오갑진은 형의 월북으로 '요주의인물'로 낙인 찍혀 보도연맹에 자동으로 가입됐다. 하지만 그는 현도초등학교 교장을 하고 있어서 지역유지이기도 했다. 그는 전쟁 초기 보도연맹원 소집에 응하지 않아 죽음을 피해갈 수 있었다. 북한군이 현도면에 진주하자 오갑진은 1950년 7월 23일 현도면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된다. (안용근, <낙산유고(諾山遺稿)>, 양서각) 이후 오갑진은 청원군 인민위원회 사무장이 됐고 국군 수복 후엔 살기 위해 월북을 택한다. 가족들은 남쪽에 둔 채로 국진-갑진 형제는 북으로 갔다.

안만근 지서장과 그의 가족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오국진 형제 이야기로 샛길을 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안만근의 아들 안희찬이 후일 오갑진의 사위가 되기 때문이다. 
 
어리숙한 간첩

1968년 어느날 '부강약수터에 수상한 자가 나타났다'는 첩보가 수사기관에 입수되자, 중앙정보부와 청원군 경찰들은 난리가 났다. 청주 시내의 정보기관과 경찰기관 요원들이 청원군 부용면(현 세종시)에 있는 부강약수터로 총출동했다. 하지만 수상한 자는 검거되지 않았다. 며칠 후 문의면에 중의적삼을 입은 3명의 수상한 남성이 출현했다는 제보가 날아왔지만 검거에는 실패했다. 그런데 며칠 후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끽'하는 소리가 문의면 면소재지를 울렸다. 현도와 신탄진을 경유해 대전으로 가는 시외버스였다. 중의적삼을 입은 이들이 버스에 탔을 때는 빈 좌석이 없었다. 이윽고 버스가 출발하고, 비포장도로라 툭하면 버스가 출렁였다. 그런데 버스기사 차장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중의적삼을 입은 이 중 한 명이 버스 손잡이를 잡고 있었는데, 상의가 올라가면서 허리에 찬 실탄이 보인 것이다. 당시 민간인이 실탄을 소유했다면 백퍼센트 간첩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차장은 큰 소리를 칠 수도 없었다. 버스가 현도를 지나 신탄진 시장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는 황급히 차에서 내려 정류장 맞은편에 있는 신탄진지서로 가 간첩을 신고했다. 즉시 출동한 신탄진지서 경찰은 쉽게 간첩 3명을 생포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어리숙한 간첩이 검거되는 순간이었다.

검거된 간첩 중에는 현도면 죽전리의 박노택이 있었다. 그는 남파되어 자신의 가족들을 만나 도움을 청하고, 두 번째 접선 대상을 만났다. 오국진의 아들 오헌영이 그다. 박노택은 오헌영을 만나 부친의 사진과 편지, 공작금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오헌영이 완강히 거부해 접선은 실패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노택 일행은 검거됐다.

이후 오헌영은 국군보안사령부에 연행되었지만 무혐의 처리되었다. 석방 이후에도 오국진-오갑진 형제의 자녀들은 수사기관의 요시찰대상이 되었다. 분단과 전쟁은 한 가족을 이산(離散)시키고, 건널 수 없는 좌·우 대립의 강으로 내몰았다.

이 사건이 발생한 1968년에서 일년 후인 1969년 안만근 지서장의 아들 안희찬이 오갑진의 딸과 결혼을 한다. "왜 그런 집 딸과 결혼하느냐"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희찬의 생각은 확고했다. 아버지의 사상이 딸과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안희찬, 75세, 대전광역시 대덕구 석봉동)
 
남과 북의 국가폭력
 

안만근 지서장의 아들 안희찬 ⓒ 박만순

 
안만근 지서장의 선행은 오랫동안 역사에 묻혀왔다. 아니 2019년 현재까지 어느 공적인 기록에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노무현 대통령 때 만들어진 '진실화해위원회'는 한시적인 국가기구에 불과했다. 만 5년간의 조사를 통해 '보도연맹사건'을 포함한 민간인학살사건을 규명하고, 피해자 일부를 확인했다. 안만근 지서장 같은 의인들의 선행을 공론화하는 작업까지는 역부족이었다.

남과 북 모두 국가폭력에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만근 지서장의 아들이 인민군과 지역 좌익에 희생된 것만 해도 그렇다. 안만근의 선행에 북한군은 관심이 없었고,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 경찰'로 낙인을 찍었다. 안만근은 보도연맹원을 살려줬다는 이유로 상급기관의 조사를 받고, 경찰에서 1952년에 불명예 퇴직을 당했다.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좋은 사람'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지역네트워크부에서 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