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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4.17 09:15 수정 2019.04.17 09:15

강요배 화백이 그린 <천명>(1991). 토벌대의 방화로 불타는 마을을 담았다. ⓒ 박만순


마을에 '뚜두두'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들은 이상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방문을 열고 고샅길로 나왔다. 잠시 후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고서야 그 소리가 말발굽 소리인 줄 알았다. 말들은 동네 골목을 다니며 시뻘건 불을 토해냈다. 그런데 불을 토해 낸 것은 말이 아니라 경찰들이 던진 솜방망이였다. 즉, 새벽에 기마경찰들이 제주읍 노형리에 나타나 다짜고짜 민가에 불을 지른 것이다. 마을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열 살 소년 송병기는 콜록거리며 골목길을 무작정 뛰었다.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소년의 집은 목수인 아버지가 직접 지은 집으로 마을에서는 튼튼하고 좋은 축에 속했다. 하지만 초가집이 불방망이를 당해낼 수는 없는 법. 집 처마에 불이 붙고 연기가 집안을 휘감는 것을 보고 뛰어나온 소년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었다.

소년이 마을의 불구덩이에서 벗어나 소와 말을 방목하는 야산으로 접어들었을 때 놀라운 상황이 연출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재산 목록 1호인 말과 소들이 하늘을 향해 양발을 들고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는데, 잠시 후에 자세히 보니 가축들의 옆구리에서 붉은 선지피가 '쿨럭'이며 쏟아지고 있는 게 아닌가. 기마경찰은 가축들에게도 사정없이 총질을 해댔다.

초가집에서 연기가 잠잠해질 때쯤 소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마을로 향했다. 마을 한길에 접어드니 길 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구멍 안에는 쇳조각이 있는 듯했다. 기관총 파편이었다. 경찰과 군인들은 마을에 불만 지른 것이 아니라 마을 한가운데 기관총을 설치하고 무차별을 사격을 가한 것이다. 또 기마경찰들은 도망가는 주민들뿐만 아니라 총소리에 놀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가축에게도 총질을 했다.
 
경찰들의 만행

경찰의 만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 년 농사지은 농작물을 훼손했다. 마을사람 대부분은 제주도의 주농작물인 고구마를 수확한 후 땅속에 저장했다. 육지 사람들이 초겨울에 김장을 해 땅 속에 묻듯이 말이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경찰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고구마를 저장해 놓은 가마와 억새를 대검으로 '푹푹' 찔러댔다. 

그렇게 대검을 찔러대니 고구마는 상할 수밖에 없고, 위의 것이 상하면 아래 고구마도 연이어서 상하게 됐다. 경찰과 군인들은 '빨갱이'들이 숨어 있는지 확인하는 거라고 했지만, 젊은이들은 이미 토벌대를 피해 한라산에 올라간 뒤였다. 결국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주민들의 먹을거리를 전부 훼손한 격이었다. 1948년 11월 초의 일이었다.

한 달 후인 1948년 12월 11일 토벌대가 마을에 다시 들이닥쳤다. 한 달 전의 방화로 마을 50~60호중 10가구를 빼고 모두 불타 버렸지만, 갈 곳 없는 이들은 타지 않은 집에 삼삼오오 모여 살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나마 남아있는 10가구에 불을 다시 질렀다. 그리고 주민들을 마을 한가운데로 모이게 했다. 입산자 가족 2명을 뽑은 후 데리고 가더니 잠시 후 '탕탕' 소리가 났다. 즉결 처형이었다.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와." "송달현, 강○○...." 4명을 불러냈다. "이놈의 새끼들, 네 자식들이 한라산에서 폭도로 활동하고 있는데도 신고를 하지 않아?" 하며 군 책임자는 호통을 쳤다. 아버지뻘 되는 이에게도 무조건 반말부터 했다. 호명되어 나간 이들은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무조건 두 손 모아 빌기만 했다.

군인들은 사람들의 팔을 뒤로 묶었다. 잠시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군 책임자가 씨익 웃으며 라이터를 꺼내 묶여 있는 이들의 턱수염에 불을 붙이는 것이 아닌가. '으악' 하는 소리가 났지만 누구도 어찌하지 못했다. 수염에 불이 붙은 당사자들도 손이 묶여 있어, 어찌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악' 소리와 함께 제자리에서 뜀박질을 했지만, 수염이 타버린 자리에 화상만 남았다. "앞으로 갓!" 이들 4명은 주민들 앞에서 그렇게 모욕 당하고도 군인들에게 끌려가 학살을 당했다. 송달현, 강태수의 부, 김학성의 부, 김학성의 숙부가 그들이다.
 
그들이 한라산으로 올라간 이유
 

도노미당서인옥과 오라리 주민들이 피신했던 굴, 도노미당 ⓒ 박만순

 
집안 삼촌인 송달현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망신을 당한 후 학살당한 것을 지켜본 송병기는 어머니와 함께 고난의 피난길을 시작했다. 제주읍 이호리의 집안 이모에게 찾아갔으나 문전박대 당했다. 괜히 사람을 들였다가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까 주저한 것이다. 한편으로 이해는 갔지만 서운한 마음이 앞섰다. 외가가 있는 연동리 섯동네로 갔으나, 그 곳도 토벌대에 의해 한 집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시 고모가 살고 있던 연동리 베두리 마을로 갔으나 며칠 후 그곳도 여지없이 불타버렸다. 할 수 없이 원래 집인 노형리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 송도윤(1916년생)이 집 근처에 땅굴을 파고 숨어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가족들은 반가움을 표하기도 전에 피난 짐을 싸야 했다. 언제 토벌대가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고달픈 한라산 생활의 시작이었다. 송도윤은 특별히 좌익활동을 하거나 무장봉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토벌대의 무차별 학살을 피해서, 살기 위해 한라산에 올라갔다.
 
많은 이들이 송도운 같은 상황에 처했는데, 제주읍 오라리 서인옥(1922년생)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집은 오라리에서 제일 큰 집이어서 집 창고에 마을 사물놀이 악기(樂器)들을 보관해 놓았었다. 그런데 토벌대가 마을을 방화하면서 서인옥의 집도 불타버렸고 악기들이 불에 타 버렸다.

'투둥 퉁' 북이 타면서 가죽이 찢어지는 소리가 마을을 휘감았다. 그 소리는 모를 심거나 수확기에 농군들이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신명나게 두드리는 북소리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뭇 생명들이 죽어가는 조종(弔鐘) 소리였다. 집이 불타버려 살 곳이 없던 오라리 사람들은 한라산 초입의 굴인 '도노미당'으로 피신했다. 이후에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산내에서 학살당한 서인옥도 이곳으로 피신했다.
 
한라산에서 출산, 누구도 축하할 수 없었다

"아가 얼른 서둘러라." 며느리 김연옥(1919년생)은 시어머니 몰래 입을 삐죽 내밀었다. 곧이어 시어머니의 지청구가 들렸다. "빨리 서두르라니까 뭐해!" 며느리는 눈물이 쏙 나왔다. 넷째를 임신해 출산을 불과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산 생활을 한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어머니가 임산부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식과 가족의 안위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김연옥은 남산만한 배를 하고 뒤뚱거리며 한라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949년 1월 한라산은 눈이 쌓인 설산(雪山)이었다.

토벌대의 추격을 피해 임산부 김연옥은 힘들게 '아흔아홉골'까지 올라갔다. 먹을 것은 없고, 한겨울 추위에 몸은 자동적으로 덜덜 떨렸다. 거기에 토벌대가 언제 올지 몰라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런 마당에 설은 다가왔다. "조상님들 뵐 면목이 없구만." "글쎄 말이야, 모래가 설인데 차례도 지낼 수 없구...." 노인들의 대화였는데, 어느 누구도 대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민족 명절 설인 1949년 1월 29일은 쓸쓸하게 지나갔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2월 초 산 속에서 힘찬 아기 울음소리가 났다. "으앙!" 김연옥이 아기를 낳은 것이다. 당연히 축하해야 할 아기의 출산이었지만 누구도 축하의 말을 하지 못했다. 아기가 온전히 살아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사실 어른도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는데, 갓난아기가 이 추운 겨울에 한라산에서 온전히 생존할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주변의 아낙들은 "쯔쯧" 하거나 눈가의 눈물을 찍어 냈다. 

산모인 김연옥의 마음은 어땠을까? 모유도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산속에서 먹는 게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김연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우는 것밖에 없었다. "토벌대닷!" 하는 소리에 사람들이 부리나케 움직였다. 김연옥도 아기를 업고 무작정 뛰었다. 몇 시간을 뛰었는지도 모른다. 어둠이 한라산을 모두 삼켰을 때야 다리쉼을 할 수 있었다. 한 겨울인데도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옷은 땀에 젖고, 눈에 미끄러져 또 젖었다. 그런 상황에서 밤은 지옥이었다. 기온이 급격하게 내려가면서 옷이 얼기 시작했다.

바위틈에서 며칠을 지내다가 토벌대의 추격을 피해 또다시 피난길이 시작되었다. 짐이랄 것도 없는 짐을 푼 곳은 '큰도리'였다. 몸을 꼼짝할 수도 없었다. 몇 시간이나 누워 있었을까, 또다시 토벌대가 들이닥쳤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자와 추격자의 씨름이 한창 진행되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겨울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겨울비인데도 불구하고 보슬비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 김연옥의 갓난아기는 구상나무 아래에서 숨이 멎었다. 겨울비에 얼어 죽은 것이다. 생후 1개월도 안 되어 세상과 작별을 했다.
 
여지없이 봄이 왔지만

한라산에도 여지없이 봄이 왔다. 하지만 봄은 따스한 희망의 봄이 아니었다. 김연옥의 남편 송도윤이 토벌대에 의해 검거되었고, 그녀 역시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김연옥은 제주읍 애월리 곽금초등학교에서 주먹밥을 먹고, 이송되어 주정공장에 구금되었다.

주정공장에 구금된 지 11일 만에 석방되어 나왔는데 배추꽃이 활짝 피었다. 1949년 4월이었다. 노형리 주민들이 마을에 성을 쌓아 재건부락을 만들었다. 그해 여름 남편 송도윤이 육지형무소로 간다는 소문이 들렸다. 제주항으로 갔지만 배에 실리는 이들 중에서 남편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편을 배웅하지도 못한 서운한 마음속에 살다가 그녀에게 또 다른 불행이 닥쳤다. 셋째 송애화가 영양실조에 걸려 죽은 것이다. 송애화는 당시 6세였다. 한라산에서 갓난아기를 얼음산에 묻은 지 6개월도 채 안되어 또 하나의 생명을 땅 속에 묻어야 하는 기구한 삶이었다.

안 좋은 일은 연이어서 생기는 것인가? 대전형무소로 간 송도윤이 1950년 봄에 "잘 있다"는 엽서를 보냈지만, 한국전쟁 직후인 그해 7월에 산내에서 학살되었다.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던 가족들은 일상생활을 했다. 장남 송병기는 초등학교 입학 시기를 훌쩍 뛰어넘은 12세에 도두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했다. 송병기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54년에 재건부락 생활을 정리하고 원 고향인 제주읍 노형리로 갔다. 어머니 김연옥이 산에서 나무를 해 와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그때부터 김연옥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김연옥은 앓는 과정에서도 점집을 전전했다. 남편이 살았는지 물어보기 위해서다. 그런데 결과가 점집마다 달랐다. 남편의 생사도 모르고, 자식 둘을 가슴에 묻은 그녀는 결국 1964년에 세상을 하직했다.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
 

이원술국방경비대 탈영 후 검거되어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된 이원술 초상화 ⓒ 박만순

 
김연옥이 점집을 전전할 때 제주읍 오라리 이기석은 밤마다 술을 마시며 자신의 가슴을 쳤다. "아이고 나 때문에 자식이 죽었어."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 하면서 울부짖었다. 제주북국민학교를 나온 후 서귀농림중학교 1학년을 다니다 학교를 작파한 이원술(1926년생)은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모슬포에서 군 생활을 했다. 그런데 그는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탈영했다.

도피생활을 하다가 자수했지만, 대전형무소로 이송되어 한국전쟁 당시에 대전 산내에서 학살되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이원술의 아버지 이기석이 1950년 1월 대전형무소로 면회를 갔는데, "돈만 가져오면 석방시켜 준다"는 말을 들었다.

이기석은 봄 농사를 마무리 짓고 그해 여름에 돈을 장만해 아들을 석방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러기 전에 6.25가 났다. 이기석은 자신이 돈을 빨리 장만해 대전으로 갔다면 자식을 살릴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죽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게 어디 이기석의 책임인가. 하지만 그는 술로 세월을 보내며 자신을 탓하고, 자식 제사를 지내었다.
 
"살암시민 사라진다"라는 제주 말이 있다. '살다보면 살게 된다'라는 말이다. 4.3 사건을 겪은 제주도 사람들의 힘겨운 삶을 반영한 말이다. 막내 동생을 한라산에 묻은 송병기 역시 그런 삶을 살았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가세는 더욱 더 기울었고, 급기야 송병기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어업조합연합회' 급사로 취직했다. 하지만 이 일로 생계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이후 농사일을 하다가 목수로 전직했다. 아버지가 하던 일이다.
  

송병기자신이 지은 집 앞에 선 송병기 ⓒ 박만순

 
4.3을 겪은 이 중 고통스런 삶을 산 게 어디 송병기뿐이겠는가? 제주도민 전체가 고통 속에 살아온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제주시 오라2동에 살고 있는 김익중(1943년생)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 김용진이 4.3때 대전형무소로 이송되어 산내에서 학살된 후 그의 삶도 고행(苦行) 그 자체였다. 당시에 김익중은 아버지만 잃은 것이 아니라 외할머니와 외숙모, 그리고 외사촌이 서귀포에 있던 알뜨르비행장에서 학살당했다.

어머니, 누나와 힘겨운 생활을 하게 된 김익중은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생활을 했다. 그는 제일중학교와 제주상고를 다닐 때 매일 하루에 두 번씩 한라산을 올라갔다. 나무를 하기 위해서다. 물론 방학 때면 매일 올라갔다. 나무를 지게에 지고 읍내 가가호호를 방문했다. "나무 사세요!" 오일장에 팔수도 있었지만 집집마다 다니며 파는 것이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수 있기에 그렇게 했다. 부끄러움은 사치였다. 그는 다행히 연좌제를 비껴갈 수 있었고, 고등학교 졸업 후 공직에 몸을 담았다. 1998년 제주시 연동 동장을 마지막으로 공직생활을 마쳤다.
 
제주 4.3 사건으로 약 3만여 명의 제주도민이 국가폭력으로 학살되었다. 피해자 중 일부는 육지형무소로 분산 수감되었고, 한국전쟁 초기에 대부분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그런데 육지형무소로 간 이들은 반백 년 넘게까지 '행방불명자'로 불리었다. 어디로 간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1999년 추미애 국회의원이 제주도 주정공장에서 육지 형무소로 이송된 명단을 밝혀내면서, 피해자들의 최후를 확인할 수 있었다.
 
4.3사건 희생자 중 육지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학살된 이들을 기억하는 것은 역사를 기억하는 일이리라.
덧붙이는 글 제주 4.3 사건 연재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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