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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4.24 20:34 수정 2019.04.24 20:34
"앞으로 갓! 뒤로 갓!"

스무 명의 보도연맹원들은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사천리 질구지 하천변 공터에서 제식훈련을 했다. 잠시 후에는 보도연맹가(保導聯盟歌)를 부르며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공터로 다시 돌아온 무리들은 지휘자의 보도연맹 강령 선창에 따라 마지막 구호를 따라 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자" "다하자! 다하자! 다하자!" "우리는 망국적 북한괴뢰집단을 절대 반대하자" "반대하자! 반대하자! 반대하자!" 1950년 5월 충북 청원군 사주면 사천리(현재는 청주시 사천동) 질구지마을의 풍경이다.

사주면 사천리는 질구지, 발산, 새터 3개 자연마을로 구성된다. 사천리에서는 보도연맹사건으로 42명이 학살되는데, 질구지 19명, 발산 12명, 새터 11명이 피해를 입었다. 이 마을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 경위는 증언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김홍만(83세, 청주시 사천동)은 "이장이 보도연맹 가입을 주도했는데요, '가입하지 않으면 비료 배급을 하지 않겠다, 농사 품앗이에서 제외 시키겠다'고 해 어쩔 수 없이 마을 청년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고 한다.

신대식(70세, 청주시 내수읍)은 "아버지(발산리 신옥성)가 도장을 찍지 않으니까 경찰서에 끌려가 전기고문을 당해 보도연맹에 가입했어요"라고 한다. 그런데 위 증언이 남로당 가입 경위인지, 보도연맹 가입 경위인지는 불분명하다. 

발산리 김순오(96세, 청주시 사천동)의 증언은 당시 상황을 보다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웃 마을에 사는 조신술(가명)이가 해방이 되니께 빨갱이 두목이 돼서 남로당원 모집을 했어. 나도 끌려 갈 뻔했어. 그때 남로당에 가입했던 이들이 나중에 모두 죽었지." 조신술의 주도로 마을 청년 상당수가 남로당에 가입을 하고, 이들이 후에 만들어진 보도연맹에 자동으로 가입되어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얘기다. 

김순오의 증언은 이어진다. "당시 남로당에 가입되지 않은 이들은 자동으로 민애청(민주애국청년동맹)에 가입됐어. 나도 그렇고. 그런데 형님(김인구)이 조신술한테 공개망신을 당했어. 동생도 (남로당에) 가입 못 시키는 병신이라고 말여." 그렇게 해서 질구지 19명, 발산 15명, 새터 13명이 남로당을 거쳐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증언자 김순오96세의 나이에도 경운기를 운전하는 김순오 ⓒ 박만순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도망가!"

정재님은 치마 끝자락을 움켜잡고 내덕지서로 달려갔다. 남편 신옥성을 포함한 사천리 보도연맹원들이 지서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여보, 여기 있으면 죽는대요."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도망 가! 따비밭의 참외나 잘 지켜." 쟁기나 소가 들어서지 못하고 따비나 지나 갈 정도로 좁은 밭에 주렁주렁 달린 참외를 누가 훔쳐 가지는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김홍만의 경우 어머니와 누님이 청주경찰서로 아버지를 면회 갔는데, "안 가면 크는 애들이 문제가 된다"며 청주경찰서 무덕관에 그대로 남았다고 증언한다. 

발산리 김인구는 들일을 하다 집에 늦게 들어가니 마을 보도연맹원들이 전부 경찰서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내 김복임은 새 옷 중 적삼을 남편에게 건네주고 "잘 다녀와요"라고 했다. 그러면서 보리쌀 3되를 안겨 주었다. 김인구 동생 김순오는 "형님 가지 마요, 잘못될 수도 있잖아요"라고 만류했지만 허사였다.

이렇게 청주경찰서의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에 순순히 응했던 47명의 사천리 보도연맹원들은 죽음의 땅으로 끌려갔다. 청주경찰서에서 약 1주일간 구금되었던 이들은 손이 묶인 채 GMC 트럭에 실렸다. '왜 이러지' 하며 웅성거렸지만 돌아온 것은 무장한 군인과 경찰의 총 개머리판 세례였다. 이내 침묵이 트럭 안을 지배했다. '덜컹 덜컹' 하며 트럭은 비포장도로 길을 한참이나 달려 미원국민학교로 갔다.

미원국민학교 교실에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살아 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밥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경찰들은 보도연맹원들에게 "마을에 들어가 알아서 밥을 얻어먹어라"고 한 것이다.

미원 면소재지에 살았던 송재복씨 집으로 갔던 사천리 새터 정현필과 정상봉은 집 주인의 언질로 그 시간부로 도망쳤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그들은 마을에 와서 사천리 보도연맹원들이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에서 죽었다고 알려주었다. 김순오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 발산에서도 3명이 탈출을 해 마을로 돌아왔다.

신대식이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는 다르다. 신대식은 "미원국민학교에서 경찰이 수류탄을 터뜨렸는데, 보도연맹원들이 도망갔대요. 잠시 후에 경찰이 방송을 해 다시 모이라고 해 재집결을 했다고 해요. 그 혼란의 와중에 일부 사람들이 도망갔대요"라고 증언한다. 

과정이야 어떻든 미원국민학교에서 탈출을 한 사천리 보도연맹원은 새터 정현필과 정상봉, 발산 조신술(가명) 형제, 최민석(가명) 아버지였다.

"사람 잡아놨으니 장례 치러라"

충북 청원군(현재의 청주시) 미원면 미원국민학교에 구금되었던 보도연맹원들은 다음날인 1950년 7월 12일 오전 9시 30분경 트럭에 실렸다. "속리산 구경시켜 줄 테니 트럭 위에서 조용히 해!"

보도연맹원들은 긴가민가 하면서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가는 트럭에 몸을 맡겼다. 20분을 달려 트럭이 멈췄다. "속리산이 아닌데" 하는 웅성거림에 총 개머리판이 다시 날라 왔다. 길 가 옆에 일렬로 세워진 보도연맹원들에게는 마지막으로 말 할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인솔자의 "쏴"하는 소리와 함께 짚단 무너지듯이 보도연맹원들이 쓰러졌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길가 2곳과 산 초입 1곳, 산 중턱 1곳, 총 4곳에서 150명의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되는 데는 불과 수십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장난치듯이 총질을 한 군인과 경찰들은 학살을 모두 마친 후 충북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아치실 마을로 들어갔다. 집집마다 다니며 "사람 잡아놨으니 장례 치러라"라고 외쳤다.

아곡리 청·장년들은 삽과 괭이를 들고 핏물이 흐르는 사건 현장으로 모여들었다. 현장에는 애벌레가 채반 위에서 나란히 죽은 것처럼 흰 옷을 입은 이들이 일렬로 쓰러져 있었다.

군인과 경찰들이 양쪽에서 총격을 가해 옷은 붉은 피로 얼룩졌고, 밭고랑에는 핏물이 졸졸 흘렀다. 당시 시신 수습에 동원된 우창기(1926년생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는 "경찰들이 와서 장례 치르라고 해 삽 들고 갔어요, 너무나 끔찍해 생각하기도 싫어요"라며 침울한 얼굴을 했다.    
 

우창기한국전쟁 당시 시신수습에 동원된 아곡리 주민 우창기(우측에서 3번째) ⓒ 박만순


낙인과 통곡... 남은 사람들의 삶

6.25 직후 입대했던 유○철(사주면 사천리 발산마을)은 휴가를 나와 보니 형 유영식이 보도연맹사건으로 죽었다는 것이 아닌가. 순간 눈알이 돌아가며 이성을 잃었다. "조신술이 이 새끼 죽일 껴" 하며 마당에서 뛰어 나갔다.

보도연맹학살 사건 이후 조신술은 사천리 발산에서 살 수 없었다. 자신이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한 것은 아니지만, 보도연맹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유가족들로부터 원망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할 수 없이 인근마을인 청원군 사주면 사천리 상정마을로 이사했다.

유○철은 상정마을로 가 조신술을 찾아냈다. 총 앞에 장사는 없는 법. 유○철은 카빈총을 조신술에게 겨누고 마을 뒷산으로 끌고 갔다. "너 이 새끼, 우리 형 죽게 했지. 너도 죽어 봐." "동생. 내가 그런 거 아니잖어. 어쨌든 잘못했네. 한 번만 살려주게." 손을 싹싹 빌었다. 이윽고 총 소리가 났다. "탕탕탕" 세발의 총성에 조신술은 다리가 풀리며 고꾸라졌다.

하지만 그는 살아났다. 유○철이 조신술을 정조준해서 쏜 것이 아니라 공포를 쏘았기 때문이다. 유○철은 울분을 참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차마 조신술을 죽일 수는 없었다. 실제 보도연맹원 학살의 책임이 그에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책임자인 대통령 이승만과 집행자인 경찰과 군인이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고,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그들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었다.
 
김순오는 여름 난리에 피난했다가 다시 마을로 왔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주경찰서 경찰이 와서 "잠시 조사할 게 있으니 갑시다"라며 그와 같은 마을 사람 3명을 연행한 것이다.

경찰들은 경찰서 취조실에서 바로 전기고문에 들어갔다. "너네 남로당에 가입했지." "아닙니다." "이 빨갱이 새끼들 솔직하게 불어." 전기고문의 강도를 높였다. "악" 비명이 이어졌지만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몇 시간 후에 당시 사천리 같은 마을 살았던 대한청년단원 권요섭이 경찰서에 찾아왔다. "형사님, 얘들은 빨갱이가 아닙니다"라고 증언해 결국 풀려났다. 보도연맹원의 유족이라고 경찰이 트집을 잡은 것이다.

신대식의 집안은 아버지 신옥성이 학살당하고 풍비박산 났다. 결국 어머니 정재님은 큰형과 작은형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신대식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에 컸다. 본의 아니게 가족이 생이별한 것이다. 정재님은 살기 위해 전쟁을 했다. 약 10년간 식모살이를 했고, 서울 명동성당 내 고아원에서 밥해주는 일을 했다.

두 형은 고아원에 맡겨졌다. 작은 형은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다니다가 졸업을 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검정고시로 중학교 자격을 취득한 작은형 신태식은 청주상업학교(현재 청주의 대성고)를 3등으로 합격했다. 공부에 매진한 그는 졸업하자마자 청주 상업은행에 1차 합격했다. 

그런데 최종심사에서 '아버지가 보도연맹사건으로 죽었다'는 이유로 신원조회에 걸려 낙방했다. 그날 어머니 정재님과 세 아들은 서로 부여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빨갱이 꼬리표는 그렇게 신대식 가족을 따라다녔고, 심지어 신대식이 1972년 해병대에 입대하는 데까지 영향을 끼쳤다.
 
기억해야 할 죽음 
 

2019년 발굴된 유해아곡리에서 발굴된 유해 ⓒ 박만순


지난 3월 8일 충북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에서 충북도청이 주관하는 유해 발굴 개토제가 열렸다. 이곳에 신대식을 포함한 옛 사천리(현재 청주시 사천동) 유가족들이 참석했다. 포클레인이 흙을 뜨는 동안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날 이후 발굴 현장에 두 차례 더 찾아가 자원봉사활동을 한 신대식은 유해 발굴 이야기에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이름을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어요." 유복자니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발굴 현장에서 마음속으로 아무리 '아버지'를 불러 보아도 아버지가 돌아올 리 없다. 뒤엉킨 유해 속에 아버지의 체취를 맡을 수 있을까 해서, 여러 번 찾아가고 자원봉사활동도 해보지만 왠지 마음은 허하다.

신대식은 당신 아버지를 찾지 못하더라도 '누군가의 아버지를 단 한명이라도 확인할 수 있다면' 하는 심정으로 현장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신옥성을 포함한 사천리 보도연맹원 42명, 그리고 아곡리에서 죽은 백 수십 명의 죽음을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유해 발굴의 최종 결과는 오는 25일에 발표된다. 
 

2014년 아곡리 유해시굴 장면2014년 아곡리 유해시굴 장면. 앞줄 우측에서 4번째가 신대식.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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