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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4.14 11:29 수정 2019.04.14 11:29
'버선발'은 고통받는 노동자 민중의 곁을 지키고, 한평생 평화와 통일의 길을 걸어온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소장이 자신의 삶과 철학, 민중예술과 사상의 실체를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낸 책 <버선발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버선발'은 '맨발, 벗은 발'이라는 의미인데요, 백 선생님 책 출간에 부쳐 사회 각계에서 '버선발'을 자처하는 이들의 글을 '우리가 버선발이다'라는 이름으로 묶어 차례로 싣습니다. 이번 글은 인권재단 사람 박래군 소장이 보내왔습니다.[편집자말]
백기완 선생님의 민중서사 <버선발 이야기>를 읽고 독후감을 쓰겠다고 약속했는데, 책이 나오고도 손을 못 대고 있었다. 두려움이 있어서다. 국문과 나온 놈이 우리말로 글을 못 쓰고 한자어로 글을 쓴다고 혼날 게 두려웠고, 너무 큰 이야기에 주눅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더는 미룰 수 없으니 욕먹을 셈치고 글을 쓰기로 했다.

백기완 선생님을 만난 지는 30년이 넘었다. 전부터 그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사자후를 토하던 연설을 왜 기억 못하겠는가. 갈기 머리 휘날리며, 가슴 후련하게 내리치는 그 사자후의 연설들은 당대에 유명했다. 그렇지만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이었다. 그러다가 동생이 죽은 뒤 백기완 선생님이 장례위원장을 맡은 이후부터 좀 가까워졌다. (박래군 소장의 동생 박래전 열사는 1988년 6월 4일, 숭실대학교에 다니던 중 '광주 학살원흉의 처단'을 외치며 분신, 6월 6일 사망했다. - 편집자말)

십수 년 위의 선배인 문익환 목사님과 계훈제 선생님과 함께 '문계백'을 형성했던 진보운동의 지도자이셨으니 유가협 활동을 하면서는 종종 뵐 수 있었다. 연단 위에서는 사자후를 토하던 무서운 사람이 개인적으로 만나서는 다정다감한 면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알아가던 때였다.

"그래서 이기겠어? 기죽지 말고 제대로 싸우자고"

그러다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이른바 원로 분들이 권력의 부름을 받아서 이런저런 자리를 마다하지 않을 때 백 선생님은 홀로 현장을 지키셨다. 1970년대부터의 원로 분들 중에 백기완 선생님과 문정현 신부님, 이 두 분은 여전히 현장은 지키셨던 것 같다. 정권을 가진 쪽에서도 불편한 분이었을 것이다. 원로 선생님으로 존경은 하겠지만, 가까이 하기엔 너무 어려운 분이었을 것이다. 거침없이 잘못을 지적해 들어오는 그 앞에서 맘 편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그러다가 이명박 정권 이후부터 이런저런 일로 나는 선생님께 많은 부탁을 드려야 했다. 남아 있는 어른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용산참사 때(또 선생님께 혼날 거다. "야 인마, 용산학살이지, 왜 참사야" 하실 거니깐) 거리에서 허가받지 않은 추모대회를 할 때도 부탁을 드렸고, 쌍용자동차며, 세월호참사며, 어려운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힘주는 말씀이 필요할 때마다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다. 그만큼 운동은 어려웠고, 사람들이 주눅 들어 있을 때마다 "그래서 이기겠어? 기죽지 말고 제대로 싸우자고!" 그러실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선생님도 세월은 비껴가지 못하셨다. 독재 시절 모진 고문에 다친 몸으로 세월을 견뎌오셨으니 현장에 나오는 일이 힘드실 만도 했다. 날이 갈수록 당찬 운동가에서 겨우 운신이나 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자꾸 보게 되었다.
 

"국민의 명령이다. 박근혜는 퇴진하라"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과 시민들이 2016년 11월 19일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광화문에서, 전국으로! 박근혜는 즉각 퇴진하라 전국동시다발 4차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에 참석해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사건을 규탄하며 박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날이 갈수록 기력이 쇠해지는 게 역력했는데, 그런 몸으로 촛불집회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나오시는 것만으로 감탄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전날부터 물도 삼가면서 촛불집회에 나오시려던 눈물겨운 사연이 있었음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지난해 2월인가 파인텍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기자회견을 목동 CBS 앞에서 할 때는 골목을 몰아온 센 바람에 휘청하셨다. 가슴을 치며 숨이 차고 고통을 호소하셔서 회견 중간에 나오시기도 했다. 그때도 선생님을 이제 현장에 나오시게 하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부터는 이런 궂은 자리엔 모시지 말고, 일이 있어도 알리지 말아야지 했다.

작년 이맘때 덜컥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선생님이 그예 세상을 떠나시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행히 수술 잘 마치고 회복도 하셔서 조금씩 움직이시는데 자꾸만 거리의 싸움 현장에 또다시 모시게 된다. 그만큼 우리는 백기완 선생님께 아직도 많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꼬마 시절에 들었다는 <버선발 이야기>를 팔십 평생 가슴에 담아 두었다가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쓰기 시작하셨다고 하니 선생님이 이 이야기를 얼마나 들려주고 싶어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니 그만큼 이 이야기가 무겁게 다가온다. 아니나 다를까. 이 이야기는 선생님이 해오셨던 말씀이 집약되어 있는 '백기완의 혁명론'이다.

백기완의 혁명론 <버선발 이야기>
 

<버선발 이야기> 백기완 지음. ⓒ 오마이북

 
'버선발'은 머슴의 아이다. 이 책에 나오는 머슴은 내가 아는 머슴과는 조금 달랐다. 아마도 근대 이전의 노비를 말하는 것 같다. 평생을 주인을 위해서 뼈 빠지게 노동을 해야 하는 존재. 가족의 결합과 이별도 주인 맘대로인 세상에서 머슴은 무권리의 존재일 뿐이다.

그러니 목숨을 살리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그런 주인 밑에서 머슴은 산목숨이 아니었다. 그때 버선발의 어머니는 순순히 당하지만은 않는다. 버선발은 어머니를 빼앗기고 세상을 저주하는 마음에 바위를 짓이기는 힘을 기른다. 그런 그도 주인 놈들의 마수에 걸려서 죽음의 노동을 견뎌냈다.

드디어 그가 자신의 힘을 가졌을 때, 바다를 없애 땅을 만들어 나누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땅이 없어서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을 보아온 터, 하지만 그렇게 만든 땅에 차지하고 군림하는 자들을 본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깨닫지 못하고 괴로워할 때 이런 말을 듣는다.
 
"거 내 거라는 거, 그거 말인가. 그 내 거라는 걸 똘똘히 꼬집으면 말일세. 그게 바로 거짓이라는 것이라네. 모든 거짓의 뿌리요, 모든 거짓의 알짜(실체)지." (<버선발 이야기> 188쪽)

'내 거'는 썩물(부패)이고 막심(폭력)이다. 내 거에 기반한 틀거리(체제)와 쥘락(권력)을 짓부수지 않고는 이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내 거를 거부하고 노나메기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 노나메기는 이제 사람들끼리만 노나메기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몹쓸 된깔일랑은 그대로 찢어 팡개치고는 참목숨, 다시 말하면 목숨 아닌 댄목숨(반생명)과 싸워 틔운 참목숨인 살티를 살려내야 합니다. 그게 무엇이겠어요. 그게 무엇이겠느냐구요. 그게 바로 노나메기입니다." (<버선발 이야기> 269쪽)

굳이 여기서는 책의 줄거리를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게 책에 나오는 버선발은 유가족처럼 보인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울고만 있는 유가족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일어서는, 그래서 노나메기의 삶을 위해 연대해가는 유가족 말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유가족들에게 빚지고 사는 것일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이 한 발 내디디는 만큼 세상은 변화해왔다. 유가협의 어머님, 아버님들의 한 발이 그랬고, 세월호와 김용균 어머니의 한 발이 그랬다. 모질고 모진 세상에서, 내 거를 추구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거를 잃고 노나메기의 삶에 나선 유가족들이 있어서 이 세상은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리 놓고 보면 내 거만 추구하도록 부추기는(그걸 유행하는 말로 각자도생이라고 하는 게 아닐까) 세상을 거부해온 모든 이들이 버선발인 것 같다. 동료의 죽음을 두고 울고만 있는 사람들, 동료를 묻고 뿔뿔이 흩어지는 게 아니라 동료의 죽음을 지키고 끝내 동료의 염원을 실현하려는 사람들, 끔찍한 막심을 겪으면서도 그리고 온갖 모독을 견디면서도 버티어내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노나메기 세상으로 가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연대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러니 백기완의 혁명론은 뜨겁다. 그 연세에 그토록 뜨거운 혁명론을 간직하고 있다는 건 부러운 일이다. 내 거의 세상에서 노나메기의 세상으로 한 발 나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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