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0
원고료주기
등록 2019.03.21 10:21 수정 2019.03.21 10:22
 

미술실에서의 이봉상. <이봉상화집>(1972, 한국문화사)에 실린 사진. ⓒ 문선호


미술계의 신화 탄생

인왕산 필운대 아래 누하동 5거리라 불리는 곳에는 여러 화가들이 근처에 살아 집을 나오면 길가에서 동료 화가들을 만나기 일쑤였다고 한다. 특히 해방 후 당시 화단의 좌장 격인 이상범이 누하동에 살며 '청전화숙'을 운영할 때에는 더욱 많은 화가들이 모여들었다. 이상범의 집 바로 앞에 천경자가 살았고, 집 앞 오거리 주변에 구본웅이 살았고, 이봉상(李鳳商, 1916-1970), 한묵도 바로 근처에 살았다. 

이봉상은 서울 출신으로 종로구 운니동에서 태어나 수송동에 있는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를 다닌다. 그는 이 학교에서 담임 교사였던 오가다 도쿠사부로(緖方篤三郞)라는 선생의 각별한 사랑과 도움으로 유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특히 5학년 때에는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유명세를 날리던 손일봉(孫一峰, 1906-1985)이 미술교사로 와 이봉상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손일봉의 지도로 일취월장한 이봉상은 1929년 6학년 때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풍경>이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에 들어 '천재의 탄생'이라는 극찬을 듣는다. 이 때 그의 나이 14살이었다. 나이 어린 보통학교 학생이 조선미전에 상을 받았으니 화제가 될 만하였다. 

보통학교 졸업 후 경성사범학교에 지원하였으나 실패한다. 당시 경성사범은 등록금을 조선총독부에서 제공하였고, 졸업하면 보통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지원하여 입학이 쉽지 않았다. 낙방은 슬픈 일이었으나 재수하는 도중에 좋은 일도 있었다. 보통학교 시절 선생님의 소개로 유명한 일본인 화가 미키 히로시(三木弘)가 운영하는 미술연구소에 들어가 배우게 된 것이다.

당시 미키 히로시는 이과전 회원으로 독특한 화풍을 지닌 화가였다. 그는 이듬해 무난히 이 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재수 중에도 그림을 그려 제9회 조선미전에 출품하여 연거푸 입선에 든다. 그뿐 아니라 같은 해에 서화협회전에도 가장 나이 어린 소년 화가로 2점을 출품하여 일제하의 민족화단에서도 '천재적인 화가'라는 소리를 듣는다.
 

이봉상 <인왕산이 보이는 풍경>. 제12회 ‘조선미전 도록’에서 실린 그림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 황정수


재수 끝에 경성사범에 입학한 이봉상은 이 학교에서 또 한 명의 스승을 만나 화가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간다. 당시 경성사범에는 후쿠다 토미지로(福田豊吉)라는 뛰어난 화가가 있었다. 후쿠다 토미지로는 교육에 대한 열정이 강해 이미 손일봉, 윤희순 등 한국인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쳐 화가로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인물이었다.

이봉상 또한 후쿠다 토미지로의 도움으로 제10회, 제11회, 제12회, 제14회, 제15회, 제16회 조선미전에 입선하여 어린 나이에 가장 많이 입선한 화가로 유명세를 떨친다. 특히 제15회 미전에서 출품한 <폐적(廢蹟)>이란 작품은 특선에 들어 더욱 화제가 되었다. 또한 이 해에 일본에서 열리는 문부성전람회에도 입선하여 각광을 받았다.

교사 시절

경성사범 5년을 마친 후 다시 연수과 2년을 다닌 후 1938년 23살 때 경성(서울)에 있는 정동소학교에 교사로 취임한다. 이때쯤 학교에서 멀지 않은 누하동으로 이사한 듯하다. 이때 이후 계속 세상을 떠날 때까지 누하동에 산다. 그는 교사를 하며 계속 그림을 그려 조선미전에 출품한다. 1937년부터 제17회, 제18회, 제19회에 연거푸 입선한 후에 화가로서의 성공을 위해 큰 결심을 한다. 

학교를 그만두고 미술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바로 그해 가을에 문부성전람회에 <조선의 풍경>이란 작품으로 입선을 한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1년 만에 그만두고 돌아와 경성여자사범학교에 촉탁으로 근무한다. 일본인 화가들과 '창룡사(蒼龍社)'라는 미술단체를 만들어 정자옥 화랑에서 전시회를 여는 등 열정적으로 활동한다. 그러는 도중에 중등학교 교원 자격을 얻고, 1943년 제22회 조선미전에서도 2점을 출품하여 입선한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돌아가자 서울에 있는 중동중학 미술교사로 취직하였다가 경동고등학교로 이직하여 1950년까지 교사 생활을 한다. 조선미술협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며 협회전에도 작품을 출품한다. 

6.25전쟁이 일어난 후의 활동
 

이봉상 <자화상>(1955). <이봉상화집>(1972, 한국문화사)에 실린 작품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 문선호

 
갑작스런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간다. 그곳에는 이중섭, 장욱진, 손응성, 이규상, 한묵, 백영수 등 동년배 친구들이 생활 방책을 강구하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너나없이 힘든 시절 이봉상은 초상화를 그려 팔기도 하며 힘든 시절을 이겨 나갔다. 이봉상은 박고석, 손응성, 김병기 등과 유난히 친하게 지냈다.

전쟁 중 마침 종군작가단이 만들어지자 많은 화가들이 참여하였다. 이봉상도 종군하였는데, 군복을 입은 그의 모습이 가관이었다고 한다. 친구 박고석의 증언에 따르면 키가 작고 몸이 왜소한 이봉상이 작업복 위에 미군 장교 코트를 걸치고 일본 병정처럼 전투모를 쓴 모양이 마치 가짜 패잔병 같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이봉상은 미술단체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50년 미협', '기조전(其潮展)', '창작미협(創作美協)', '신상회(新象會)', '구상회(具象會)' 등의 창립에 가담하였다. 또한 미술교과서 편찬과 비평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후진양성에도 앞장선다.

1952년 이화여자대학교에 출강하기 시작하여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강의하였으며, 1953년부터 1966년까지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또한 1954년부터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추천작가와 초대작가를 거쳐 심사위원을 지내며 미술계의 중심인물로 자리 잡는다.

이봉상의 작품 세계

이봉상은 어려서부터 조선미전에서 최연소 수상하여 화제가 되었고 작품의 수준도 뛰어나 늘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작품 활동이나 미술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나 이상하게 동년배 화가들에 비해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한다. 이중섭, 유영국 등과 동갑으로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음에도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지는 못한다. 

이봉상이 이상하게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교사 생활을 시작하여 생활에 어려움이 없었고, 어린 나이에 큰 어려움 없이 화단에 자리 잡아 무난한 삶을 살았기 때문으로 보이기도 한다. 성격 또한 매우 원만하여 미술가임에도 특이한 기행을 일삼지 않아 남의 눈에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이봉상 <역광>(1957년). <이봉상화집>(1972, 한국문화사)에 실린 작품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 문선호

 
그러나 작품만은 누구 못지않은 빼어난 경지를 보인다. 해방 전 조선미전을 중심으로 활동할 때에는 주로 사실주의에 입각한 인상파 화풍을 바탕으로 한 관전 풍의 그림을 그렸다. 빛에 노출된 자연의 풍경이나 인물을 주로 그렸으며 이러한 작품은 그의 전형적인 작품 경향이 되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그의 작품은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 1950년대에는 야수파를 연상시키는 대담한 붓질과 화려한 색채로 표현주의적인 성향을 보인다. 한편으론 추상적 성향의 화풍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역시 그의 특장은 구상성에 있다. 그의 작품에는 남과 다른 기세와 품격이 있다. 그의 작품 속 구성은 과감하면서도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으며, 색채는 화려하면서도 높은 격조를 보인다.

1950년대는 누구나 어려운 시절이었다. 화가들은 캔버스나 물감을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망가진 미군부대의 천막을 구해 크기대로 잘라 캔버스로 묶어 사용하였다. 한 때 이런 캔버스를 '이봉상 캔버스'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이봉상 <아침>(1962년). <이봉상화집>(1972, 한국문화사)에 실린 작품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 문선호

 
1960년대에는 주로 나무와 수풀, 산과 새·달 등 자연적인 소재에 한국적인 내용을 가미한 주제를 즐겨 다루었다. 화면도 중후한 마티에르와 양식화된 구상세계를 보였다. 점차 설화적 소재를 도입하면서 점차 추상성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흰색으로 두터운 바탕을 먼저 만든 뒤 그 위에 이미지를 구성하는 기법도 선보였다 이러한 면모는 후배 구상계열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이봉상의 작품은 누구 못지않게 빼어나다. 비교적 과작이라 남아있는 작품이 적은 것이 아쉽지만 작품세계를 평가하기에는 적지 않은 양이다. 이를 통해보면 그림의 구성이나 기교 어느 하나 다른 이에 뒤지지 않는다. 또한 기품 있는 색감과 다감하게 다가오는 화면의 질감은 높은 격조를 보인다. 그런 면에서 이봉상은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못지않은 뛰어난 작가라 할 만하다. 그의 작품이 더욱 많이 관객들에게 보여 다른 작가 못지않은 사랑은 받기를 바란다.
댓글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

'좋은 사람'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지역네트워크부에서 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