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22 15:35최종 업데이트 19.03.22 15:35
33인 가운데는 무관 출신이 두 사람 있다. 권동진과 홍병기가 그 주인공이다. (구한국 정부의 시위대 부교(副校·중사)를 지낸 이필주까지 포함시키면 3명임) 홍병기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무예를 닦았다. 19세 때인 1887년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그 후에도 무관(武官)으로 활동했는지 여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1894년 농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경기도 여주에서 기포(起包)하였다. 기포란 동학농민전쟁 때 농민 등이 동학의 조직인 포(包)를 중심으로 봉기(蜂起)한 것을 일컫는다. 그는 손병희 휘하에서 무장, 영동, 보은, 음성, 공주 우금치전투 등에 참가하였다. 그는 천도교 중앙총부의 고위 간부이자 항일 독립투쟁가로 일생을 살았다.

무관 출신의 천도교 장로
 

홍병기

 홍병기(洪秉箕)는 1869년(고종 6년) 경기도 여주에서 홍익룡(洪益龍)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운회(運晦), 도호(道號)는 인암(仁菴)이다. 서자로 태어난 그는 신분차별로 인해 청년기에 번민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24세 되던 1892년 동학에 입교했는데 이는 당시 시대상황과 개인적 고민 등이 계기가 된 듯하다.

동학에 몸담은 후 그는 고향인 여주지역에서 포교활동을 하면서 접주로 성장하였다.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2대 교주 최시형의 명을 받고 여주에서 임학선(林學善)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 당시 그의 휘하에는 수십여 명의 교인들이 있었다.


1894년 10월 휘하의 교인들을 이끌고 경기도 편의장(便義長) 이종훈(李鍾勳), 편의사(便義司) 이용구(李容九)의 지휘를 받아 손병희가 이끄는 충의포(忠義包)의 도소가 위치한 충주군 황산(黃山)에 도착하였다. 당시 황산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수만 명에 달했다. 그는 이종훈 등의 지휘를 받으며 충주에서 삼남선무사(三南宣撫使) 정경원(鄭敬源)이 이끄는 500명의 관군 등과 대치하였다.

충주군 무극(無極)시장을 거쳐 보은군 장내리로 향하던 그는 충북 괴산에서 관군과 합세한 일본군 수백 명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이 충주 방면으로 퇴각하자 그는 농민군과 괴산읍내에 들어가 하룻밤을 보내고 보은군 장내리로 이동하였다. 이곳에 모인 농민군은 중진(中陣)·선진·후진·좌익·우익 등으로 재편되었다. 손병희는 중진의 통령(統領)을 맡아 농민군을 총지휘하였는데 그는 손병희의 중진에 편제되었다.

이후 그는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군의 일원으로 공주에서 일본군 및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 농민군이 공주에서 패배한 이후에는 손병희 등과 함께 전주, 금구, 장수, 무주, 금산, 영동, 청주, 충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일본군의 우수한 화력에 밀려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그는 손병희·이종훈 등과 최시형을 모시고 강원도로 피신하였다. 1898년 최시형이 관군에게 체포되자 손병희·김연국 등과 함께 최시형 구출작전을 세웠으나 뜻을 이루진 못했다.

2대 교주 최시형이 관군에게 붙잡혀 처형되자 동학은 한동안 김연국·손병희·손천민의 3두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후계자 선정과 도통(道統) 문제를 놓고 천도교 내부에서 논란이 생겨났다. 이때 그는 손병희를 지지하였다. 논란 끝에 1900년 손병희가 3대 교주로 동학의 도통을 이어받자 그는 편의장 직책과 대정(大正)이라는 원직을 받았다. 얼마 뒤에는 손병희로부터 인암(仁菴)이라는 도호(道號)도 받았다. 이후 그는 손병희의 최측근이자 동학 내의 중견인물로 성장하였다.

1901년 손병희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목적은 정부의 동학 탄압을 피해 도피할 겸 선진문명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당초 목적지는 미국이었다. 유길준이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펴낸 <서유견문>을 읽고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중도에 경비 문제로 일본에 눌러앉게 되었다. 손병희는 현지에서 박영효,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동학의 개화운동을 꾀하였다. 얼마 뒤 동학 교인들의 자녀들을 일본으로 불러 공부시킨 것도 이 일환이었다.

1903년 손병희는 일본 육군참모부의 차장 다무라(田村怡興造) 등과 제휴하여 친러파 내각을 붕괴시킨 후 대한제국을 개혁하려는 거사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다무라의 급작스런 사망과 손병희의 동생이자 동학 측 연락원이던 손병흠(孫秉欽)의 급사 등으로 인해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당시 홍병기는 일본을 오가며 손병희의 명을 받아 시행하였다.

이듬해 4월 홍병기는 임예환·이종훈·나용환·나인협 등 동학 지도자들과 함께 도쿄에 가서 손병희를 만났다. 이때 손병희는 이들에게 국내에 돌아가 민회(民會)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홍병기 일행은 서울로 돌아와 대동회(大同會)라는 이름의 민회를 조직하여 전국에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후 민회의 명칭을 중립회(中立會)로 바꿨는데 이는 당시 대한제국의 중립화를 주장하던 친러 내각을 지지하는 듯한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결국 그해 10월 '진보회'라는 다시 바꾼 후 동학교인들에게 단발과 함께 흑의(黑衣·개화복)를 입도록 권장하였다. 소위 '갑진(甲辰)개화운동'이 그것이다. 손병희는 이를 통해 근대문명을 수용하고 민회를 조직해 근대국민국가를 설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진보회 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책임자로 있던 이용구(李容九)의 배신 때문이었다. 그는 개인적인 이권을 위해 진보회를 친일단체인 송병준(宋秉畯)의 유신회와 통합시켜 일진회(一進會)를 발족하였다. 이로 인해 동학이 친일단체로 오해 혹은 매도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간판을 바꾸었다. 1906년 1월 5일 귀국한 손병희는 이용구와 그 휘하의 62명을 출교(黜敎) 조치하였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일진회에서 탈퇴하라고 지시했다.

동학이 천도교로 거듭난 후 홍병기는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주요 교직자로 활동하였다. 1906년 2월 10일 도집(都執)이란 원직(原職)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현기사(玄機司) 고문과원(顧問課員), 이문관장(理文觀長), 경도사(敬道師) 및 직무도사(職務道師), 전제관장(典制觀長), 대종사장(大宗司長) 등에 임명돼 교제 정비와 포교 확대, 교회 정비작업 등을 맡아 처리했다. 1905년 말부터 1919년 3.1혁명 발발 이전까지 그는 천도교 중앙총부의 핵심간부로서 활동했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 대로 독립운동을 할 것"

1910년 나라가 망한 이래 그 역시 여느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총독부의 식민정책에 대해 불만과 불평을 갖고 있었다. 특히 그는 총독부의 한국통치 방식과 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그는 평소 조선의 독립과 국권회복을 절실히 염원하였다. 그의 애국심에 불을 지핀 것은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윌슨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였다.

그 무렵 천도교에 합류한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이 손병희와 함께 조선의 자치 혹은 독립을 획득하려는 운동을 벌였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이 일에 적극 동참하였다. 1919년 1월 상순, 그는 권동진을 만나 독립운동을 하려면 동지를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해 2월에는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권동진을 만나 독립운동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권동진이 이에 찬성하자 그는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 추진을 권유하였다.

2월 25일경 두 사람은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다시 만났다. 그때는 이미 독립선언이 마무리 단계에 와 있던 시점이었다. 권동진은 동지 모집과 독립선언서 인쇄 및 배포가 준비돼 있다고 상황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권동진은 그에게 민족대표로 참가할 것을 권하였다. 그는 즉석에서 승낙하였다.

거사를 코앞에 두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2월 27일 오후 2시경, 그는 종로 재동 김상규의 집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와 일본정부에 보내는 건의서에 서명하고 날인하기로 돼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천도교 측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건의서에 서명하고 날인하였다.

거사 전날인 2월 28일 오후 5시경, 그는 손병희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천도교 대표인 권동진·오세창·최린·권병덕, 불교 대표 한용운, 기독교 대표 등 10인을 만나 독립선언식 개최 등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선언식 개최 장소를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으로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초 예정했던 파고다공원 개최할 경우 일경과의 충돌로 인한 시민들이 피해를 우려해서였다.

마침내 3월 1일이 밝았다. 오후 2시, 그는 태화관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열었다. 불교 대표 한용운이 인사말을 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그도 다른 민족대표들과 같이 만세를 삼창하였다. 선언식이 끝날 무렵 일본 관헌이 출동하여 참석자들을 전원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하였다. 이날로 그를 포함해 민족대표 전원에게 고난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홍병기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9.22.)

 
일제 당국의 조사과정에서 가혹한 취조와 심문을 받았으나 그는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서대문감옥에서의 심문 때 가와무라(河村靜永) 검사가 "앞으로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고 묻자 그는 "그렇다. 기회가 있는 대로 계속할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답했다. 당초 일제는 손병희 등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 등 48명을 '내란죄'로 기소하였다. 그러나 중도에 일제의 유화정책으로 죄목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바뀌었다. 그의 신문조서 가운데 일부를 발췌하여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문: 앞으로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그렇다. 기회가 있는 대로 계속 할 것이다.
(3월 20일, 서대문감옥에서)

문: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은 손병희와 권동진이 권고하여 참가한 것이지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답: 그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문: 피고는 무슨 일로 이 기회에 조선독립을 계획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나?
답: 원래 조선은 4천년의 역사가 있는 나라로서 하루아침에 남의 나라 영토가 된 것을 나는 항상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즉 민족자결이란 문제가 제창됨에 따라 이때 독립을 계획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문: 그러면 피고는 일본 정치에 대해 불평을 품고 있는가?
답: 불평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점차 조선민족을 망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조선인에 대해서는 권리라든가 대우를 해주지 않고 또 교육 정도가 일본보다 낮은 식민지 교육을 하고 있다.
문: 조선인에게 동등한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일에 동등하지 않다는 것인가?
답: 같은 학력을 가졌다 할지라도 조선 사람은 일본사람 아래의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그 하나요, 경제적으로도 모든 것이 일본사람보다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문: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조선독립의 목적을 이룰 것인가?
답: 2월 26일 권동진이 나에게 독립선언서를 수 만매 인쇄하여 경성과 각 지방에 배포하여 인민에게 널리 알리고 또한 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나 조선총독부에 제출한다고 해서 찬성하였다.
(4월 19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최종 판결은 수감된 지 1년 반도 더 지나서 났다. 경성복심법원은 1920년 10월 30일 48명에게 판결을 내렸다. 홍기조는 이날 재판에서 징역 2년(미결구류 360일 본형 산입)을 선고받았다. 손병희 등 주모자들이 받은 징역 3년에 비하면 적은 형량이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공덕리(현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경성감옥에 수감되었다. 2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1921년 11월 4일 만기출옥 했다.

고려혁명당 사건으로 또 옥고... 불의의 사고로 운명
 

독립선언서 사건의 손병희 등 48인 기소장 ⓒ 독립기념관

 
출옥 후 홍기조는 천도교 혁신에 앞장섰다. 당시 천도교는 교주 1인 중심의 독단적 운영체제였다. 그는 1922년 말부터 오지영, 자신의 사위 최동희 등과 함께 천도교 집행부를 비판하며 천도교 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1월 14일 의정원(議正院)의 중의(衆意)에 따라 교회 책임자를 선출하고 교회를 운영하는 의정원제(議正院制)로 혁신하였다. 새 제도가 실시된 직후인 1922년 1월 17일 그는 이종훈·권동진·이병춘·임례환·홍기조 등 17인과 함께 종법사(宗法師)에 선정되었다. 이와 함께 포교 담당부서인 포덕과(布德課) 주임으로도 임명되었다.

그런데 1922년 4월 22일 돌연 그는 포덕과 주임에서 해임되었다. 이는 천도교가 손병희의 명령으로 옛 제도로 환원한 것과 관련이 있었다. 이 일로 천도교 혁신운동이 좌절되자 그는 오지영 등과 함께 1922년 12월 천도교에서 떨어져 나와 천도교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천도교연합회는 절대적 평등과 개인의 수양을 지향하며 만주에 공동체를 설립하여 공동경작을 하기도 했다.

천도교 혁신에 앞장서다 주류에서 배척당하기도 했지만 그의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무대를 만주로 옮겨 새로운 항일투쟁에 나섰다. 1922년 7월 홍병기는 새로운 독립투쟁의 한 방략으로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위원회는 조선의 독립과 사회혁명을 추구하였다. 이종훈은 고문, 그는 위원장을 맡았다.

일제 치하의 조선 땅에서 고려혁명위원회가 활동하기에는 제약이 많았다. 위원회는 외교부장 최동희 등이 연해주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후원을 얻기로 하였다. 그 일환으로 1924년 4월 천도교비상혁명최고위원회를 재조직하였는데 홍병기는 이 위원회에 집행위원장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그 무렵 소련은 일본과의 밀약을 맺고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소련 땅에서 추방하였다. 이 때문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도움을 얻어 독립운동을 하려던 고려혁명위원회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최동희는 1925년 2월 중국 길림으로 건너와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도 여의치 않았다. 이른바 '미쓰야협정(三矢協政)' 때문이었다. 중국 봉천의 군벌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三矢宮松)와 밀약을 맺고 중국 내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이 일로 만주지역 항일단체들의 무장투쟁 활동이 위축되었고, 독립군의 국내 잠입활동도 크게 감소하였다.

결국 독립운동 진영은 공동으로 연합전선을 펴기로 했다. 만주의 정의부(正義府), 천도교연합회, 형평사(衡平社)가 삼각동맹으로 고려혁명당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최동희는 1926년 2월 길림에서 정의부의 양기탁 등과 함께 고려혁명당 발기회를 갖고 조직방법, 선언과 강령, 규칙 제정, 특파원의 파견, 창립대회 소집 건 등을 협의하였다. 3월 29일 고려혁명당이 정식으로 창당되자 홍병기는 고려혁명당 가입을 승낙하였다.

고려혁명당은 만주와 상해를 무대로 새로운 형태의 독립투쟁을 벌이고자 했다. 홍병기의 그런 꿈은 뜻밖의 사고로 또다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해 연말 고려혁명당 중앙집행위원 이동락(李東洛)이 장춘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이동락은 당의 선언서, 강령, 당략, 규약, 맹약 등 다수의 기밀문서를 갖고 있었다. 이 일로 당 조직이 탄로가 나고 당원 다수가 체포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듬해 1월 19일 홍병기마저 신의주경찰서에서 출장을 나온 한 경부보(警部補)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당시 그는 만주에 체류하고 있었다.
 

고려혁명당 사건 재판광경(매일신보, 1927.12.22.) (매일신보)

 
이들에 대한 재판은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맡았다. 당시 독립운동가 변론을 맡기로 유명했던 이인(李仁)과 현지 변호사 2명 등 총 3명의 변호사가 변론에 나섰다.

1927년 12월 1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고려혁명당 사건 관련자 15명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재판 초기에 재판장과 피고들 간에 작은 입씨름이 있었다. 감기에 걸린 피고가 외투를 입고 출정하자 규칙에 어긋난다며 이를 벗느냐 마느냐를 두고 말다툼을 벌였다. 또 재판장이 피고들에게 '오마에', 즉 '너'라고 부른 것도 말썽이 됐다.

논란 끝에 이윽고 재판장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이동락과 형평사 소속의 이동욱·송헌 등에 이어 홍병기 차례가 되었다.

"직업이 무엇인가?"
"천도교 종리원 종법사요"


재판정 소식을 전한 <매일신보>(1922.12.22.) 기사에 따르면, 당시 홍병기는 갈색 머리에 얼굴은 분홍색이었다. 또 회색 두루마기 차림에 왼편 가슴에는 '601호'라는 표 딱지를 달고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53세였다.

다른 피고들 심문에 이어 다시 홍병기 차례가 되었다. 재판장이 그에게 물었다.

문: 치안 보안 위반으로 대정 9년(1920년)에 복역한 사실이 있었나?
답: 있소.
문: 대정 15년 3월경 길림으로 이동구(李東求)가 경성 형평사에 와서 장지필 조귀용 등과 경성부 와룡동 천도교연합회 사무소에서 송헌 등과 만났는가?
답: 고려혁명당 조직에 관해서는 말한 것도 없거니와 듣지도 못하였소.
문: 대정 15년 3월경 김봉국 리동탁을 길림에 보낸 일이 있었나?
답: 김봉국을 보냈소. 천도교 2백여 호가 만주로 이주하기에 길 안내로 보냈소.


총 여섯 차례의 공판을 마치고 1928년 4월 20일 피고인 15명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다. 검사가 사형을 구형한 정원흠(鄭元欽·정이형의 다른 이름)에 대해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이원주·방찬민은 각 8년, 이동구는 7년, 김봉국·이동락은 각 6년, 홍병기와 이동욱에게는 각 4년을 선고하였다. 장지필과 조귀용에게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하였다. 13명 가운데 최고형을 받은 정원흠을 제외하고는 모두 구류 150일을 형기에 산입한다고 밝혔다. (매일신보, 1928.4.22.)

그해 10월 18일 평양복심법원 판결에서 홍병기는 징역 2년(미결구류 200일 형기 산입)의 형을 받았다. 홍병기는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9년 7월 5일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홍병기는 동대문 밖 손병희의 사저 상춘원(常春園)에서 늦게 얻은 아들 영섭(榮燮)과 함께 지냈다. 그런데 이듬해(1930년) 국치일 무렵 아들 영섭이 모 사건의 범인으로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돼 신문 사회면에 이름이 올랐다. 당시 22세의 영섭이 국치일(8.29)을 전후해 서울시내 숭인동에 '불온한' 격문을 붙이다 붙잡혔다. 취조과정에서 영섭이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홍병기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시선을 끌었다. (매일신보, 1930.9.11.)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나 할까.

해방 후 홍병기는 삼일동지회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백범 김구 등 임정요인들이 충칭에서 환국하자 그는 삼일동지회의 일원으로 독립촉성 선서식을 거행하였다. 또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봉대(奉戴·공경하여 받듦)를 천명하였으며, 임정 계열 인사들이 참여한 한국독립당을 지지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동학혁명의 정신을 널리 전파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홍병기 묘소(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 33인유족회

 
1949년 당시 홍병기는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 128번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해 1월 17일 오후 1시 40분경, 행당교를 지나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군악대원을 실은 트럭에 치여 그의 왼쪽 다리가 절단되고 머리에 심한 타박상을 입었다. 즉시 국방부 제2육군 병원으로 호송하여 치료를 하였으나 중상인데다 워낙 고령이어서 위독한 상황이었다. 사고를 당한 지 9일 뒤인 1월 26일 오후 8시 15분, 홍병기는 만 80세로 별세하였다. 장례식은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교회장으로 거행되었다. 장지는 망우리.

1962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1966년 서울 동작동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18번)으로 이장하여 새 묘소가 마련됐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90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홍병기 편', 2009.3
- 조규태, 3·1독립운동과 천도교계의 민족대표-박준승·홍병기·나용환의 활동을 중심으로, <제5회 '민족대표 33인의 재조명' 학술회의 논문집>, 2006.3.15, 서울프레스센터.
- 조규태, '동학인 홍병기(洪秉箕)의 종교적 활동과 민족운동', <한성사학> 제24집 (2009. 2), 한성사학회
(그밖에 매일신보, 동아일보 등 기사 참조)



3.1 혁명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정운현 지음, 역사인(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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