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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3.23 12:01 수정 2019.03.23 12:10
지난 2월 7일 시작한 <민족대표 33인 열전>은 이번 홍기조 지사 편을 마지막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3.1혁명 100주년을 맞아 시작한 이번 연재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민족대표 개개인의 일대기를 다루어 독자들에게 뜨거운 호응을 얻었습니다. 앞으로도 오마이뉴스는 항일독립운동과 독립선열의 삶을 제대로 알리는 데 노력하겠습니다.  [편집자말]
홍기조(洪基兆)는 1865년(고종 2년) 평안남도 용강 출신으로 홍경래의 후손이다. 자는 일지(一之), 호는 유암(遊庵)이다. 부친과 조부는 2대에 걸쳐 효자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 한학을 익혔는데 인근에서 문필대가로 불린 노옥림(盧玉琳)으로부터 한문과 필법을 배웠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던 해에 홍기조는 동학에 입교(入敎)했다. 만 21세 때였는데 입교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글 배운 지식인으로서 지역적 차별에 대한 불만과 동학의 개혁의 사상에 공감한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포교에 힘써 종형 홍기억 등을 입교시켰다.

홍경래의 후손으로 동학 입교
 

홍기조



이듬해 봄 그는 용강에서 모종의 일로 체포돼 그해 5월 기영(箕營·평양감영)에 구속되었다가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그 이듬해(1896년) 봄에도 다시 기영에 체포돼 많은 재산을 잃고 풀려나왔다. 이 일로 그의 온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그 역시 신변을 보전하기 위해 용강의 백룡동 등으로 몸을 숨겨야만 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1896년 12월에 동학 지도부와 처음으로 연락이 닿았다.

"내가 처음으로 사문에 길을 열기는 지금으로부터 33년 전 병신(1896년) 11월 17일이엿슴니다.(그 때 내 나희는 설흔 세살) 음력 동짓달인지라 날도 에지간히 차고 길도 여간 멀지가 안치만 선생님을 뵈옵고 십흔 생각이 하도 간절하야 만사를 폐해 놋코 분연히 니러나 멀니 경상도 문경(聞慶) 땅으로 선생을 히저(찾아)가게 되얏슴니다. 동행으로 말하면 종형 되시는 홍기억(洪基億) 씨와 동덕 림복언(林復彦) 씨엿슴니다.…12월 초상에야 이종훈(李鍾勳) 씨와 같이 문경을 향하여 또 떠낫슴니다. 츙주군 룽동 신접주은좌(申殷佐) 씨 댁에서 하로 밤 자고 그 다음 청안(淸安) 문의(文義)를 것쳐 회덕(懷德) 김접주텬녀(金天汝) 씨 댁에서 또 머물러 가지고 그 다음날 상주에서 김접주진우(金縉祐) 씨 댁에서 하로를 머물럿슴니다. 그리하야 맛츰내 목뎍디인 문경 은척원(銀尺院)에 니르러 남접주건칠(南建七) 씨의 인도로 그립고 그립던 해월 신사와 의암 성사 두 분을 뵈엿슴니다." ('사문에 길을 열든 때', 『신인간』 29호, 1928.11)

그는 종형 홍기억, 임복언 두 사람과 함께 경북 문경으로 가서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과 3대 교주 의암 손병희를 만났다. 두 지도자로부터 교리 등을 배운 그는 이듬해 2월 고향으로 돌아와 홍기억 등과 함께 포교활동을 벌였다. 이후 그는 동학 지도부와의 긴밀한 연락을 가졌다.

홍기조는 1896년 당시 수접주(首接主) 김유영의 관할 하에서 접주로 있었다. 접주는 적게는 2~300명, 많게는 7~800명의 연비(淵臂·동학의 제자)를 거느렸다. 접주 위에 수접주가 있고, 다시 그 위에 대접주(大接主)가 있었다. 대접주는 연비가 최소 2~3천명, 많게는 5~6천명에 달했다. 김개남, 김덕명, 손화중 등이 대접주였다.

1900년대 들어 동학 입교자가 크게 늘어났다. 그해 초 중국에서 '의화단(義和團)사건'이 발생하였으며, 평안도 지방에서는 콜레라가 창궐하였다. 게다가 서북, 즉 평안도지역에 대한 차별에 대한 불만 등이 요인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홍기조는 접주에 임명된 지 4년 만인 1900년 평안도 대접주에 임명되었다. 그는 1901년 태천의 수접주 이정점, 영변 접주 강성택·박지화, 박천접주 고강봉 등을 휘하에 두고 거느렸다. 2년 뒤인 1903년경에는 교호(敎戶) 1만호를 거느리는 의창대령(義昌大領)으로 활동하였다.

1901년 3월 동학 3대 교주 손병희는 미국행에 올랐다. 정부의 탄압을 피해 몸도 숨길 겸 신문명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경비 문제로 미국행이 좌절되자 중도에 일본에 체류하게 되었다. 다시 미국행 배편을 알아보기 위해 그해 5월 상하이로 건너간 손병희는 이 역시 좌절되자 이듬해 일시 귀국하였다.

그 무렵 동학의 교세가 날로 확장되었다. 손병희는 동학교도의 자제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선진문명을 배우게 할 계획이었다. 1902년 손병희는 1차로 전국에서 동학교인의 자제 24명을 선발하여 교토(京都)의 부립(府立) 제1중학교 등에 입학시켰다. 1904년 3월에는 다시 40명을 데려가 수학케 했다. 이 때 홍기조는 홍병기 등과 함께 손병희를 도와 이 일에 적극 협조하였다.

1904년(갑진년) 9월 손병희는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했다. 이를 통해 단발, 흑의(黑衣·개화복) 입기 등 개화운동을 전개했다. 이 때 홍기조는 평양에서 나용환, 임례환 등과 함께 이에 적극 동참하였다. 1904년 말 진보회가 송병준의 일진회(一進會)와 통합되자 홍기조는 평안도 지방에서 일진회 지방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05년 음력 11월 15일 경 홍기조는 이상헌(李祥憲)을 만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 '이상헌'은 손병희가 일본 망명시절에 사용하던 가명이었다.

교세가 커지자 천도교는 1906년 3월 전국에 72개의 대교구(大敎區)를 설치했다. 이때 홍기조는 13대교구, 나용환은 15대교구, 임례환은 25대교구 교구장에 각각 임명되었다.(대한매일신보, 1906.3.17.) 이듬해 5월 홍기조는 포교 활동에 기여한 공로로 2등 은장포증(銀章褒證)을 받고 정주순독(定住巡督)에 임명되었다. 정주순독은 교구장, 교령, 봉교 이하 교인의 진퇴와 출척(黜陟) 권한을 가진 막강한 자리였다. '출척'이란 못된 사람을 내쫓고 착한 사람을 뽑아 쓰는 것을 말한다.

1907년 10월 홍기조는 다시 교수(敎授)에 임명되었다. 1909년 5월에는 예비도훈(道訓)에 임명되었는데, 도훈이란 1백 집 이상 포덕(布德·포교)을 한 사람을 말한다. 이어 1910년 1월에는 신도사(信道師)에 임명되었다. 1910년대 당시 홍기조는 평안도 지역 천도교 고위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고향에서 도사(道師)로서 포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홍기조는 평소 우국애민(憂國愛民)의 면모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동학에 입교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구한국 정부의 폐습을 타파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가 민족대표 33인에 가담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한 계기로 인해서였다.

고종 장례식 보러 왔다가 3.1혁명과 연결

1906년 망명지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는 서울 우이동에 '봉황각(鳳凰閣)'이라는 수도원을 짓고 그곳에서 지방대표 483명을 선발하여 7차례에 걸쳐 49일간씩 수행하도록 했다. 또 전국의 교도들에게 1919년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간 연성기도회(煉性祈禱會)를 열어 미래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 큰 사건이 하나 터졌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68세로 사망하였다. 고종의 돌연한 사망을 두고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민심이 흉흉해졌다. 고종의 빈소는 덕수궁에 마련되었으며 장례는 3월 3일로 결정되었다.

'49일 기도회'가 끝난 지 이틀 뒤인 2월 24일. 홍기조는 평안도를 출발하여 25일 오후 8시 30분경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했다. 이번에 상경한 목적은 기도회 결과 보고를 겸해 고종의 국장(國葬)에도 참배할 생각이었다.

서울역에서 내려 안국동 도로를 지나던 중 홍기조는 같은 천도교인 권동진과 오세창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두 사람으로부터 "조선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것을 준비 중에 있으니 그대도 동지로써 가입하라"는 제의를 받았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한국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홍기조는 즉석에서 이 제의를 수락하였다.

이틀 뒤인 2월 27일, 그는 종로 재동(齋洞) 소재 김상규(金相奎)의 집에서 오세창·최 린·임예환·권병덕·나인협·김완규·나용환·홍병기·박준승·양한묵 등과 만났다. 이날 육당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하였다.

이튿날, 즉 거사 하루 전날인 2월 28일 밤에는 그는 손병희 집에서 열린 사전모임에 참석해 거사계획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들었다. 계획대로 이튿날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을 열었다. 그는 이 자리에 참석한 민족대표 29인과 함께 체포돼 곧바로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었다.
 

홍기조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9.22.)








체포된 후 홍기조는 미결 상태에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미결구류 360일 본형 산입)을 선고받았다. 일경의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그는 한일병탄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으며,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은 국민의 의무라고 답했다. 그의 신문조서 가운데 일부를 발췌해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문: 국권회복 계획에 대해 처음으로 어떤 사람에게서 언제 들었는가?
답: 2월 25일 오후 8시에 입경하여 안국동 도로를 지나던 중 뜻밖에 천도교의 권동진과 오세창을 만났다. 두 사람은 길가로 나를 불러 비밀히 말하기를 지금 (손병희) 선생의 발기로서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해 독립선언서 발표를 준비 중에 있으니 그대도 동지로서 가입하라고 해서 곧 승낙했다.
문: 피고는 한일합병 이래 지금까지 병합됨을 불평하고 조선의 현상에 대하여 강개(慷慨)하고 있었던가?
답: 물론 나라가 망했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천도교인은 우리들뿐 아니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조선을 독립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문: 무엇 때문에 불평인가?
답: (구)한국 정부 당시에 비하면 생명·재산 보호는 완전히 되고 있다고 하겠으나 이런 것이 좋고 나쁜 것은 관계치 않는다. 오직 자연적인 정신작용으로 독립과 자주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점이 불평이냐고 하면 합방(合邦)한 것이 불평이지 다른 것은 없다.
(3월 1일, 경무총감부에서)


문: 장래에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지금 말할 수 없다.
(3월 22일, 서대문감옥에서)


문: 어떤 이유로 조선 독립운동을 하였는가?
답: 이유는 듣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문: 그러면 무슨 이유로 참가하였나?
답: 나는 국민의 의무로써 가입하였다.
문: 피고는 현재의 (총독부) 정치에 대해 불복하는가?
답: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문: 정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남의 권유로 가입할 수는 없다고 생각되는데 어떤가?
답: 그것은 조선이 독립국이 되어야만 동양이 평화로워 질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참가하였다.
(4월 16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처음에는 서대문감옥에 수감돼 있다가 다시 경성감옥으로 이감됐다. 경성감옥(옛 마포형무소의 전신)은 당시 서울 마포구에 있었는데 홍기조를 비롯해 유여대 등 민족대표들은 이곳에 수감돼 있었다. 경성감옥에 수감돼 있던 시절 홍기조는 주로 그물을 뜨는 노역을 하였다. 특히 그는 감옥의 규칙을 잘 지켜 감옥당국이 특전을 주려고 했다고 한다.(매일신보, 1921.11.3.)

출옥 후엔 천도교 활동 매진
 







홍기조의 만기일은 1921년 11월 5일이다. 그는 이튿날(6일) 오전 10시 유여대와 함께 경성감옥에서 만기출옥 하였다. 한 신문은 이들의 날 두 사람의 감격스런 출옥 광경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지난 4일 오전에는 제1회 독립사건의 손병희 일파 열일곱 명이 출옥된 것은 이미 본지에 보도된 바이어니와 전기 열일곱 명과 함께 2년의 언도(선고)를 받았던 홍기조 유여대 양씨는 5일까지가 만기였으매 5일 오후에 난모전(蘭牟田) 경성감옥 전옥(典獄·교도소장)의 유고(諭告)를 받고 출옥 준비를 하고 있다가 6일 오전 10시에 오랫동안 신음하던 철창 밑을 떠나서 반가운 눈물을 흘리면서 옥문 밖에 나왔는데 고우친척(故友親戚)의 다수한 사람들이 자동차를 불러가지고 옥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두 사람이 창백 색의 얼굴빛에 간수가 열어주는 옥문으로부터 한 발자취를 내여 놓자마자 서로 앞을 다투어 그리웠던 얼굴을 서로 대이며 수척한 손길을 마주잡고 뜨거운 동정의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면서 좌우로 옹호하여 자동차에 태운 후에 옥중에서 고통 되던 일을 눈에 보이는 듯이 듣고 말한 후 두 사람은 먼저 자동차로 각각 집으로 돌아갔고 영접 갔던 사람들은 옥중에서 무상한 고통을 받던 말을 듣고는 쓰린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각각 전차로 시내에 향하였는데 경성감옥의 근처 되는 공덕리(현 서울 마포구 공덕동) 전차길 좌우에는 촌민들이 사람바다[人海]를 이루었다." (매일신보, 1921.11.7.)

출옥 후 홍기조는 다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1922년 1월 17일 천도교 종법원(宗法院) 종법사(宗法師)에 임명돼 강원도 교구 순회 임무를 맡았다. 1925년 10월 현재 본적지(평안남도 용강군 오신면 하양리 749번지)에 거주하면서 천도교 진남포종리원 종리사로 활동하였다. 10월 4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당시 그는 아들과 함께 소작을 하면서 지냈는데 생활은 그리 궁핍하지 않았다고 한다.
 

홍기조 근황보도(동아일보, 1925.10.4.) (동아일보)








1925년 12월 25일 서울 종로 경운동 소재 천도교당에서 종리사(宗理師) 총회가 열렸다. 앞서 8월 15일 열린 임시총회는 오영창(吳榮昌) 등이 혁신 이전의 옛날 방식, 즉 복구제(復舊制)를 주장하면서 회의가 무산됐다. 재차 열린 12월 25일 총회에는 지방 종리사 79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는 회의방식, 예산, 종리사 임기 등 총 7개항이 결정되었다. 홍기조는 이날 임례환, 나인협 등과 함께 종법사로 선임되었다.

홍기조는 말년에 수년간 병으로 고생하다가 1938년 7월 6일 74세로 별세하였다. 임종하기 직전 그는 문도 정창운(郭昌運)에게 "내가 이제는 세상 떠날 날이 멀지 아니하였으니까 다시 만나볼 것 같지 못하네. 그대네는 아무쪼록 천도교를 위하여 일 많이 하게!"라는 말을 남겼다.

1962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홍기조의 묘소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90
- 홍기조, '사문에 길을 열든 때', <신인간> 29호, 1928.11
- 조규태, '3·1운동과 천도교의 민족대표 최린·홍기조·임례환'. <제5회 '민족대표 33인의 재조명' 학술회의 논문집>, 2006.3.15
(그밖에 대한매일신보, 매일신보, 동아일보 등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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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