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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3.13 09:56 수정 2019.03.13 09:56
박동완(朴東完)은 1885년 12월 27일 경기도 포천에서 박형순(朴馨淳)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함양박씨 지평공파 중 판서공파 26세손으로 그의 집안은 양반관료 가문이었다. 그의 호는 근곡(槿谷)인데 무궁화가 피어난 골짜기, 즉 삼천리 우리 강토를 상징한다. 5세 때부터 독선생을 들여 한문공부를 했으며, 13세 때 현석운의 딸 현미리암과 결혼하였다. 10세 이전에 부친을 따라 온 식구가 서울로 이사하여 누각동(현 종로구 누하동)에 자리를 잡았다.

양사동소학교에 입학하여 신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는 관립 고등소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한성중학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고종 32년(1895년) 통역관 양성을 위해 관립 외국어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는 이 학교의 후신인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진학하여 3년간 수학하였다. 한일병탄 이듬해 1911년 9월 조선교육령 공포로 이 학교가 폐쇄되자 그는 배재학당 대학부로 전입하였다. 1912년 말에 배재학당 대학부가 폐쇄되자 1913년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에 입학하여 1~2년간 수학하였다.

<기독신보> 창립멤버로 활약

 

박동완

이후 그는 〈기독신보(基督申報)〉 창립멤버로서 서기(편집위원)로 취직하였다. 1915년 12월 7일 창간된 <기독신보>는 감리교와 장로교가 연합으로 발행하였는데 당시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언론매체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기독신보>는 일제강점기 초기 한국인의 언로가 막힌 상황에서 한글로 발행된 유일한 민족 언론이었다. 그는 시, 시조, 산문, 감상록 등의 문학작품과 취재기사 및 사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글을 발표한 문필가이기도 했다.

배재 시절 기독교에 입문한 그는 정동제일교회 전도사로도 활동하였다. 그 무렵 그는 정동 제일교회 출신의 최병헌·현순·손정도·이필주 목사 등과 교류하면서 민족주의적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국제정세에 대해 이해가 깊었다. 1919년 1월경 그는 신문을 통해 윌슨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를 접하고는 깊이 공감하였다. 그는 이런 기회에 조선도 일제 통치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런 와중에 박희도를 통해 민족대표로 참여하게 됐다.

그해 2월 20일경 YMCA 간사로 있던 박희도가 종로2가 <기독신보> 사무실에 들렀다. 그는 박희도와 대화중에 평소 자신이 갖고 있던 조선독립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박희도는 그 자리에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서로 공감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박희도는 기독교 측 인사들의 연락책을 맡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2월 27일 박희도가 그를 찾아왔다. 당일 낮 12시에 이필주 목사 집에서 총독부에 건의할 서류에 서명을 할 예정이니 참석하라고 일러주었다. 그 시각에 맞춰 이필주 집으로 갔더니 박희도, 이갑성, 함태영, 최성모, 오화영, 이승훈 등이 모여 있었다. 그를 포함해 참석자 모두 그 자리에서 총독부에 제출할 건의서에 첨부할 문건에 서명 날인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막차로 33인 대열에 오른 셈이다.

거사 전날인 2월 28일, 박희도가 당일 밤 8시에 손병희 집에서 마지막 모임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날 모임에는 서명자 대다수가 참석하였는데 박동완도 참석하였다. 당초 독립선언서 발표 장소는 탑골공원이었다. 그러나 자칫 소요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꾸었다. 3월 1일 그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가진 후 일제 관헌에 체포돼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됐다.

 

박동완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9.25.)

 
경찰 취조와 재판과정에서 그는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보였다. 연행 당일 경무총감부에서의 취조 때 일본인 순사가 '일본의 시정(施政)이 싫어서 독립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닌가?'라고 묻자 그는 '일본의 정치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답했다. 또 5월 2일 열린 경성지방법원 공판에서 재판장이 '정치에 대해 불평불만이 있느냐'고 묻자 '아무 불평도 없지만 단지 민족자결이라는 것이 제창되었으므로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고 답했다.

그러나 3월 18일 취조 때 '앞으로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단호히 '물론 그렇다'고 답했다. 8월 26일 고등법원 재판 때는 민족자결에 대한 뚜렷한 신념과 독립의지를 피력하였다. 한 대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문: 피고들이 말하는 민족자결은 어떤 의미인가.
답: 자기의 나라를 자기가 다스려가는 것이 민족자결이라고 생각한다.
문: 선언서를 발표하는 것이 피고의 소위 민족자결에 해당한다는 의사가 아닌가.
답 아니다. 그렇지는 않다.
문: 독립한다는 의사를 발표하는 것이 민족자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답: 나는 조선민족이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독립시키고, 그렇게 승인 받는 것이 민족자결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나는 독립하는 것이 민족자결이 아니라 독립을 하면 그것이 민족자결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문: 요컨대 열국의 힘을 빌려서 일본을 움직여 조선의 독립을 기도한다는 취지가 아닌가.
답: 그렇지는 않다.
문: 그러면 미국 대통령 또는 열국 대표자에게 청원서를 보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답: 그것은 단순히 열국에게 조선이 독립을 선언했다는 것을 알리는 통고에 지나지 않는다.
문: 그러면 독립을 선언하기만 하면 벌써 독립한 것이 되는가.
답: 그렇다.
문: 그러면 3월 1일로써 조선은 독립되었고 자주민이 되었다는 것인가.
답: 그렇다.
문: 그렇다면 피고의 민족자결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답: 나는 그런 식으로 하여 독립하고 그리고 뒤에 우리들이 우리들의 나라의 정치를 하는 것이 민족자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경성복심법원은 1920년 10월 30일 최종판결을 내렸다. 그는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막차'로 참여한 데 비하면 무거운 형량이었다. 그는 마포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1월 4일 만기출옥 하였다. 출옥 후 그는 전에 근무하던 〈기독신보〉의 주필이 되어 신문 편집을 계속하였다.

 

민족대표 공판 장면(동아일보, 1920.7.13)

 
그는 또 대외활동에도 열정을 쏟았다. 1923년 YMCA 이사로 취임하여 소년부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또 그해 1월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열린 조선물산장려회 제1회 총회에서 백관수, 이갑성 등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었다. 1925년 3월에는 전(全)조선기자대회 준비위원회의 서무부 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기독신보>에는 1924년 5월까지 근무하였다. 그해 7월 기독교 월간지 <신생명(新生命)>의 주간으로 옮겼다. 이 잡지는 외국 선교사들이 독점해온 기독교 문서운동을 극복하기 위해 민간에서 출자한 창문사(彰文社)에서 발행하였다. 편집노선은 종교적으로는 진보적, 사회적으로는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었다. 그러다 보니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져 결국 이듬해 4월 폐간되었다. 이후 그는 한때 서울 동소문 안에 '경성공업사'라는 회사를 차려 한동안 개인 사업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교계 등과 완전히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그는 기독교계 비밀결사체인 흥업구락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흥업구락부는 이승만의 친위조직인 미주 동지회의 자매단체로 1925년 3월 22일 서울 사직동 신흥우의 집에서 결성됐다. 그는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유억겸, 이갑성 등과 함께 창립멤버로 참여하였다. 흥업구락부는 1938년 5월 안재홍 등 간부 회원 60여 명이 일제에 검거되면서 된서리를 맞았다. 신흥우 등 대다수 간부는 일제에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풀려났다. 당시 박동완은 미국에 체류하고 있어서 소위 '흥업구락부 사건'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재만동포 구호사업에 앞장

3.1혁명 후 일제의 문화통치 전략으로 국내의 민족진영은 전선이 분열되었다. 특히 자치론·참정론 등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민족진영 내부는 분화하였다. 이때를 기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세력과 손잡고 1927년 2월 신간회를 발족시켰다. 사상 첫 좌우합작 단체인 신간회는 출범 직후부터 국내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 박동완은 조만식, 유억겸, 이갑성, 이승훈 등과 함께 기독교계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총무간사를 맡아 실무를 챙겼다.

 

재만동포 현지조사 관련보도(조선신문, 1928.2.9.)

 
이 무렵 그가 중점을 둔 사안은 재만(在滿)동포 구호사업이었다. 당시 만주에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상당수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낯선 이국땅에 새 둥지를 튼 이들은 현지의 중국인 관리와 지주들의 착취와 부당한 박해에 시달렸다. 1927년 한 해만도 주거권 박탈 94건, 소작권 박탈 14건, 불법징세 14건, 이주허가증 박탈 7건, 강제입적 및 풍속변경 42건, 아동교육 방해 6건, 불법체포 및 불법과료 3건 등 총 181회의 피해사례가 보고되었다.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각계대표 백여 명은 '재만동포옹호동맹'을 결성하였다. 위원장은 민세 안재홍, 중앙상무위원은 박동완 외 11명으로 구성되었다. 옹호동맹은 1927년 12월 1차로 성명서를 낸 데 이어 이듬해 1월에는 현지에 실태조사반을 보내기로 했다. 상무위원으로 있던 박동완과 이도원(李圖遠) 등 두 사람은 1928년 1월 17일 만주 봉천으로 특파되었다. 이들은 3주일간의 현지조사를 마치고 2월 7일 서울로 돌아왔다.(동아일보, 1928.2.8.) 귀국 후 이들은 보고회를 통해 참상을 알리는 한편 중국 입적(入籍)문제 해결 및 구호금 모금 등에 나서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박동완은 일제의 주목을 끌게 됐고, 감시는 더욱 강화되었다. 더 이상 국내에서는 활동을 하기가 어렵게 되자 그는 해외 망명을 추진하였다. 그때 선이 닿은 사람은 하와이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던 감리교의 민찬호·임두화 목사였다. 이들의 초청으로 박동완은 1928년 8월 25일 하와이로 떠났다. 박동완은 두 사람의 도움으로 하와이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K.C.C.)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1930년 3월 '하와이 한인협회'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하와이로 망명... 한글학교 운영

박동완은 목회활동 외에도 교회에 부설 한글학교를 세워 교민 2세들에게 한국의 역사, 문화 등을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그는 1년 후 그의 한글학교를 하와이 오하우 섬에서 가장 큰 한글학교로 발전시켰다. 실제로 그의 교육을 받은 한글학교 학생들은 대학 진학률이 높았으며 사회 각계각층의 지도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무엇보다 후대의 교육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였다.

한편 그는 1930년 고문 후유증과 열악한 환경으로 뇌경색에 걸리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끼니를 거르면서까지 고국에 보낼 독립운동 자금을 교인들과 함께 어렵게 만들어 보냈다. 1931년에는 하와이 학생모국방문단을 이끌고 일시 귀국하였다. 6월~9월까지 석 달간 서울에 체류하면서 YMCA 회관 등지에서 하와이 동포의 근황과 신앙생활을 알리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1934년 7월 박동완은 하와이에서 <한인기독교보>를 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신생명>이 폐간된 지 꼭 10년 만이었다. 창간호 편집후기에서 그는 "10년 만에 다시 글을 쓰려고 붓대를 잡으니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교차한다"며 소회의 일단을 피력하였다. 그는 또 한인기독교회 이사를 맡아 교민사회의 단합을 위해서도 힘썼다. 당시 하와이 한인사회는 동지회와 국민회로 나뉘어 갈등이 심했다.

1938년 8월 오랜 동안 대립관계에 있던 국민회와 동지회가 합동으로 제28주년 국치기념대회를 거행했다. 이때 그는 주(主) 연사로 나서는 등 양측의 통합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애썼다. 하와이 시절 그는 정치운동보다는 기독교 활동에 주력하였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조국의 독립과 교민들을 위해 헌신하던 그는 1941년 초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됐다. 이승만 정권 때 주미대사를 지낸 양유찬 박사의 개인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그해 2월 23일 결국 타계하였다. 향년 57세였다. 장례는 3월 1일 오후 하와이에서 각 단체 연합의 사회장으로 치렀다.

 

박동완 부음기사(신한민보, 1941.3.27.)

 
그의 부음 소식은 하와이 교인언론인 <신한민보>와 <태평양주보>에만 실렸다. 국내 언론에는 단 한 줄도 보도되지 못했다. 일제의 방해로 국내에서는 부고조차 실을 수 없었다.

그의 유해는 한 달 뒤 가족들이 국내로 모셔와 3.1혁명 동지인 함태영 목사의 집례로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고, 1966년 묘소를 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3.1혁명 이후로 그는 한복을 입었으나 바지에 대님을 매지 않았다. 조국이 독립되기 전에는 대님을 매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또 평소 시계를 항상 30분을 늦춰 놓았다. 이는 일제가 정한 표준시각에 맞춰 살지 않겠다는 신념의 표시였다고 한다. 그는 비타협적 자세로 민족 구원의 외길을 걸은 종교인, 언론인이자 불굴의 독립지사였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90
-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한국감리교인물사전>, 기독교대한감리회, 2002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박동완', 2008.12
- 황민호, '박동완의 국내 민족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3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8
- 임미선, '민족대표 근곡 박동완의 생애와 기독교 민족운동 연구',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6
- 박재상, '민족대표 근곡 박동완의 기독교 민족주의 연구',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12
(그밖에 매일신보, 동아일보, 중외일보, 조선신문, 신한민보 등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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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