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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2.21 09:36 수정 2019.02.21 09:36

세종대왕 태어난 곳 표지석 ⓒ 황정수


서울 경복궁 서쪽 지역을 보통 '서촌(西村)'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이름은 고유한 지명이라기보다는 어느 지역에나 있을 법한 지리적 방향을 따라 지은 단순한 동네 이름이다. 그런 이유로 어떤 이는 이 지역 이름이 공식적인 지명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이 지역을 조선시대에 한자로 '상촌(上村)'이라 했고, 우리말로는 '우대' 또는 '웃대'라 했으니 '상촌'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현재 이곳에 있는 한옥문화공간의 이름도 '상촌재(上村齋)'라 명명하였다. 

한편에서는 이곳이 조선시대 위대한 임금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임을 들어 '세종마을'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 이곳 사람들은 서촌을 '세종마을'이라 부른다. 세종은 아버지 이방원이 보위에 오르기 전 이 지역에 있던 '준수방(俊秀坊)'에서 태어났다. 준수방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인 한성부 북부 12방 중 하나로 지금의 통인동, 옥인동 지역이다. 

이런 이유로 현재 이 지역의 지명이나 행사에 '세종'이란 이름이 자주 들어간다. 이렇게 왕의 이름을 따서 지으려는 것은 왕의 이름을 빌려 지역의 격조를 올려보고자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서촌'이란 이름으로 익숙해져 있는데, 굳이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옳은가 싶다. 더욱이 민주화된 세상에서 군주시대 왕의 이름을 소환하는 것이 타당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본래 민중들이 가장 많이 불러왔던 '서촌'이란 이름을 쓰는 것이 가장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안평대군과 서촌

서촌은 세종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그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이 살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안평대군의 이름은 이용(李瑢)이고,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주로 '비해당(匪懈堂)'이란 호로 불린 당대의 명사였다. 세종에게는 8명의 대군이 있었는데, 그 중 안평대군이 학문과 예술 면에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이런 그의 예민하고 영민한 능력이 오히려 세상에서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없도록 하였다. 맏형인 문종과 조카 단종, 그리고 둘째 형 수양대군 사이에 벌어진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불우하게 희생되는 삶을 살고 만다. 

안평대군은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세종의 북방 개척과 관련된 업무를 맡아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으며, <치평요람(治平要覽)>, <운회(韻會)>, <의방유취(醫方類聚> 등 서적을 편찬하는 데에도 큰 힘을 더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출중한 능력을 보인 분야는 역시 예술 분야이다. 그는 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인 서예가 중의 한 명이다. 그의 글씨는 신비롭게 느껴질 정도로 높은 수준을 보였는데,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에 특히 뛰어났다. 
 

안평대군 <소원화개첩(小苑花開帖)> 2001년 도난 ⓒ 황정수


그의 이름은 국내를 넘어 중국 황제에게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세를 얻었다. 중국 황제들조차 사신들을 통하여 그의 글씨를 구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실제 중국 사신 중에 중국 황제의 요구로 안평대군의 글씨를 요청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재 안평대군의 진품으로 확신할 만한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전하는 것의 대부분은 다른 이가 따라 쓴 임모본이다. 안평대군의 진품 글씨로 완벽한 <소원화개첩(小苑花開帖)>이 전하여 국보로 지정되었는데, 2001년 도난 당해 현재는 그 소재를 알 수 없다.

안평대군은 또한 많은 서화를 수장한 미술 애호가이자 당대 서화가들을 후원한 후원자(패트론)였다. 안평대군의 주변에는 늘 학자나 서화가들이 모여 일군의 예술 애호가 모임을 이루고 있었다. 신숙주의 <보한재집(保閑齋集)> '화기(畵記)'에 따르면, 그는 200점이 넘는 귀한 서화를 수장했는데, 대부분 중국 서화가들이 그린 명품이었다고 한다. 조선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안견(安堅)의 작품만을 수장하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 당시에 조선인 화가 중에는 안견만이 중국 사람들 수준에 견줄 만한 실력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안평대군의 수성동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집 '비해당(匪懈堂)'은 서촌의 한 중심인 옥인동 수성동 계곡에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비해당'이란 말은 안평대군의 당호인데, 아버지 세종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건국 이래 장자 승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늘 피바람에 의해 정권이 양위되자 세종은 안평에게 형 문종을 잘 보필하라는 뜻으로 지어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세종의 희망과 달리 안평대군도 훗날 형 수양대군의 왕권찬탈(계유정난)에 연루되어 36세의 이른 나이에 불우한 죽음을 당하고 만다. 

'안평(安平)'이란 편안한 이름을 가졌고, 순탄한 삶을 바라는 아버지가 지어준 당호도 받았지만 운명은 그를 원하는 대로 살게 하지 않았다. 더욱이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예술을 사랑하며 지냈던 안평이었지만, 그의 뛰어난 재능은 결국 형의 권력을 향한 욕심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아쉽게도 현재 그가 살았던 '비해당'과 관련된 흔적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권신응, <북악십경 옥류동> ⓒ 김달진미술연구소


실학자 유득공의 아들인 유본예(柳本藝)가 쓴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수성동과 비해당에 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수성동은 인왕산 기슭에 있다. 골짜기 깊고 그윽해서 물 맑고 바위 좋은 경치가 있어 더울 때 소풍하기에 제일 좋다. 혹은 이 동리는 옛날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살던 터라 한다. 개울 건너는 다리가 있는데 이름을 기린교(麒麟橋)라 한다."

이 내용을 보면 현재 새로 복원된 수성동 계곡 근처가 바로 안평대군의 비해당이 있었던 곳이 분명하다. 이 근처를 그린 그림으로는 겸재 정선의 화첩 <장동팔경(壯洞八景)>이 있고, 그 안에 수성동을 그린 것이 한 폭이 있어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이후에 권신응(權信應, 1728-86)이란 화가도 이 지역을 그린 <북악십경> 10폭 병풍을 남겨 당시의 모습을 증언한다. 그 중에 한 폭이 <옥류동>인데 그림 속에는 인왕산 옥류동의 모습과 수성동의 위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왼쪽 '수성동'이라 쓴 글씨 아래 집을 그린 모습이 보이는데, 이 정도의 위치에 비해당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안평대군과 안견의 <몽유도원도>
 

안견 <몽유도원도> ⓒ 국립중앙박물관


안평대군의 미술과 관련된 최고의 사건은 단연 안견에게 <몽유도원도(夢遊挑源圖)>를 그리게 한 일이다. 안평대군은 스물아홉 살 어느 날 박팽년 등과 함께 '무릉도원'을 다녀오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본 광경이 하도 기이하고 생생하였다. 그래서 가까이 지내던 화가 안견에게 꿈속의 일을 설명해주고 그리게 한 것이 바로 <몽유도원도>이다. 그 꿈 내용을 간략히 추리면 다음과 같다.
 
"정신이 나른해지더니 꿈속에 들었다. 박팽년과 함께 한 곳에 이르니 산봉우리는 층층이 솟고,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였다.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있었으며, 좁다란 길이 숲 밖으로 갈라져 있었다. 마침 한 사람이 나타나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면 도원(桃源)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골짜기로 들어서니 마을이 툭 트여 2, 3리쯤이고, 사방에는 산이 바람벽처럼 솟아 있었다.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데, 멀고 가까운 곳의 도화 숲에는 붉은 노을이 어리비치고 있었다. 대나무 숲과 초가가 있었고, 싸리문은 반쯤 열려 있고, 흙섬돌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닭, 개, 소, 말 등은 없었고, 앞 시내에 조각배가 물결에 건들거리고 있었다. 그 정경이 쓸쓸하고 깨끗하여 마치 신선의 마을 같았다."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는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서사구조와 거의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도화원기>의 내용에 비해 우리 현실에 더욱 가깝고, 훨씬 구체적이면서 현실감 있게 느껴진다. 마치 인왕산이나 북악의 아름다운 한 자락을 보는 듯하다. 당시 인왕산 앞으로는 옥류동천이 흐르고 있었고, 산에는 봄이 되면 도화(복숭아꽃)가 가득 피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어쩌면 이 꿈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낸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봄이 되면 인왕산이나 북촌의 성북동, 창의문 밖 안산 자락에는 도화가 흐드러지게 피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안평대군의 명을 받은 안견은 꿈속의 이야기를 좋은 천에 수묵담채로 그려낸다. 안평대군이 중국의 명화를 애호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그림도 중국 화풍의 영향이 많다.

특히 안견이 그림의 토대로 삼았던 북송대(北宋代) 이후의 화풍이 진한데, 특히 곽희화풍(郭熙畵風)의 영향이 많아 보인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일상적인 두루마리 그림과 달리 왼편 하단부로부터 오른편 상단부로 대각선을 따라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왼편의 자연스러운 현실세계와 오른편에 배치된 환상적인 도원의 세계가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 것도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이다. 

안평대군의 별장 무계정사
 

무계동에서 바라본 북한산, 백악산 풍경 ⓒ 황정수


<몽유도원도>가 완성된 후 안평대군은 도성 북쪽 창의문 밖 인왕산 자락을 찾는다. 그런데 그곳이 마치 자신이 꿈속에서 보았던 무릉도원과 너무도 비슷하다고 느낀다. 그는 옥류동천을 따라 길을 걷다 마침 물줄기에 꽃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느닷없이 산자락을 따라 칡넝쿨을 잡고 바위를 집으며 한 곳에 오른다.

그곳에 서서 그 지역을 꿈에서 본 것과 비교해보니 초목이 들쭉날쭉한 모양과 샘물과 시내의 그윽한 형태가 매우 비슷했다. 안평대군은 그곳에 별장을 짓고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이름을 붙인다. '무계(武溪)'라는 이름이 바로 '무릉도원이 있는 계곡'이라는 뜻이다. 이곳이 바로 자하문 넘어 인왕산 왼쪽 언덕 부근으로, 현재 종로구 부암동이다. 
 

무계정사터 석각 <무계동> ⓒ 황정수


이곳에 가면 지금도 안평대군의 흔적이 남아 있다. 무계정사가 있었던 곳의 바위에는 '무계동'(武溪洞)이라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멀리 북한산이 보이고, 바로 앞으로는 북악의 뒤편 산자락과 안산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근래 미술 연구자들 중에는 <몽유도원도>가 상상 속의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이곳 무계동을 그린 것으로 주장하는 이도 있다. 또 어떤 이는 무계동에서 바라본 북한산에서 백악산에 이르는 산맥을 그린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안평대군과 <몽유도원도>를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생각일 것이다.

생각할수록 아쉬운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는 안견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것 중 작가가 명확히 확인된 유일한 작품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작품은 현재 한국에 전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현재 일본 천리대학(天理大學) 중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본 중요문화재 회화 제11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욱 아쉬운 것은 천하의 보물 <몽유도원도>가 한국으로 돌아올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6.25전쟁이 끝난 후 1950년대에 이 작품이 한국에 매물로 나왔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 이를 구입할 만한 한국인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를 일본 천리대학에서 사들였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때 문화재 수집가로 유명한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이 구입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당시 전형필은 <몽유도원도>가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전형필이 보기만 했어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더욱 아쉽다. 자국의 미술품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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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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