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11 11:34최종 업데이트 19.03.11 11:34
자암(泚菴) 박준승(朴準承)은 1866년 11월 24일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박호진(朴昊鎭)의 셋째 아들이다. 박호진은 대농가로서 집안이 여유로웠다. 덕분에 박준승은 6세 때 독선생을 들여 한문을 배웠다. 15세 때 사서삼경을 암송하였고, 성격은 쾌활하고 강직했다고 한다.

박준승은 16세 때인 1882년부터 농업에 종사하면서 가사에 전념하였다. 이듬해 장환기의 둘째딸 장승화와 결혼하였다. 1886년 부친이 사망하자 호주가 되어 집안을 이끌었다.

동학 혁명 참여한 천도교 중진

 

박준승

 박준승은 24세 되던 1890년 4월 스승 김영원을 통하여 동학에 입교하였다. 당시 임실에는 이미 천도교가 포교돼 있었는데 그는 임실 천도교 교당에 가서 입교했다. 조선후기 조정의 부패상을 지켜보면서 동학의 '광제창생 보국안민(廣濟蒼生 輔國安民)' 이념에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92년 교조(敎祖) 최제우의 명예회복을 위해 일어난 '교조신원(敎祖伸寃)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여기에도 동참하였다. 1896년 3월 박준승은 동학 접주(接主)로 임명돼 포교 조직을 재건하고 교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897년에는 수접주(首接主)로 임명되었다.


1904년 당시 일본에 체류 중이던 천도교 3세 교주 손병희는 박인호·이종훈 등 동학 간부 40여 명을 비밀리에 일본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동학교도들을 규합하여 민회(民會)를 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앞서 손병희는 대한제국의 문명개화를 요구하며 수차례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행동에 나서기로 하였다.

민회의 첫 명칭은 대동회였는데 중도에 중립회(中立會)로 바꾸었다가 다시 진보회(進步會)로 개칭했다. 1904년 9월 '진보회'라는 이름의 민회를 조직한 후 천도교인들에게 단발과 함께 흑의(黑衣·개화복)를 입도록 권장하였다. 이것이 소위 천도교의 '갑진(甲辰)개화운동'이다. 당시 박준승은 전라도 접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1905년 12월 1일 동학은 천도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듬해 초에 귀국한 손병희는 교제(敎制)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 일환으로 1906년 2월 서울에는 천도교 중앙총부를, 지방에는 74개 교구를 설치하였다. 박준승은 1907년 6월 천도교 임실교구 창립교구장으로 임명돼 활동하였다.(단, 3.1혁명 후 취조과정에서는 임실교구장 역임 사실을 부인하였음) 그해 말 의암 손병희로부터 자암(泚菴)이라는 도호(道號)를 받았다. 1909년 1월에는 의사원(議事員)으로, 1910년 4월에는 500호의 교인을 지도하는 도훈(道訓)이 되었다.

이무렵 날로 교세가 확장되자 손병희는 1912년 6월 19일 서울 우이동 자락에 봉황각을 건립했다. 천도교 간부들의 회의장소 겸 전국 신도들의 수련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봉황각 준공과 함께 손병희는 전국 각지의 지도급 간부들을 불러 49일 특별기도회를 열고 국권회복과 천도교 발전을 기원했다. 이때 박준승은 제1차 수련생 21명 중 한 명으로 뽑혀 봉황각에서 연성(鍊成)공부를 하였다.

1914년 7월 그는 전남 장성 대교구장 겸 순유(巡諭)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17년 10월에는 천도교의 원로인 경도사(敬道師)에 추대되었고, 이듬해에는 도사실(道師室)의 도사(道師)로 추대되었다. 이 무렵 그는 천도교 내의 중요정책을 심의·결정하는 중진의 위치에 있었다.

권동진의 권유로 33인 합류

1918년은 세계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해였다. 그해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다. 그 무렵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미국 의회에서 14개조 원칙을 발표하였다. 모든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타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는 조선처럼 강대국의 식민지로 있던 여러 약소민족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동시에 약소국이 강대국의 부당한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를 세우는 데 이론적 근거로 인식되기도 했다.

천도교는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를 주시하였다. 교주 손병희는 측근 3인방으로 불리는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을 통해 모종의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에 '자율적 행정', 즉 자치를 청원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만주와 상해, 연해주 등에서 완전한 독립을 얻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방침을 수정하였다.

천도교는 1919년 1월경부터 외부세력 규합에 나섰다. 우선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1차로 윤치호·김윤식·한규설 등 당대의 명망가들을 영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2차로는 기독교·불교 등 타 종교 지도자들과 접촉하면서 공동전선을 모색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의 천도교인들에게 1919년 1월 5일부터 49일간 특별기도회를 갖도록 함으로써 모종의 운동에 대비하게 하였다. 이때 박준승은 전주교구에서 49일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2월 24일 박준승은 서울로 올라왔다. 교주 손병희에게 49일 기도회 보고를 겸해 고종 황제 국장도 참배할 계획이었다. 송현동 청송여관에서 하루 저녁을 보낸 그는 이튿날 25일 손병희를 만나려고 천도교 중앙총부로 오는 길에 총독부 문 앞에서 권동진을 만났다. 권동진은 그에게 "지금 정부에 조선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고 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각처에 배포하여 조선독립운동을 하려고 한다"며 그에게 동참을 권하였다. 그는 "청원해서 독립이 된다면 참가하겠다"며 참여의사를 밝혔다.

그로부터 이틀 뒤 27일 권동진이 재동 김상규 집으로 오라고 통지하였다. 그는 오후 3시경 김상규 집에 가서 일본 정부에 제출할 청원서 초안 등을 검토하고 그 자리에서 민족대표로 서명 날인하였다. 다시 28일 밤에는 손병희 집에 모여 최종 점검회의를 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선언서 발표장소를 당초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다수의 군중이 모일 경우 소요사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3.1 선언 당시 상황을 담은 기록화.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손병희, 박준승 등을 포함해 참석자는 총 29명이었다. 선언식이 끝날 무렵 일제 관헌이 들이닥쳐 참석자 전원을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하였다. 일경의 조사는 연행 당일부터 시작되었다.

첫날 일경은 그에게 상경 목적, 권동진과의 회합 내용, 조선의 독립이 필요한 이유, 2728일 모임 참석자 명단 등을 따져 물었다. 박준승은 일경의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조선독립의 필요성 등에 대해 당당하게 소신을 밝혔다. 신문조서 가운데 몇 대목을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문: 독립할 필요는 무엇인가.
답: 조선은 4천 년 전에 건국하였으며 나도 (태어)날 때는 독립국 국민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구주(歐洲)에서 국제연맹 회의를 하고 있으므로 이 좋은 기회에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될 줄로 생각한다.
(3월 1일, 경무총감부)

문: 피고는 조선 독립이 될 줄로 믿고 있는가.
답: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문: 피고는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앞으로도 기회만 있으면 하겠다.
(3월 20일, 서대문감옥)

문: 피고는 어째서 조선을 독립하려고 생각하였는가.
답: 조선이 독립된다면 일본과 서로 제휴하여 평화가 영구히 될 줄 알았다.
(4월 19일, 경성지방법원)

문: 독립운동이란 어떤 일은 하는 것인가.
답: 나는 그 방법은 모른다. 권동진이 일본정부에 청원서를 내면 한번으로는 되지 않을지 모르나, 두 번, 세 번 밀고 나가면 반드시 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대도 가입하라고 했으므로 나도 집으로 돌아와서 하루 밤 생각해 보았더니 과연 일본은 조선을 병합한 이래로 대단한 후의로써 조선을 이끌어 주고 있다. 그러한 일본이므로 이때에 청원을 하면 역시 인자함이 깊은 일본은 반드시 독립을 허용해 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니 과연 그럴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여 청원서에 날인하게 되었다.
(8월 23일, 고등법원)


예심을 거쳐 경성복심법원은 1920년 10월 30일 최종판결을 내렸다. 그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혐의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산입)을 선고받았다. 상대적으로 중형을 선고받은 셈이다. 그는 마포 공덕동에 있던 경성감옥에 수감되었는데 옥중에서 수련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1921년 11월 4일 오전 경성감옥에서 출옥하였는데 이때부터 감옥 규정이 바뀌어 단체로 출옥사진을 찍었다. 이튿날 동아일보에는 출옥자 17인의 사진과 기사가 크게 실렸다.

출소 후엔 천도교 포교운동에 전념

 

박준승 부음기사(중외일보, 1927.3.26.)

 
출옥 후 그는 임실의 고향마을에서 '야운비학(野雲飛鶴)으로 벗을 삼아' 농사를 지으며 천도교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22년 6월에는 중앙종리원 감사(監査)와 종리사(宗理師)로 활동하였다. 또 1925년 4월에는 주간포덕사(主幹布德師)에 선임되었으며, 1926년 4월에는 천도교의 최고 예우직인 종법사(宗法師)가 되었다.

한편 1920년대 들어 천도교는 보-혁 간에 노선투쟁이 치열했다. 1922년 5월 19일 교주 손병희가 사망한 후 천도교는 신·구파로 분열하였다. 신파는 최린·정광조, 구파는 오세창·권동진·이종린 등이 주도하였다. 1925년 8월 분규사태를 조정하기 위해 종리사들이 나서서 통일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박준승은 상무위원으로 참여하여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박준승 묘소(정읍시 충무공원) ⓒ 33인유족회

 
천도교의 중진으로서 천도교 발전과 민족운동에 헌신한 박준승은 1927년 3월 23일 고향에서 62세로 타계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유행성 독감에 감염돼 고생하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됐다. 장례는 3월 26일 정읍의 천도교회당에서 교회장으로 거행되었다. (동아·중외일보, 1927.3.26.)

그의 유해는 전북 정읍군 북면 마정리 칠보산에 안장되었다가 1965년 6월 정읍시 수성동 충무공원으로 이장되었다. 매년 11월 4일(출소일) 임실군과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생가 터에서 제례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1962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2013년 10월 그의 고향인 임실군 청웅면 주치마을에서 주민들의 노력으로 생가가 복원되었다. 2018년 7월 11일 전북 정읍시는 산외면 평사리에서 '박준승 선생 기념관' 건립 착공식을 가졌다. 기념관은 3·1혁명 100주년 기념일인 2019년 3월 1일 개관할 예정이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90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박준승 편', 1997.3
- 조성교, '박준승-3·1운동 민족대표', <전북인물지(誌)>(하), 전북애향운동본부, 1983
- 조규태, '전남지역 천도교인의 3·1운동', <동학연구> 통권 제17호, 한국동학학회, 2004.9
- 조규태, '3·1독립운동과 천도교계의 민족대표-박준승·홍병기·나용환의 활동을 중심으로', <제4회 '민족대표 33인의 재조명' 학술회의 논문집>, 서울프레스센터, 2006.3.15,
(그밖에 매일신보, 동아일보, 중외일보, 시대일보, 경향신문, 세계일보, 전라일보 등 기사 참조)



3.1 혁명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정운현 지음, 역사인(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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