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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4.05 09:54 수정 2019.04.05 21:47

적십자에서 운영하는 중고매장 콘티(Kontti) ⓒ 김아연

 
오랜만에 동네 대형 쇼핑몰에 가서 아이 옷을 샀다. 자주 옷을 사주지 못한 게 미안해 재질도 제법 좋고 가격도 높은 티셔츠 몇 벌을 골랐다. 이맘 때 아이들은 옷에 대한 취향도 함께 생기기 때문에 자칫 옷을 잘못 골라주는 날엔 어린이집 등원에 큰 곤란을 겪게 된다. 옷이 맘에 들지 않아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고 방바닥에 드러누울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나의 옷 선택은 처참히 실패했다. 아이에게 새 옷을 꺼내 준 어느 날 아침, 아이는 1년 전 중고장터에서 사서 목과 팔이 다 늘어난 티셔츠를 굳이 입겠다고 우기며 울고 말았다.  

중고가게 구경이 취미
 
핀란드에는 동네 곳곳에 중고가게가 많다. 집에서 쓰던 식기부터 옷가지, 도서, 음반, 스포츠 용품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이러다 보니 핀란드인들 중에는 중고가게 구경이 취미인 사람이 있을 정도다. 구경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그곳에는 당연히 아이의 옷이나 모자, 신발, 장난감도 많다.

아예 아이용품만 따로 취급하는 중고가게도 있다. 이런 이유로 물건을 새로 구입하기 전에는 중고가게에 먼저 들러 혹시 쓸 만한 것이 있는지 둘러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게 한 벌, 두 벌 사기 시작한 중고 옷이 어느새 아이 옷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핀란드에 도착하자마자 구입한 유모차도, 지난 겨울 내내 신은 장화도 모두 중고 제품이다.
 

금세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새 옷보다는 중고 옷이 유용할 때가 많다 ⓒ 김아연


한국에도 지역 맘카페에서 쓰던 물건을 주고 파는 문화가 있지만 아이 물건을 직접 눈으로 보고 살 수 있는 오프라인 매장은 많지 않다. 대부분 부모들은 아이 용품을 새로 사기 위해 바쁘게 발품을 들여야 한다.

나 역시 첫 아이를 갖고 나서 다른 부모들처럼 서울 강남 부근에서 열리는 '베이비페어'를 방문한 적이 있다. 박람회장 주변으로 길게 늘어선 차의 행렬. 행사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힘들게 주차한 뒤 무거운 배를 끌고 겨우 입장한 그곳에서 유모차 가격을 보고 크게 놀랐다.

수입산 유모차 한 대 가격은 무려 2백만 원대. 커피컵 홀더를 끼울 수 있는 사소한 액세서리는 물론이고 앞뒤보기 기능, 카시트와 연동할 수 있는 기능, 햇빛 가리개 등까지 더해진 그 유모차는 그야말로 하나의 최첨단 자동차 같았다. 몇 개의 브랜드를 심각하게 비교하다가 가벼운 유모차가 아이와의 산책을 더 가볍게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가장 저렴한 15만 원짜리 경량 유모차를 골랐다. 그 유모차를 한국에서 불편없이 잘 쓰다가 핀란드까지 가져왔다.
 
단 한 가지가 문제가 있었다면 우리 가족과 함께 비행기에 몇 번씩이나 몸을 실은 경량 유모차는 휴대성은 좋았지만 눈이 많이 내리는 이 나라에 적합하지 않았다. 바퀴가 눈에 빠져 길 한가운데 서야 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다. 그제야 알았다. 아이가 경량 유모차를 타든 대형 유모차를 타든 간에 중요한 것은 유모차가 내가 사는 지역의 기후와 환경에 적합한지 여부였다.

슬프게도 어른들의 비교 욕구와 브랜드 과시 심리를 이용한 숱한 마케팅이 아이를 가진 부모를 자극한다. 그래서 한국 지형에도 맞지 않는 대형 유모차를 비롯해 카시트, 옷, 신발에 이르기까지... 아이를 키우는 동안 과도하게 지갑을 열게 만든다.

지갑은 필요할 때만 연다
 

한국의 베이비페어에는 아이 용품을 사려는 부모들로 늘 붐빈다 ⓒ 김아연

 
핀란드에 와서 놀란 점은 부모의 경제력이 아이의 물건에 잘 드러나지 않는 점이었다. 간혹 동네에 팔지 않는 수입 브랜드 옷을 입고 다니는 어린이들이 보이기도 했지만, 대부분 아이들은 비슷한 가격대의 옷을 입고, 중고 옷도 아무렇지 않게 자주 구매했다.

어느 날, 오픈데이케어 센터를 방문했다가 서로 똑같은 옷을 입은 아이들을 여럿 보기도 했다. 그 중심에 핀란드의 영유아 복지 사례로 잘 알려진 '엄마 패키지(maternity package)'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2019 엄마 패키지 구성 보러가기)
 

2018년도 엄마 패키지 구성 ⓒ KELA


흥미롭게도 핀란드에서 비슷한 연도에 태어난 아이들은 같은 옷을 갖고 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배달되는 이 상자에는 아이가 태어나 돌 정도까지 입을 수 있는 내의와 외출용 우주복, 그리고 손톱 깎기나 턱받이, 체온계 같은 소모품 등이 약 60여 개 정도 담겨 있다. 지난 2018년 시행 80년을 맞은 이 제도에는 "모든 아이가 처한 환경에 상관 없이 동등한 출발선에서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가치가 담겨 있다"고 켈라(KELA, 사회복지국)는 설명한다.

나는 아이를 한국에서 낳았기 때문에 경험하지 못했지만, 핀란드에서 아이를 낳은 친구들은 이 상자 덕분에 많은 수고를 덜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핀란드 누르미야르비에 사는 김나래씨는 "아이 옷이 작아졌다 싶어서 상자 안을 들여다보면 그 다음 치수가 계속 들어 있어서 옷을 사러 나갈 필요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또 탐페레에 사는 예비 엄마 최경순씨는 "이 상자를 받고 선물처럼 설렜고, 첫 아이라 뭘 준비해야 할지 몰랐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라고 덧붙였다.

혹시 차별 받을까 비싼 옷 입혔는데... 한국 엄마의 괜한 걱정
 

아이들이 교실에 함께 모여 율동을 배우고 있다 ⓒ 김아연

 
처음 핀란드로 이주했을 때 나도 아이 물건의 브랜드에 크게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외국인이라고 차별을 받을까봐 수입 브랜드 옷을 인터넷으로 구입해 입힌 적도 있다. 하지만 아이에게 옷을 입혀본 부모는 안다. 아이는 본인이 입은 옷이 얼마짜리인지, 브랜드는 무엇인지에 전혀 관심이 없다.

색이 바랜 중고 유모차도 3년을 넘게 썼지만 아이는 엄마와의 산책을 그저 즐거워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경차를 타든 대형차를 타든 아이는 부모와 함께 하는 자동차 여행이 즐거우면 그만이다. 아이에게 소중한 두 발이 되어주는 유모차를 사는 일에 어른들의 비싼 자동차를 사는 것과 비슷한 심리가 투영되는 것은 무척이나 슬픈 일이다.   

남의 것을 부러워하고 비교하며 살았던 기존의 삶의 방식들이 핀란드에 와서 처절히 깨어지고 있다. 아이는 그것이 비록 중고 옷일지라도 스스로 입고 싶은 옷을 골라 입으며 자존감을 세워간다. 행복의 크기가 유모차 바퀴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를 통해 배운다. 한번도 입히지 못한 비싼 새 옷이 비록 옷장에 있을지라도 오늘 우리 아이가 만족했으면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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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광고회사와 서울시청 홍보부서에서 일하다 3년 전에 핀란드로 이주해 북극권 길목에 자리잡은 로바니에미에 살고 있다. 최초 핀란드 팟캐스트 '내귀에 핀란드' 운영자이며, 3살 난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엄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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