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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3.07 09:12 수정 2019.03.07 09:12

광화문에서 바라 본 현재의 인왕산 ⓒ 황정수

  
조선시대 안평대군은 서촌 수성동에 살며 안견에게 자신의 꿈을 소재로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했고, 겸재 정선 또한 옥인동에 살며 인왕산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이후 조선의 여러 화가들이 이곳에 살거나 이 지역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일제강점기까지도 서촌과 인왕산 지역은 화가들의 동네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많은 한국인 화가들이 서촌 지역에 살았고, 일본에서 온 화가들도 여럿이 이곳에 살거나 서촌 지역을 찾는 것을 좋아했다. 이들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경복궁이나 백악산 또는 인왕산을 찾아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에까지 이어져 적지 않은 화가들이 이 지역에 살고, 여러 화가들이 서촌 지역을 소재로 그림을 그린다. 특히 인왕산은 여전히 화가들이 자주 소재로 삼는 단골 모티브이다. 바위로 이루어진 산세는 조선시대나 현재나 다름없이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다른 지역의 산들이 세월의 변화에 따라 많은 시각적 변화가 있지만 인왕산은 옛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여전히 예전과 유사한 느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현대 미술가들에게 있어 인왕산은 조선시대 화가들 못지않은 창조적 영감을 주는 좋은 대상이다.
 
먼저 동양화 형식으로 그린 화가를 살펴보면 박대성과 오용길의 작품을 들 수 있다. 두 사람은 동시대에 활동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화가들이다. 두 사람 모두 인왕산을 주제로 한 그림을 남기고 있는데, 그 표현 방식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박대성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남성적인 인왕산의 면면을 수묵만을 사용하여 과감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이에 비해 오용길은 섬세한 필치로 봄날의 정겨운 풍경을 그린다. 산자락에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의 모습은 그동안 지녀왔던 인왕산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같은 소재를 다루어도 작가의 감성과 필치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수묵화로 그린 문봉선의 인왕산
 

문봉선 ‘인왕산’ ⓒ 김석

 
동양화가 중에 한동안 인왕산을 많이 그린 이는 역시 문봉선이다. 그는 겸재 정선의 실경산수에 매료되어 수없이 많은 한국의 실경 산야를 그리며 산수화를 수련하였다. 그는 본래 수묵 운동의 한 중심에 있던 작가인데, 그 때의 먹 사용 방식을 바탕으로 좋은 실경산수를 많이 남겼다. 그 중에 2016년에 그린 인왕산 그림이 인상적이다.
 
큰 폭의 종이에 수묵만으로 바위산인 인왕산의 모습을 활달하게 그리고 있다. 거침없는 필획으로 이루어진 그의 인왕산은 겸재의 인왕산 그림에서 영향을 받은 면이 느껴지지만,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는 미덕이 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에 성공했다 할 수 있다. 검은 느낌을 주는 인왕산 바위를 표현하는데 그의 수묵 필치가 매우 잘 어울린다.
 
남도 기질의 채색화로 그린 조풍류
 

조풍류 '인왕산' ⓒ 김석

 
근래에 인왕산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작업하는 화가 중에 조풍류가 있다. 그는 필명처럼 흥취가 많은 화가인데, 그는 다양한 예술적 재능을 가진 화가이다.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인다. 이러한 그의 남도 기질은 그의 작품에 오묘한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는 남과 다른 감성적인 흥취의 풍류가 있다.
 
그동안 인왕산을 그린 동양화가들이 주로 먹을 사용하여 그렸지만, 조풍류는 채색화에 기반을 두고 그린다. 처음 시작한 밑그림에서부터 보이는 그의 선은 율동감이 느껴진다. 이런 그의 흥취는 채색이 더해지며 점차 안정된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채워진 그의 푸른 채색 인왕산에는 달빛 정취가 있고, 그 아래 사람들의 진솔한 모습이 보인다. 
 

이종민 '봉천가는길-서촌5' ⓒ 김석

 
이들 외에도 이종민이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린 <봉천가는길-서촌5>에서의 인왕산 모습은 고향 마을 같은 정겨움이 흐른다. 또한 박능생이 수묵과 아크릴을 혼용하여 그린 <번지점프>에서는 현대에 사는 도시인이 바라보는 인왕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외에 박병일의 흐린 먹색으로 그리는 독득한 그림도 있고, 안석준의 안정되고 따뜻한 풍경도 보는 이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104세 현역 화가 김병기의 <인왕제색>
 

김병기 '인왕제색' ⓒ 삼성미술관

  
서양화가들 중에도 인왕산을 소재로 작업을 한 작가들이 여럿 있다. 그 중 김병기는 1916년생으로 올해 104세이다. 이중섭과 같은 해에 태어난 친구이니 보통 오래 전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현재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랜 미국 생활을 끝내고 조국에 돌아온 이후 그는 고국의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보고 느낀 것을 작품화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본 고국은 지난날의 산천이 아니었다. 그는 귀국 첫 전시회의 제목도 중국 시인 두보(杜甫)의 시 <춘망(春望)>의 한 구절을 차용하여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라 하였다. 그만치 그가 본 고국의 모습은 예전과 달랐다.
 
김병기의 산 그림 중에 인왕산을 그린 것이 몇 점 있다. 그 중에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차용한 '인왕제색'이란 작품이 있다. 붉은 색 색조를 주조로 그린 이 작품은 도시의 문명에 쌓여 혼돈에 빠져 있는 자연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곡선으로 이루어진 산의 중첩된 선은 서로 교차하면서 리듬감을 보인다. 그러나 산 주위에 직선으로 표현된 면들은 산을 가두고 있다. 이는 자연과 괴리된 이질적인 문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명이란 이름으로 채워진 세상 속에서 신음하는 자연의 모습일 것이다.
 
민정기가 <몽유도원도>를 해석한 <유(遊)몽유도원도>
 

민정기 ‘유(遊)몽유도원도’ ⓒ 금호미술관

 
1980년대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하며 한 시대를 장식한 화가 민정기는 더 이상 민중미술가를 자처하지 않는다. 이제 그는 현대 한국의 풍경을 그리는 한국적인 풍경화가 중의 한 명이다. 그는 과거 한국의 모습과 현재 한국의 모습을 한 화면에 배치하여 현대를 되돌아보게 하는 방식의 기법을 주로 사용한다. 풍경화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현실의 재현에 인문학과 역사학을 부가하여 해석한 그림을 주로 그린다.
 
그의 그림 중에 서촌과 관련 있는 것 중에 <유(遊)몽유도원도>가 있다. 이 그림은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요즘 세검정의 풍경을 합쳐 한 화면에 그린 것이다. 그는 이 그림을 두고 "변해 버린 도시 풍경을 보여주면서 잊힌 기억을 되살려보고 싶었다. 인간이 터를 잡아 사는 기운을 느끼려고 애썼고, 실제 그 풍경을 사실적으로 옮기기보다 땅과 인간이 어울려 사는 모습을 담아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 작품은 안견이 살던 시대의 산야와 현대인들의 삶의 모습이 잘 어우러져 있다.
 
겸재 정선에 빙의된 서용선의 인왕산
 

서용선 ‘인왕산’ ⓒ 누크갤러리

  
서용선의 그림 속에는 늘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흐른다. 그가 인물을 그리면 그 사람의 굴곡진 삶이 그대로 드러나고, 그가 자연을 그리면 그 곳의 지나온 역사가 스며든다. 그가 오래 전부터 그린 단종을 주제로 한 그림에선 왕에서 폐위되고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의 비운이 배어들어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늘 어떤 미묘한 기운이 서려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근래 서용선은 인왕산을 주제로 개인전을 열 정도로 인왕산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자주 그린다. 그가 인왕산에 깊이 빠진 것은 역사적인 사건에 얽힌 것을 주로 그리던 화가로서의 촉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인왕산은 서울의 중심부인 경복궁 근처에 있고 많은 조선시대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안평대군의 비운의 이야기도 있고, 재주 많은 중인들의 삶도 스며들어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제국주의 지배의 손길이 강하게 뻗쳐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점철된 역사의 무게를 정선의 <인왕제색도>에 빗대어 표현한 서용선의 화필은 수없이 많은 역사의 숨결을 그림 속에 담아낸다. 그의 강렬한 원색 색감과 거침없는 붓 줄기는 원시적이면서도 강렬한 기운을 보인다. 가라앉은 듯한 푸른 색감은 오랜 역사를 머금은 산의 연륜이 보이는 듯하고, 그 아래 숨은 듯 자리 잡은 집들은 현대에까지 면면히 이어오는 백성들의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임택 ‘인왕산’ ⓒ 김석

 
이들 외에도 이대원이 점묘 형식으로 그린 아름다운 인왕산 그림이 여럿 있었다. 그의 그림은 많은 대중적 인기가 있어 새로운 인왕산 그림의 표상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젊은 화가들 중에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작업한 작가 임택이 있고, 수채화로 인왕산을 정겹게 그린 김태헌도 있다. 이들은 모두 인왕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거나 인왕산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에 빠져 자신들의 작업으로 환치한 작가들이이다.
 
이상의 작가들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인왕산을 소재로 작품을 하고 있다. 이렇듯 현대의 많은 작가들이 여전히 인왕산을 좋아하고 작품으로 그리는 것은 인왕산이 본래 그림의 소재로서 매력적인 산이기도 하지만,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배층을 굽어보는 장소에 있는 상징적인 장소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지정학적 모습을 보면 인왕산은 영원히 한국인의 마음속에 있을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미술가들의 중요한 작품 소재로 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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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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