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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5.03 08:15 수정 2019.05.03 08:15
야트막한 초가지붕 위로 밥하는 하얀 연기가 올라갈 때, 한 명의 사복형사와 두 명의 경찰이 들이닥쳤다.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가족들에게 경찰은 마치 저승에서 온 염라대왕 같았다. 눈을 부라리던 사복형사는 14세 소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네가 신석호 동생 순란이냐?"
"네."
"따라 와."

가족들이 말릴 새도 없이 신순란은 경찰들에게 끌려갔다. 그렇게 마을 뒷산으로 가는데 작은 오빠가 황급히 달려와 "네가 말 잘 못하면 우리 가족 다 죽는다"라고는 다시 산 아래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깊숙한 골짜기에 다다르자 경찰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오빠가 어디에 굴을 팠냐?" "오빠 밥 갖다 준 적 있지?" 쏟아지는 질문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지만 소녀가 답변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퇴학시킨다고 겁박도 했다. 하지만 뭘 알아야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결국 소녀의 입에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극도로 화가 치민 형사는 "이 지지배가 정신 못 차리네, 죽고 싶어" 하며 권총을 소녀의 목에 들이댔다. 경찰 두 명도 장총을 소녀의 목에 들이댔다. 세 정의 총구가 14세 소녀의 목을 향한 것이다.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진 소녀는 입만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돌아서." 돌아선 소녀는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집으로 돌아가." 산 날망(마루의 방언)에서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엉금엉금 기어온 것만큼은 분명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가 걱정할까봐 산에서 있었던 일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다섯 살 아기까지 끌고 간 경찰

신순란이 경찰들에게 협박 받기 약 한 달 전, 경찰들은 소녀의 초가집에 들이닥쳤다. 추석을 3일 앞둔 1949년 10월 3일이었다. 방 뒷문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자 공부를 하던 신석호가 문을 빼꼼이 열었다. 경찰들이었다. 앞문을 박차고 뛰는 순간 경찰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수갑을 채우고 밧줄로 몸을 묶었다.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러시오!" 항의하는 그에게 돌아온 것은 발길질과 뭇매뿐이었다.

마루에서 울고 있던 여동생 순란(1936년생)에게 경찰은 시끄럽다고 혼내키며, 수숫대로 마루를 내리쳤다. 신순란이 울음을 그치지 않자, 경찰은 수숫대로 소녀의 얼굴과 종아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내리치는 수숫대의 따가움과 경찰들의 기세에 눌려 순란은 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동생네 집에 가 있던 아버지 신명현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내 자식이 무슨 죄가 있는 줄 모르겠지만, 죄가 있다면 자식 대신 나를 붙잡아 가시오." "시끄러워!" 언쟁이 붙은 지 얼마 안 되어 경찰이 총구를 신명현의 목에 들이대며 "죽고 싶어?" 하며 소리쳤다. "쏘아라, 쏴!" 말대꾸가 귀찮아졌는지 경찰들은 신명현을 밀치고, 신석호(1924년생)를 끌고갔다.

어머니는 그해 추석에 송편을 빚지도 않았고, 종손(宗孫) 신석호가 경찰에 잡혀간 후부터 집에 웃음이 끊겼다. 그 뿐만 아니었다. 경찰들이 수시로 들이닥쳐 집뒤짐을 했고, 감시를 밥 먹듯이 했다. 밤이 되면 가족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말없이 눈만 감고 있는 형편이었다. 밤마다 가족들이 한 명씩 끌려가 신문을 받았다. 하루는 신석호 딸 신치수(여, 5세)가 끌려가기도 했다. 충남 공주경찰서로 다섯 살짜리 아기를 끌고 간 것이다. 경찰이 아기에게 들을 수 있는 답변이 울음 말고 무엇이 있었겠는가. 몇 시간이 흐른 뒤 순란의 숙부가 아기를 업고 왔다.

오빠는 누구였길래
 

학생 시절의 신석호 ⓒ 박만순

 
1949년 10월 12일 충남 공주경찰서에 끌려 간 신석호는 어떤 활동을 했던 인물인가? 아쉽게도 그가 어떤 사회활동을 했는지 특별한 증언이나 자료가 나온 게 없다. 판결문 역시 나오지 않았다. 다만 백범 김구의 서거 소식에 오빠가 목 놓아 울었다는 여동생 신순란(84세, 대전광역시 중구 산성동)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민족주의자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신석호가 살았던 충남 공주군 의당면 송정리는 40호가 사는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낮에는 훈장을 초빙해 청년들이 글을 배웠고, 밤에는 신석호가 중심이 되어 야학을 운영했다. 마을 아주머니, 할머니 중 글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글방을 운영했다. 그는 시간 날 때마다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직접 책을 묶기도 했다. 책을 만들 때면 여동생 순란은 먹을 가는 등의 잔일과 심부름을 도맡았다. 또한 책을 오랜 기간 보관하기 위해 책 모서리부분에 기름칠을 했다니, 신석호의 책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신순란의 증언이다.

"오빠는요, 한 번도 큰 소리를 치거나 화를 낸 적이 없어요. 저한테도 항상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그랬어요."

그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인물됨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신순란은 "낯선 분들이 찾아와서 아버지에게 석호 오빠를 국회의원에 출마하게 허락해 달라"고 했다 한다. 1948년 5월 10일 열린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공주에서 신석호를 출마시키기 위해 지인들이 나선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신명현은 단호히 거절했다. "잘난 놈이 먼저 죽는다." 아버지의 불호령에 가족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지만, 가슴에 부풀어 오른 자부심만은 어쩔 수 없었다.
 
걸레가 된 손과 피투성이 옷
 

신석호가 직접 만든 책 ⓒ 박만순


공주경찰서에 끌려간 오빠 면회를 위해 순란은 올케와 함께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경찰서까지는 20리(8km) 길이었다. 경찰서 가기 전에 있는 고모 집에 들렀다. 반가워하는 고모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지금 경찰서에 가봐야 오빠는 없다"는 말을 했다. 재소자들을 태운 GMC 트럭이 대전방향으로 며칠 전에 갔다는 것이다. 혹시나 하여 유심히 보았는데 트럭에서 용수를 잠시 올린 신석호가 고모한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는 것이다.

그해 겨울, 대전형무소에 있는 신석호 면회를 위해 어머니 이비상은 새벽차를 탔다. 몇 번 버스를 갈아타는 동안 머리에 인 보따리로 자라목이 되었지만, 아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목이 아픈 줄도 몰랐다. 보따리에는 먹을 것과 겨울 옷, 새솜을 넣은 버선이 있었다. 형무소 문이 덜컹 열리면서 면회절차에 들어갔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아들이 나타났다.

꾸벅 절을 하는 아들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이 너무나 야위었고, 뭔가 감추는 모습이 역력했다. 양 손을 뒤로 감추는 것이 아닌가.

"야. 네 손 좀 만져보자."
"아녜요. 어머니. 그냥 말씀하세요."
"아니긴 뭐가 아녀. 네 손 만져보기 전엔 한발작도 안 움직일란다."

할 수 없이 손을 내민 아들의 손은 이미 사람 손이 아니었다.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손이 걸레가 되었다. 전기고문으로 인해 손바닥과 손등 모두 갈라지고 피부가 까매졌다. 원래 입었던 옷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입었던 옷을 끌어안고 울며불며 100리(40km) 길을 걸어왔다. 도저히 맘 편안히 버스를 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도착하자마자 혼절했다.

얼마 후 대전지방법원에서 재판이 벌어졌다. 재판장이 '신석호 5년'이라고 선고를 하자 법정 안은 탄식과 울음바다로 이어졌다. 아버지 신명현은 항소를 하기로 결심하고 변호사를 사기 위해 황소 두 마리를 팔았다. 하지만 항소심을 진행하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신석호는 산내 골짜기로 끌려가 군인과 경찰에게 학살당했다.
 
괭이 메고 시신을 찾아 헤매다

집안 종손이 죽었다는 소식에 집안은 혼비백산이 되었다. 특히 어머니와 아버지는 정신줄을 놓았다. 정신을 추스른 아버지가 괭이를 메고 매일 아들의 시신을 찾으러 다녔지만 허사였다.

아버지 신명현이 기력이 빠져 돌아다니는 것을 포기하고 집 안에 누워있던 어느 날, 땅거미가 질 무렵 인민군들이 마을 우물가에 나타났다. 물동이를 팽개치고 허겁지겁 달려온 딸 순란에게 인민군 소식을 들은 신명현은 괭이를 들고 인민군에게 달려갔다. "이 놈들아. 내 자식 살려내! 네놈들이 쳐 내려오지 않았으면 울 아들도 안 죽었을 껴!" 하지만 인민군한테 분풀이를 한다고 해서 죽은 아들이 살아올 수는 없는 법이었다.

1959년경 신석호의 시신이 없는 묘가 만들어졌다. 그가 일제강점기 말 군인으로 끌려가면서 놓고 간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도 관에 넣었다. 평소 그가 애지중지한 물품들도 관속에 넣었는데, 직접 엮은 책도 포함되었다.
 

신석호 여동생 신순란 ⓒ 박만순

  
신순란은 1949년 가을부터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오빠가 잡혀가는 모습과 자신이 경찰로부터 살해 협박 당한 것을 잊은 적이 없다. 오빠가 왜 누구한테 죽었는지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눈 감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대전으로 시집 온 이후에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부모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너무나 답답한 마음에 남편에게는 오빠 이야기를 모두 했다. 그러나 남편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고, 세상사는 게 어려워 마음속에 묻어 두기만 했다.

2000년, 남편의 다급히 부르는 소리에 방에 들어가 보니 TV에 산내 골령골 위령비 제막식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다음 날 택시를 타고 산내 현장을 가니 학살 사실이 쓰여 있는 비석이 있었다. 비문을 읽으니 오빠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때까지 오빠가 언제, 왜, 누구한테 죽임을 당했는지 정확한 내용을 몰랐기 때문이다.

1년 후인 2001년 같은 날, 일찌감치 산내 현장에 갔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더니 수백 명이 모였다. 억울하게 학살당한 이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위령제가 열렸다. 이제까지 평생 울은 것보다 많은 눈물이 흘렀다. 2002년도에는 오빠의 사연을 담은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렇게 해야만 마음에 응어리 진 것이 풀릴 것 같았다.

그때부터 사는 게 사는 것 같았다. 2005년에는 <백두산문학>에 등단했고, 그해 말 시집 <눈물의 1949>를 출판했다. 시집에 실린 '입을 열어도 될까'는 열네 살부터 칠십의 나이까지 가슴속에만 묻어왔던 오빠의 사연을 공론화시킨 작품이다.
 
1949년 음력 8월 12일 밤에 책상 앞에 계시다
끌려 나가 밧줄에 꽁꽁 묶인 채
 
꿇어앉혀놓고 발길로 차곤 했다
오라버니께서 나의 잘못이 무엇이냐
 
하고 외치셨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 시 '입을 열어도 될까' 일부
 
이후 신석호 사건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대전·충청지역 형무소 재소자 사건'으로 분류되어 진실규명 되었다. 2017년 6월 27일 대전 산내에서는 '제18차 대전산내 학살사건 위령제'가 열렸다. 위령제 중간에 가수 진은설의 추모가(追慕歌)가 있었다.
 
비가 내리네 소리 없이 내리네
어머니 눈물 같아서
어머니를 불러 보네
바람이 스쳐갈 때면
어머니 한숨소리 같아
그처럼 그 소리가

- '자식 잃은 어머니의 눈물' 가사 중 일부
 
신순란이 가사를 만들고 진은설이 노래했다. 진은설은 신순란의 외손녀이다. 진은설은 노래하는 내내 외할머니 신순란의 손을 꼭 잡았다. 신순란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노랫말을 지었지만, 진은설이 부른 노래는 참가한 모든 유족들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아니, 한국전쟁으로 인해 자식을 잃은 모든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바치는 노래이자 역사에 바치는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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