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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3.12 18:26 수정 2019.03.12 18:26
박희도(朴熙道)는 1889년 8월 11일 황해도 해주에서 박계근(朴桂根)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해주 의창학교(懿唱學校)에 입학하여 보통과,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이어 평양 숭실중학교로 진학하여 학업을 마친 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년 수학하고 중퇴하였다. 이후에는 감리교에서 세운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를 다니다 역시 중도에 그만두었다.

16세 되던 해(1905년)에 기독교에 입문한 그는 이후 해주군 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16년 6월부터 전개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의 회원확대 운동에 '열심단(熱心團)'으로 참여하여 금패 포상을 받을 정도로 크게 활약하였다. 당시 그는 함경남도 함흥 소재 기독교계 보통학교인 영신학교(永信學校)의 교감으로 재직하였다.

YMCA 간사로 3.1독립선언에 참여

 

박희도

 1916년 8월, 그는 미국인 목사 베커(白雅德) 등의 지원을 받아 기숙사를 설립했다. 서울에 유학중인 황해도 출신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당시 서울 유학생들은 민간인 집에서 기거하였는데 청결문제, 금전갈취 등이 문제가 됐다. 박희도는 안국동 김용달의 집을 빌려 '육영사(育英舍)'라는 간판을 걸고 기숙사로 운영하였다. 경비는 베커 목사 등 외국인 독지가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하였다.(매일신보, 1916.8.30.)

1916년 9월에는 장낙도·유양호 등 중앙교회 목사와 함께 정동교회 유치원 분원으로 중앙유치원(중앙대학교의 전신)을 설립, 운영하였다. 이 유치원은 중류계층 이하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기독교 신앙의 민족교육을 표방하였다. 29세 되던 1917년 그는 영신학교(서울 매동초등학교 전신)를 설립하였으며, 베커가 교장으로 있던 협성학교의 부교장을 맡기도 했다. 협성학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으로 운영하던 초등학교였다. 이 무렵 그는 학교 설립과 운영에 매진하였다.

1918년 6월 그는 감리교 창의문밖 교회의 전도사가 되었다. 10월에는 YMCA 회원부 간사로 취임하여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다. 그는 이같은 여건을 십분 활용하여 3.1혁명 준비과정에서 민족대표들과 학생 측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였다.

1919년 1월 20일 경기도 이천읍교회에서 겨울철 지방 사경회(査經會)가 열렸다. 사경회란 기독교인들의 성경 공부모임을 말한다. 이날 모임에서 박희도는 국제통으로 불리는 동석기(董錫基) 목사를 만났다. 동석기는 하와이 교민 출신으로 개렛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내리교회를 거쳐 남양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었다. 박희도는 동석기를 만나 그 무렵 국제정세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듣게 됐다.

그 무렵 박희도는 도쿄 한인기독교 청년회를 통해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1월 중순경 그는 도쿄 유학생들이 모종의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했다. 그에게 이런 사실을 전해준 사람은 평양 태생으로 도쿄 여자의학전문학교에 유학중이던 송복순(宋福順)이었다. 평소 민족의 독립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송복순의 말을 듣고 한층 더 결심이 굳어졌다고 한다.

서울로 올라온 박희도는 1월 23일 YMCA 회원부 위원인 학생들을 소집하였다.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보성전문학교 강기덕, 경성의학전문학교 김형기 등이 그들이다. 박희도는 서울시내 전문학교의 학생대표들이 이들과 시국문제를 의논하며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나중에 이들이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을 하려고 하자 박희도는 이들을 만나 천도교, 기독교와 함께 할 것을 권고하면서 중간에서 교량 역할을 하였다.

2월 18일 평양 남산현교회의 신홍식 목사가 YMCA로 박희도를 찾아왔다. 그는 박희도에게 정주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이 독립운동 건으로 천도교 측과 상의를 하기 위해 상경했다며 한번 만나 볼 것을 권하였다. 이튿날 박희도는 소격동에 머물고 있는 이승훈을 찾아가 만났다. 이승훈은 그 자리에서 독립운동 건으로 상경했다고 밝히고는 기독교 측과 천도교 측이 같이 하든지 아니면 기독교 단독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일단 기독교 내부의 의견조율이 급선무였다. 이들은 그날 밤 박희도 집에 모였는데 이승훈을 빼고는 전부 감리교파였다. 이튿날에는 장로교 소속 이갑성 집에 모여 장로교파 인사들의 참여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날(2.20) 모임에서 이승훈은 천도교 측과 합동으로 하기로 협의하였으며, 천도교 측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했다고 전해주었다. 박희도는 이후로 김창준과 최성모를 만나 민족대표로 합류할 것을 권했고 두 사람 모두 찬동하였다. 27일 정동교회 내 이필주 목사 집에 모여 선언서 문안을 최종확정하였으며, 기독교 측 민족대표는 16인으로 정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박희도의 아내 김희신(金喜信·1968년 작고)의 증언에 따르면, 3월 1일 아침 그는 이른 아침을 먹고 아내에게 "나는 일본 대학에 유학을 간다. 부디 아이들을 잘 보살펴주시오"라는 부탁을 한 후 인력거를 타고 집을 떠났다고 한다.(경향신문, 1966.2.28.)

 

48인 첫 공판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20.7.20)

 
33인 가운데 참석자는 29인이었다. 독립선언식이 끝날 무렵 일제 관헌들이 들이닥쳐 전원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하였다. 취조는 연행 당일부터 시작되었다. 박희도는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으며, 또 조선독립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역설하였다. 그는 또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것이냐?"는 물음에 대해 "그렇다"고 잘라 말했다. 3월 9일 경무총감부에서의 취조내용 가운데 한 대목을 발췌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문: 이번 독립운동에 있어서 피고 등은 각 방면으로 연락을 하고 있었는가.
답: 그렇다.
문: 어떠한 방면과 연락을 하였는가.
답: 학생과 기타 여러 사람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문: 학생 측과 연락한 사실을 자세히 말하라.
답: 근년 1월 6일경 (경성)의학전문학교 생도 한위건이 나를 찾아와 오늘밤에 청년 몇 명이 대관원에서 모이는데 같이 가자고 하여 갔더니 연희전문학교 생동 김원벽, 보선전문학교 생도 강기덕, 보성전문학교 졸업생 주익 등 3명이 와 있었다. 주익이 오늘 지기(知己)끼리 모였으니 앞으로 서로 친하게 지내자고 하였고, 강기덕은 파리에서 세계 평화회의를 개최하는데 만일 조선인으로서 관계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 학생들은 그와 연락하여 무슨 일이든지 서로 긴밀히 연락하자고 하였다. 그날 다들 공감하였다.
2월 10일경 김원벽이 각 전문학교 생도와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였다. 2월 19일 이갑성 집에서 모이던 날 그 집 옆에서 김원벽을 만났는데 그가 내게 야소교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게 사실이냐고 묻기에 오늘 그 일로 이갑성 집에서 모여 상의하는데 결과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튿날 20일 오전 11시경 강기덕이 나를 찾아와 학생들은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는데 야소교와 천도교에서도 한다면 우리는 그대들이 독립선언을 한 후에 하겠다고 하므로 나는 그에게 우리는 야소교와 천도교가 합동으로 독립운동을 할 뜻을 말했다. 장소와 시일을 묻기에 국장 2일 전이나 2일 후에 될지 모르는데 확실한 시간과 장소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했다. 26일 밤 김원벽이 내게 왔기에 나는 3월 1일 오후 2시 탑동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할 계획이니 학생들을 소요를 하지 말라고 했더니 학생들은 그 후에 학생끼리 하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학생들이 선언서를 발표하는 것을 중지하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리 하겠다고 했다. 우리와 학생들의 관계는 그것뿐이다.
문: 피고 등은 결국 학생들과 같이 독립운동을 한 것 아닌가.
답: 그런 일은 없다. 독립선언서 발표 당일 학생들이 소요한 것은 어찌 된 것인지, 또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자가 학생들에게 이러한 일을 말하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문: 이번에 이태왕 전하가 훙거(薨去)하심에 때해 어떠한 감상을 가지고 있는가.
답: 단지 슬플 뿐이지 별로 감상을 가지지 않았다.
문: 피고는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達)할 줄로 생각하였는가.
답: 나는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할 뿐 아니라 언제든지 독립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문: 어째서 3월 1일에 독립선언을 하기로 했는가.
답: 그것은 천도교 측에서 정한 것이므로 우리는 별다른 이유는 없다.
문: 피고는 앞으로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그렇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의 최종판결에서 박희도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서대문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했는데 그를 포함해 최린, 오세창 등 17명은 독방에서 생활했다. 그 후 마포 경성감옥으로 이감돼 옥살이를 하다가 1921년 11월 4일 만기출옥하였다. 이날 함께 풀려난 사람은 17명인데 이종훈 혼자만 서대문감옥에서 풀려났다. 박희도는 옥중생활과 출옥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무슨 별 감상이 있겠습니까. 감옥에 있으나 집에 나오나 불쌍한 우리 동포를 위하여 몸을 바치겠습니다. 칠십 먹은 부모와 철모르는 동생들을 버리고 감옥에 들어올 때 가족 생각을 하면 이 일을 했겠습니까. 나의 가슴에 쌓인 정성은 오직 가련한 우리 동포를 조금이라도 구원하여 주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올시다. 나도 사람이라 칠십 먹은 부모가 나를 옥중에 들여보내신 후에 형편을 생각하는 나의 가슴은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습니다." (동아일보, 1921.11.5.)

 

박희도 출옥소감(동아일보, 1921.11.5.)

 
박희도는 출옥 후 그는 한때 용두리 교회에서 교역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이 일을 그만둬야만 했다. 1923년 미 감리회 조선 연회(年會)에서 박희도를 두고 "교역에 종사치 못할 형편임으로 계속치 않기로 가결"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교역자의 길을 접고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신생활 필화 사건'으로 다시 고초

그는 1922년 3월에 잡지 <신생활(新生活)>을 창간하였다. 사장은 자신이 맡고 편집인 겸 발행인은 베커 선교사로 하였다. 이는 당국의 원고검열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이 잡지는 '무산대중의 개조와 혁신'이라는 기치를 내건 사회주의 성향을 띠고 있었다. 1920년대 초중반 조선에는 사회주의가 풍미하였다.

그런데 출발부터 암초에 부닥쳤다. 창간호부터 발매금지를 당하였는데 그 후로도 몇 차례 기사삭제와 압수처분을 당하였다. 문제가 된 것은 1922년 11월 14일 발행된 제11호였다. 일제 당국은 러시아 혁명 5주년 특집을 문제 삼고 나섰다. 조선총독부는 신문지법을 위반했다며 발매금지 처분을 내렸다. 마루아먀(丸山) 경무국장은 이례적으로 발매금지 사유를 밝히면서 "처음부터 과격한 사회주의적 선동기사를 실어 왔다"고 밝혔다.

단순히 발매금지에서 끝나지 않았다. 사장 박희도는 물론 주필 김명식, 기자 신일용 등 6명이 구속되었고 인쇄기도 압수당하였다. 이것이 소위 '신생활 필화사건'이다. 이들은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는데 이듬해 1월 17일 열린 재판에서 박희도는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혹자는 이 재판을 두고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이라고 부른다. 박희도는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5년 1월 1일자로 만기출옥 하였다. 1919년에 이어 두 번째 감옥살이였다.

출옥 후 그는 1924년에 재건된 중앙유치원 사범과 교사로 부임했다. 1925년 3월 흥업구락부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27년 1월에는 좌우합작 민족단체인 신간회 창립에도 참여하였다. 1929년 7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내 출판부장을 지냈으며, 같은 시기에 신간회 동경지회 간부(대표회원)로 선임되었다. 또 그해 9월 신간회 회보 편집위원을 맡았으며, 10월에는 중앙상무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8년 중앙유치원 사범과가 중앙보육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으면서 그는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1932년 임영신에게 교장 자리를 넘겨주기까지 10년간 교육 사업에 종사하였다. 그 무렵 그는 만주동포 구호를 위한 단체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조선고아구제회 이사로도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여러 잡지에 계몽적 성격의 글을 다수 발표하였다.

재기를 꿈꾸던 그에게 또 다시 또 악재가 등장했다. 당시로선 흔치 않았던 사생활 관련 스캔들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성폭력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4년 3월 17일자에서 박희도가 제자를 유인하여 정조를 유린했다고 대서특필하였다. 이 신문은 이후로도 10여 차례에 걸쳐 관련 기사를 실었다. 사태가 커지자 조사위원회가 구성돼 조사를 벌였으나 도중에 피해여성이 애초의 주장을 번복하는 등 논란이 가중되었다. 이 사건으로 박희도는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혀 얼마 뒤 중앙보육학교 교장 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조선중앙일보>의 박희도 스캔들 관련 보도는 다분히 정치적이며 과도했다는 비판도 있다. 민족지사에서 자치론 등 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변신한 박희도가 언론의 표적이 됐다는 지적이다.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은 몽양 여운형이었다.

성폭력 논란 사건 후 친일 행적... 독립유공 포상도 제외

이후 박희도의 삶은 이전과는 180도 뒤바뀌었다. 민족주의자를 자처했던 그가 친일로 변신하여 일제 통치를 찬양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최린이 회장으로 있던 시중회(時中會)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부터였다.

33인 출신의 최린 등이 '신흥조선의 건설'을 내걸고 발기한 시중회는 1934년 11월 5일 조선호텔에서 성대한 창립식을 열었다.(매일신보, 1934.11.6.) 이날 행사에서 박희도는 경과보고를 맡았는데 당일 임원선거에서 7명의 이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다. 박희도의 변절은 일제의 회유공작에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박희도는 해방 때까지 친일행각으로 일관하였다. 1936년 11월 징병제 실시 상임준비위원을 맡아 징병제 찬양에 나섰으며, 이듬해 7월 중일전쟁 개전 이후에는 총독부 학무국 주최 시국강연반에 참여하였다. 1939년 5월에는 전시동원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및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인전보국단 평의원 등을 지냈다. 이제 패망 직전인 1945년 6월에는 조선언론보국회에도 참여하였다.

박희도의 대표적 친일행각으로는 친일잡지 <동양지광(東洋之光)> 창간을 들 수 있다. 1939년 1월 1일 창간된 이 잡지의 창간사에서 그는 "필경 내선일체의 구현에 대한 일본정신 앙양의 수양도장(修養道場)을 제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내선일체 구현을 표방하였다.

박희도는 <동양지광>에 여러 차례 칼럼을 썼으며, 수많은 친일파들에게 지면을 제공하였다. 당시 단골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용제(金龍濟)는 <한국문학> 1978년 8월호에 기고한 '고백적 친일문학론'에서 "동양지광은 항일 지하단체의 본거지였다"는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 김용제는 제1회 '국어(國語)문예총독상'을 수상한 1급 친일문인이다. 여기서 국어는 일어를 말한다.

박희도의 변절행각을 두고 시류에 편승한 기회주의자라는 주장이 있다. 기독교회사(史) 연구가인 김승태는 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박희도의 일생은 그 시대의 가장 주류를 이룬 사조에 쉽게 빠져 들어가 열성을 다해 일하다가, 그 사조가 일단 잦아들면 쉽게 포기하고 또 다른 사조를 찾아 뛰어들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운동의 최고봉이었던 3·1 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였고, 그 후 사회주의 사조가 일어나자 『신생활』을 창간하여 동조하였으며, 1920년대 말경에는 신간회에 참여하면서도 자치운동에 기울었다가, 마침내 1930년대에 들어 일제의 대륙침략과 세력의 확장으로 독립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자, 자발적으로 관제운동인 황민화운동에 뛰어들어 『동양지광』을 창간하여 친일논설을 펴고 내선일체와 전쟁협력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해방 후 반민특위 취조(연합신문, 1949.2.23.)

 해방 후 박희도는 반민특위에 불려갔다. 1949년 2월 21일 서울 신설동 자택에서 반민특위 김제선 조사관의 출두요청을 받고 이튿날 특위에 출두하였다. 이후 그는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최종결과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박희도의 사망 일자를 두고는 두 가지 기록이 있다. 우선 그의 제적등본에는 1952년 9월 25일로 돼 있다. 그러나 망우리에 있는 그의 묘소 묘비에는 '단기 4284년(1951) 9월 26일에 서거하다'로 기록돼 있다. 비석 건립일자와 주체는 '단기 4291년(1958) 7월 8일 건립 육군정훈학교 장병 일동'으로 돼 있다. 반민특위 조사 이후 사망할 때까지 박희도는 육군정훈학교에서 강의를 했다는 증언이 있다. 이런 인연으로 육군정훈학교 측은 그의 사후 7년 뒤에 이 비석을 세웠다.

박희도의 묘 뒤편에는 그의 부친 박계근(朴桂根)의 묘가 있다. 인근에는 33인 동지 만해 한용운의 묘도 있다. 박희도는 일제 말기의 친일행적으로 독립유공 포상 대상에서 제외됐다.

 

박희도 묘비(서울 망우리) ⓒ 오마이뉴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90
- 김승태, '박희도, 시류 따라 기웃거린 기회주의자의 변절 행로', <친일파 99인> 3권,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
-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한국감리교인물사전>, 기독교대한감리회, 2002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Ⅳ-7, 2009
- 허동현, '민족대표 박희도의 공(功)과 과(過) 재조명', <제5회 '민족대표 33인의 재조명' 학술회의 논문집>, 서울프레스센터, 2006.3.15
- 김용제, '고백적 친일문학론', <한국문학>(1978.8)
- 김영식, '민족대표 33인 한용운과 박희도', <신동아>, 2008.9
(그밖에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신한민보 등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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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