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0
원고료주기
등록 2019.04.11 10:24 수정 2019.04.11 13:34
조선후기 화단을 이끌었던 주역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문하에는 양반에서 중인, 평민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의 제자들이 드나들었다. 이들은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일에 종사하였다. 양반 제자들은 주로 관직에 있었고, 중인 제자들은 실용적인 직업에 종사하였다. 중인 계급이었던 화원 제자들은 도화서에서 궁중이나 양반가의 주문에 맞추어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였다.

김정희의 제자 중 중인화가 일부는 서화를 즐기는 일뿐 아니라 서화의 유통에도 관계하였다. 특히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이나 석경(石經) 이기복(李基福, 1783-1863), 그리고 고람(古藍) 전기(田琦, 1825-1854) 등은 고서화 감식에 뛰어나 서화의 유통에 많이 관여하였다.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8-1892)도 중인계급은 아니었지만 스승인 김정희의 글씨를 주문받아 거간 역할을 하였으며, 말년에는 스승의 글씨와 그림을 판각하여 매매하기도 하였다.
           

장승업 ‘영모도’ 8폭. ⓒ 황정수

 
조선시대에 미술품이 상품으로 유통된 것은 조선후기 상업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걸쳐 한양은 상업의 발달로 거대한 상업도시로 변모해갔다. 한양의 한복판인 '광통교(廣通橋)' 일대는 18세기 후반부터 그림을 사고파는 시장이 생겨 많은 서화 판매점들이 생겼다.

그동안 왕실과 사대부로 대표되는 상류층 미술문화가 확장되면서 민간에 새로운 미술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전기나 허련 등이 개인적으로 서화 매매에 관여한 거간 같은 존재였다면, 서화 판매점들은 현대의 화랑과 같은 전문 서화 판매점이었다.

광통교는 종로에서 청계천 초입에 놓여있던 다리이다. 당시 광통교 주변에는 일상 생활용품을 파는 가게들이 있었는데, 그 속에 서화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당시에 어떠한 작품을 팔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상당히 많은 종류의 서화를 팔았다고 한다.

상업에 종사하여 거부가 된 중인 부자들이 이곳에서 미술품을 수집하였다는 것을 보면 꽤나 다양한 서화를 판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인 부자들의 비호를 받던 천재화가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도 광통교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다녔다는 것을 보면 광통교의 위세를 알 만하다.

서화 시장의 주요 품목
 

작자 미상 ‘곽분양행락도’ ⓒ 삼성미술관 리움

 
1800년대 중반 한양의 풍물을 보여주는 유명한 가사 중에 '한양가'가 있다. '한양가'는 조선 왕도인 한양의 연혁·풍속·문물·제도 및 왕실에서 능으로 나들이하는 광경 등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는 당시 광통교 서화 가게에서 파는 작품들을 나열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런데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통교 아래 가게에 가지각색 그림이 걸렸구나. 보기 좋은 병풍으로는 '백동자도', '요지연도'와 '곽분양행락도'가 있고, 강남 금릉의 '경직도'와 한가한 '소상팔경도'의 산수화도 기이하도다. 다락 벽에 붙이는 것으로는 '닭, 개, 사자, 호랑이(鷄犬獅虎)' 장지문에는 '뛰는 물고기와 하늘로 오르는 용(魚躍龍門)', '바다 풍경에 학과 복숭아 (海鶴蟠桃)'와 '십장생'이며, 벽장문에는 '매란국죽(梅蘭菊竹)'이 있도다.

횡축을 보자면 '구운몽'의 성진이가 팔선녀 희롱하며 꽃을 던져 구슬을 만드는 모습도 있고, 주나라 '강태공'이 팔십 노옹으로 사립을 숙여 쓰고 곧은 낚시를 물에 넣고 때 물고기 오기만 기다릴 때 착한 임금 주문왕이 어진 사람 얻으려고 손수 와서 보는 장면도 있네. 한나라 '상산사호(商山四皓)'는 갈건야복을 입은 도인들 같은데, 네 늙은이 바둑 둘 때 세상과 백성이 편안하도다.

남양의 제갈공명은 잠에 겨워 초당에서 '형익도(荊益圖)' 걸어놓고 평생을 자족하니, 한나라 유비가 찾아와 '삼고초려'하는 그림으로 남았네. 진나라 '도연명'은 쌀 다섯 말을 마다하여 팽택령을 그만 두고 '소나무를 만지며 서성(撫孤松而盤桓)'이는 그림으로 남아 있네. 당나라 이태백은 홍등가 술집에서 취하여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을 것이네(天子呼來不上船)'하는 모습으로 그렸으며, '문에 부칠 신장(神將)' 그림은 신장에 모자를 씌워 진채(眞彩)로 가득 메워 그렸으니 화려하기 헤아릴 수 없네."(필자 현대어로 윤문)

이상을 보면 당시 광통교 아래 쪽에 그림을 파는 가게들이 있었는데, 그 곳에는 다양한 그림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가게에서 파는 그림은 유명한 화가들이 작업한 정통서화가 아니라 작자 미상의 민간 화가들이 그린 민화 계열의 작품이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근대적 의미의 작가나 작가와 수요자를 중개하는 화상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거래하는 작품의 대부분이 장식과 길상을 기원하는 기복화가 중심을 이루었다.

여전히 유명한 화가가 그린 작품들은 궁중이나 권세 있는 양반들의 향유물이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현상이 점차 약화되어 광통교에도 화원들의 작품이 걸리고, 또 이런 작품을 보고 공부한 민간 화가들의 역량이 발전하며 광통교에서 파는 서화 수준도 높아져 갔다.

도화서와 화원들의 역할
    

경복궁 근정전 ‘일월오봉도’. ⓒ 황정수

  
광통교에 서화 가게가 생기게 된 것은 그 근처에 있던 '도화서(圖畵署)'의 존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도화서는 조선시대에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청이었다. 본래는 17세기 중반까지 한성부 중부 견평방, 곧 지금의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앞에 있었으나, 18세기 후반 남부 태평방 즉 지금의 을지로 자리로 옮겨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계속 있었다. 이곳에 속해 있는 화가들을 '화원(畵員)'이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화원들이 그린 그림의 품목은 왕이 감상하는 '감계화(鑑戒畵)',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국가나 왕실의 행사 때 제작하는 각종 '기록화', '의궤'나 '반차도(班次圖)', 왕실의 주문에 의한 그림, 궁궐의 내부 공간을 장식한 그림 등이었다. 주로 화려한 채색을 사용하였으며, 오랜 기간의 수련이 필요한 치밀하고 섬세한 묘사가 요구되는 그림들이었다.

이 밖에도 의학·건축·지리·천문 등 실용에 관련되는 서적과 삼강오륜의 실례를 담은 도설·삽화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심지어는 도자기 제작소에 파견되어 각종 도자기에도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수장되어 있는 중국의 그림을 모사하고, 같은 그림을 수없이 베껴내는 일도 하였다. 또한 동지사 사신을 따라 중국에 들어가기 위해 선발된 화가는 중국에서 좋은 서화를 보고, 또 우리의 그림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다른 한 쪽으로는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가서 활동한 화원들은 일본 회화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서화골동의 산실 인사동
 

서울 종로구 인사동 거리. 서화 가게가 자리 잡히자 작품을 단장하는 표구사도 따라 들어오게 되었다. ⓒ 연합뉴스

 
광통교는 도성에서 축조된 다리 중 가장 큰 돌다리이다. 당시 한양은 조선의 수도일 뿐만 아니라 각종 물산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 중심이 '운종가(雲從街)' 곧 지금의 종로로 대표적인 상가 지역이었다. 사실 운종가란 이름도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운종가는 지금의 광화문 우체국 동쪽으로부터 종로 3가까지였으나, 점차 규모를 확장하면서 지금의 안국동까지 확대되었다.

광통교는 넓다는 의미로 '광교(廣橋)'라 부르기도 했고, 도성 내 6번째 다리라고 하여 '육교(六橋)'라고도 불렀다. 광통교 위쪽으로는 무명을 파는 '백목전', 종이를 취급하는 '지전', 면화를 파는 '면자전', 잡화점인 '동상전', 무시나 베를 파는 '포전', 마구를 파는 '마상전'이 늘어서 있었다.

아래쪽에는 칠기를 파는 '칠목기전', 가발 등을 파는 '월외전' 등이 있었다. 이렇듯 번화한 사이에 자리 잡은 도화서는 혜민서, 장악원 등과 함께 광통교의 번성을 주도하였다. 광통교 북쪽으로는 시전 상인이 살았고, 남쪽으로는 화원이나 의원 그리고 역관 등 기술직 중인들이 모여 살았다.

도화서 화원들이 궁궐 외에 주문을 맡은 양반 고객들은 대부분 고위 관직에 있거나 왕실과 관련 있는 특별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북촌(北村)'에 살았다. 당시 북촌에는 벌열 양반과 왕의 인척들이 사는 조선조 최고의 부촌이었다. 그러니 화원들의 후원자가 될 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북촌 지역에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화원들의 입장에서 도화서가 있는 곳은 궁중에서 멀지 않고, 서화를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들이 광통교에 있었고, 자신들의 후원자가 사는 북촌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좋은 곳이었다. 이 세 곳이 모두 연결되는 중심부가 인사동 지역이었다. 이러한 입지는 후에 인사동이 서화와 전적, 고미술 거래의 중심지가 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인사동이 본격적으로 서화 골동의 중심지가 된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인사동이라는 지명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만들어졌다. 인사(仁寺)란 지명은 '관인방'과 '대사동'의 이름에서 연유한다.

이미 근대화 과정을 통하여 상업에 눈을 뜬 일본인 상인들은 인사동이 서화골동 유통의 최적지라는 것을 알고 이곳에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광통교, 경복궁과 창덕궁, 북촌으로 연결되는 인사동은 이후 많은 발전을 하였다. 인사동은 이때 이후 한국 미술품 매매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제강점기가 강화되자 더욱 많은 일본인 서화골동 상인들이 인사동에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당시에 남산 바로 아래에 미술품 경매회사인 '경성미술구락부'가 있어 인사동은 미술품을 움직이는데 최혜의 적지였다. 유명한 미술품 수장가인 간송(澗松) 전형필(全瑩弼, 1906-1962) 등 서화 애호가들은 인사동과 경성미술구락부를 오가며 수집품을 채워나갔다.

서화 가게가 자리 잡히자 작품을 단장하는 표구사도 따라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한국에 '표구(表具)'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여 미술과 관련된 교유명사가 되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가 갖추어지자 인사동은 명실상부한 서화골동의 산실이 되었다.
댓글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