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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4.25 22:40 수정 2019.04.25 22:40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기관으로부터 안전과 인생을 빼앗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범죄자가 되었던 이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진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사과 없는 국가를 대신해 스스로 자신을 기념하는 '이상한 집'을 지으려 합니다. 그 이상한 집의 이름은 '수상한 집'. 지금 제주에서 벌어지는 수상한 일을 채워줄 수 있도록 함께해주세요. [편집자말]
'지금여기에', 건축사무소 '미용실'과 함께 2017년 겨울부터 '수상한 집'의 전반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기억발전소'는 6월에 문을 열 예정인 수상한 집에서 수많은 강광보들의 이야기가 기억될 수 있도록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이번 회에서는 수상한 집의 출발점이 된 강광보의 사연을 소개한다.  
         

늘 '수상한 집' 공사현장에 나와 있는 강광보 ⓒ 문화방송 캡쳐화면

 
"나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강광보의 집은 제주 국가폭력희생자의 삶을 보여주는 전시관 '수상한 집'으로 바뀔 예정이다. 부모님과 오랜 세월 살아온 터전이 더 보람 있게 쓰이면 좋겠다는 생각에 터와 공사비를 지원하고 지금여기에에 운영을 맡겼다. 이제 막 뼈대가 자리 잡은 집 앞에서 강광보를 만났다.

고국이 그리워 18년 일본 생활 청산하고 왔더니...

강광보는 1941년 10월 9일 1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나고 자란 곳은 화북동 서쪽 끝 곤을동이었다. 그 시절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어려웠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막연하게 일본으로 간 거지. 거기 가면 돈 벌 수 있다고 해서. 갈 때부터 일본에 오래 살겠다는 마음은 없었어. '언젠가는 내가 고향에 돌아와야 한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

20대 초반에 가까스로 일본행 밀항선에 몸을 싣고 큰아버지가 있는 오사카 이쿠노구(生野区)로 향했다. 일본에서 만난 큰아버지는 조총련계 사람이 되어 있었다. 

"4·3 사건 때 큰어머니의 형제가 토벌대에 억울하게 돌아가셨어. 공산주의가 좋다, 자본주의가 좋다 그런 건 모르지만, 자기 형제들이 이승만 정부 때 희생당하니까 그 억울함으로 이북을 찬양하고 있더라고."

가방 금속공업을 하고 있던 큰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고 고향 제주 친구들을 만나 어울리며 공장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불법체류자 신분이 드러나 조사를 받아야했지만, 곧 이북으로 떠날 거라고 말한 큰아버지의 기지로 풀려났다.

이후 잡히면 북송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큰아버지를 떠난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도쿄, 지바현 등으로 옮겨 다니며 일하던 그는 이 과정에서 결혼도 하고 2남 1녀도 낳아 삶의 안정을 찾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입국관리처에 붙잡혔다. 79년 5월 10일 일본으로 밀항온 지 18년째 되는 해였다. 입국관리처 직원은 자식도 있고 18년이나 되었으니 일본에 정착하라고 권했다. 강광보는 영주권을 신청할지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갈지 고민을 했다. 그러나 오랜 일본 생활에 지쳤고 아이들도 한국에서 자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귀국을 결심한다. 

강광보는 귀국 전에 일본 오사카에 있는 대한민국 영사관을 찾아가 조총련 친척 등이 있는 것이 문제가 되는지 물었다. 영사관에서는 '여기서 있던 일을 다 써라, 만일 거짓말을 해서 한국으로 가면 당신이 진실을 말해도 다 거짓이 되니까 하나도 빼지 말고 전부 자술서에 써라'라며 그러면 자신들이 책임지고 한국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강광보는 영사관에서 하라는 대로 했다.

7월 중순 제주에 도착하자 바로 입국심사장에서 아라동 근처에 있던 제주도 중앙정보부로 이송되었다. 일본에서 쓴 자술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오래 살았다는 그의 말에 조사관은 "물 들을 대로 물 들었네"라고 말하며 무차별 폭행한 뒤 심문을 했다. 여기서도 다시 자술서를 썼다.

반전, 또 반전

3일 후 풀려났지만 한 달 뒤 이번에는 제주도경 정보과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고 나온 후 한 달 쯤 있으니까 제주도경에서 전화가 왔어. 조사할 것이 있으니까 금방 왔다 가라고. 나는 (일전에) 중앙정보부에서도 조사를 받았으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나올 거라 생각해 누구한테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갔어.

갔더니 경찰서 옆 건물 작은 콘크리트 방으로 데려가더라고. 자술서를 쓰라고 해서  쓰면 찢어버리고, 쓰면 찢어버리더라고. 그러고는 고문을 했어. (일본에서 오래 살다가) 한국에 들어온 건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거라며 막 조져대는 거야. 중앙정보부에서 3일 만에 나온 것도 이상하다며 뇌물 주지 않았냐, 뇌물 준 사람 이름을 대라 이거야."


두 달가량 고문과 조사가 이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사를 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기 때문이다.

"계장이 날 부르더라고.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대통령이 돌아가시지만 않았으면 사건이 딱 완성되는 거였는데, 에이.' 그러고는 웃으며 이제 나가도 좋다는 거야. 어이가 없더라고. 그렇게 고문을 하더니 지금 나가라고 하면 불안해서 못 나간다. 밀항 자체가 법을 어긴 거니까 일단 법정에 세워 달라고 했어. 계장이 어이없어 하면서 웃어. 그러고는 조사한 세 사람 명함을 주면서 다른 기관이 조사 하겠다고 하면 3일 안에 연락해라, 조치를 취하겠다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걱정 말고 나가라고 하더라고."

조사관의 말을 믿고 경찰서를 나섰다. 경찰서에 있는 동안 매제가 사업을 하겠다며 돈을 날리는 바람에 일본서 가지고 온 재산을 잃고 막노동(일용직)을 전전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제주도경은 이후로도 3년간 그가 어디를 오가는지, 어떻게 사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조사했다.

7년이 지난 1986년 1월 이번엔 국군보안대에서 협조를 해달라며 그를 찾아왔다. 군인들은 고문 받고 허위진술 하느라 고생했다며 몇 시간 만에 조사를 끝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난 어느날 새벽 조사를 마무리 해야한다며 다시 나타났다.

"갔더니 이번에는 지하실로 데려가더라고. 예감이 딱 오더라고. 들어가니까 옷을 벗으라고 하더라고. 옷을 벗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랑 사람 얼굴색이 다르더라고. 내게 군복을 입히고는 조사가 시작됐어."

한국으로 들어와 긴 세월 입국관리처부터 중앙정보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며 '단련'이 된 그였지만 보안대는 또 달랐다. 조사받던 40~50여 일간 묻는 말을 부인하거나 고문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거나 하면 또 다시 고문을 했다. 완벽히 허위진술을 할 때까지 고문과 세뇌는 이어졌다.

그렇게 그는 간첩이라는 죄로 7년형을 선고 받았다.

"교도소에 있는 데 다른 분들이 (나를) 놀려대. 자기는 일본 3번 가서 15년형을 받았는데 싸게 받았다고. 대부분 제주 사람들이었는데 다 4·3사건 때문이야. 목숨이 위태로우니까 다 일본으로 갔거든. 다 원한이 있어 조총련이 되고 친척들도 그렇다 보니 한국에 오자마자 다 걸려들었어. 당시 간첩으로 몰린 제주도 사람들은 다 일본 관련 사건이더라고."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갔지만 세월이 지나 정권이 바뀌면 재심을 받겠다고 마음먹었다. 2009년 무죄선고를 받은 제주 출신 강희철의 모습을 9시 뉴스에서 보았다. 그를 수소문해 변호사를 소개 받았다. 재심을 앞두고 교도소에서 함께 지낸 사람들이 생각나 재심을 함께 진행할 사람들을 찾아나섰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을 지나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자 재심은 물 건너 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 '지금여기에'를 만나 본격적으로 재심을 진행할 수 있었다. 마침내 2017년 11월 8일 그는 광주고등법원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강광보 선생이 뉴스에서 봤던 또 다른 피해자 강희철 선생. 수상한 집 전시장에서 함께 만날 수 있다. ⓒ 강희철

 
"(무죄가 되기까지) 버티긴 뭘 어떻게 버텨? 견디는 수밖에 없지. 판사님이 무죄라고 말하니까 멍해지더라고. 방청객들이 박수를 치는데 나는 가족 생각밖에 안 나. 애들 고생한 생각이나 눈물이 팍 나더라고."

무죄를 받고 나서 그에겐 또 다른 희망이 생겼다. "진실이라는 것은 숨길 수 없는 것, 정의를 이길 사람은 없다는 것"을 배웠다. 지금까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면, 이제는 해야 하는 일, 후대에 보람이 될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과 같이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의 집을 제주 국가폭력 희생자들의 삶을 기념하는 전시관인 '수상한 집'으로 내어 놓았다. 이제 그에게는 이만한 고생으로 보람 있는 무언가 남길 수 있겠다는 마음 하나만 남았다.
 

최종시안4 ⓒ 미용실 김원일

   

최종시안3 ⓒ 미용실 김원일

   

최종시안 ⓒ 미용실 김원일

   

최종시안1 ⓒ 미용실 김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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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의도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기관으로부터 안전과 인생을 빼앗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범죄자가 되었던 이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진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사과 없는 국가를 대신해 스스로 자신을 기념하는 ‘이상한 집’을 지으려 합니다. 그 ‘이상한 집’의 이름은 ‘수상한 집’.... 늘 수상한 삶을 살아온 이들 그리고 수상한 시절을 사는 우리들의 안전한 은신처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건축 이후 전시관을 구성하는데 필요한 비용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제주의 수상한 이야기를 채워 줄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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