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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4.26 09:04 수정 2019.04.26 09:04
따스한 햇살이 천지를 비추는 때, 이경종의 마음은 한겨울이었다.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는 채 경찰의 총부리가 지시하는 데로 발걸음을 향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머리는 삼베로 뒤집어씌웠기에 앞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평지를 지나 숲속으로 가는 것 같았다. 그의 추측대로 경찰은 이경종을 충북 영동군 영동읍 설계리 구수동 찔레숲으로 끌고 갔다. "네 동생 어디로 도망갔어?" "모릅니다." 경종의 얼굴에 날아온 것은 구식 장총의 개머리판이었다. "퍽퍽퍽!"

"마지막 기회를 준다. 이복종이 어디에 있어?" 하는 질문과 함께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경종의 사지는 마비되고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심장의 쿵쾅거리는 소리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대답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정말로 동생이 어디로 피신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답변이 없자 경찰은 그를 죽도록 패고, 영동경찰서로 끌고 가 유치장에 내던졌다. 찔레꽃이 한창 피던 1948년 5월경 일이었다.
 

뒷줄 왼쪽부터 이경종, 삼종, 복종 ⓒ 박만순

 
태극청년단과 경찰의 습격

낯선 청년들이 손에 몽둥이를 들고 봉현리 마을로 들이닥쳤다. 안내하는 청년을 따라 그 무리는 이경종의 초가집으로 걸음을 내쳤다. "복종이 나와"라며 마루를 몽둥이로 내리쳤다.

하지만 집안에는 이규태의 할아버지 이범준(1885년생)과 손자 규태, 그리고 여인들뿐이었다. "아들은 집에 없소." "철썩!" 새파랗게 젊은 청년들이 상노인 이범준의 뺨을 때렸다. 당시 63세는 노인 중의 노인인 상노인(上老人)으로 대우받았다. 가족 모두가 놀랐지만 아무도 입을 떼지 못했다. "이놈의 집 모두 박살 내"하는 소리와 함께 몽둥이들이 춤을 추었다.

몽둥이에 닿는 것은 모두 부서졌다. 옷장이며 그릇, 마당에 있던 항아리 등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그러더니 대장인 듯한 사람이 대빗자루에 불을 붙였다. "마지막 기회야. 당신 자식 어디에 숨겼어?" 하지만 이범준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불붙은 대빗자루를 든 대장은 초가집 지붕에 불을 붙이려 했다.

순간 이규태(당시 6세)는 울음을 터뜨리며 똥을 쌌다. 한 청년이 소년 이규태가 똥을 싼 것을 알고 다가왔다. "괜찮아. 울지 마" 그 청년은 규태의 머리를 쓰담으며 안심시켰다. 대장도 초가집에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잠시 후 그들은 물러났다. 1947년에 태청(태극청년단)이 충북 영동군 영동읍 봉현리 이경종의 집에 와서 부린 행패였다. 태극청년단의 행패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경찰보다 무서운 것이 우익청년단이었는데, 특히 '태극청년단'이 그랬다.

물레를 돌리던 초겨울 늦은 밤 두툼한 돕바(외투)를 입은 청년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죈(주인)!" 불청객의 등장에 규태의 어머니가 방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경찰이다. 낮에 이 집으로 들어 온 자가 누구야?" "아무도 안 왔는데요?" "시끄러워!" 하는 소리와 함께 경찰들이 우르르 튀어 나왔다. "곳곳을 뒤져!" 경찰들은 신발을 신은 채로 방으로 들어 가 옷장이며 쌀뒤주를 뒤졌다.

한 경찰은 소 외양간에 가서 바닥을 발로 쾅쾅 차기도 했고, 다른 경찰은 다락에 올라가 호롱불을 비추기도 했다. 이들은 마을 앞산에서 새벽부터 하루 종일 감시하다가 밤 12시에 이경종의 집을 들이닥친 것이다. 하지만 이경종, 복종, 삼종 삼형제는 이미 피신한 상태였다. 경찰들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서대문 형무소로 보내주시오"

"서대문형무소로 보내주시오." 한국전쟁 전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이경종(1914년생)은 이감을 신청했다. 면회 온 아내 김희연(1917년생)이 만류했다. "서울로 가면 면회를 어떻게 가라고요. 그냥 여기에 있으세요." 하지만 그의 닫힌 입은 열리지 않았다. 아니 입을 열 힘도 없었다. 수시로 찾아온 경찰들에게 살해협박과 구타와 고문을 당했기 때문이다. 특히 영동경찰서에 마지막으로 잡혔을 때는 '쇠좆매'(채찍형 무기)로 엄청나게 맞아 몸이 '걸레'가 되었다.

그가 이감을 요구한 데에는 6촌 형 이종이 서대문형무소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대문형무소로 이감을 간 것이 목숨을 구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당시에는 꿈도 꾸지 못했다.

대포소리, 탱크소리, 기총소사 소리가 아침부터 귀청을 때렸다. 잠시 후 옥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동무들은 해방되었소!" "만세!" 소리가 연이어졌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북한군에 함락되면서 서대문형무소 문이 북한군에 의해 열린 것이다.

이종은 육촌 아우 경종에게 말했다. "나는 북으로 갈 테니 동생은 고향 영동으로 가게." 형무소에서 작별인사를 한 이경종은 산으로 터벅터벅 걸어서 1주일이 걸려 고향 봉현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전쟁 와중에 그의 동생 복종과 삼종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복종(1921년생)은 좌익 활동 혐의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50년 7월 초 후퇴하는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대전 산내에서 학살되었다. 셋째 삼종(1929년생)은 한국전쟁 전 형들의 수배와 검거 와중에 어디론가 피신을 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69년이 지난 지금까지 행방불명되었다.

해방과 한국전쟁기에 온갖 고통을 겪고, 둘째 복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이복종의 좌익 활동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갈 정도의 무거운 것이었을까?
 
무학자들의 배움터 '야학'
 

이경종 아들 이규태 ⓒ 박만순

 
전주 이씨 후예인 이규태(1942년생) 집안은 매우 가난했다. 그런데 영동군 영동읍 심원리에 살던 외조부는 이경종이 양반 집 자제라는 이유로 딸 김희연을 시집보냈다. 외조부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사위에게 땅을 주고 3년 동안 매해 송아지 한 마리씩을 줬다. 이토록 가난했기에 경종과 복종은 초등학교 문턱을 넘지 못했으며 셋째인 삼종만이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런데 이런 경제적 곤궁이 이경종 집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충북 영동군 영동읍 봉현리 전체에 해당되었다. 1930년대 중반 봉현리는 80호 400여 명의 주민이 살았는데, 그 중 보통학교(현재의 초등학교) 졸업생이 3명이었고, 재학생이 4~5명에 불과했다.(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증언반 엮음, <끝나지 않은 여정>) 이런 열악한 교육환경을 개선키 위해 봉현리 출신 이종(1911년생)은 마을에 야학당을 개설했다. 계몽운동의 일환이었다.

야학을 개설한 이종은 19세에 상경해 무산자교육기관인 '고학당'에 입학했다. 김삼룡, 유축운, 이능종 등이 그의 선배였는데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밥벌이를 했다. 밥벌이는 주로 '영신환팔이'를 했다. 일부 야학생들은 <신소년> <별나라> <비판> 등의 잡지를 읽기도 했으며, 그 와중에 자연스럽게 사회주의를 접했다.

봉현리에서 야학을 하다가 <사회주의의 대의>라는 책이 발각되어 1개월간 옥고를 치른 이종은 타 지역을 다니며 생계에 전념하기도 했다. 해방을 영동에서 맞이한 그는 영동군 농민조합과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고, 활동공간을 이전해 남로당 청주시당 부위원장 겸 선전책을 하기도 했다.(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증언반 엮음, <끝나지 않은 여정>)

충북 영동과 청주에서 간부로 활동하던 이종과 이경종·복종·삼종 형제는 6촌간이었다. 특히 무학자였던 경종과 복종은 마을의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이종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이종이 야학당 선생이기도 했지만, 그의 식견이 워낙 탁월했기에 봉현리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6촌 형 이종의 영향을 받은 복종은 대전 산내에서 학살되었고, 경종은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향에서 지냈다. 삼종은 앞서 얘기했듯이 전쟁 전 행방불명되었다. 이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종의 삶... 그는 결국 북한으로 갔다

1949년 종로경찰서에 붙잡힌 이종은 치안국 사찰과 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갖은 고문을 당한 그는 1심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북한군의 옥문개방으로 풀려난 그는 한강 마포에서 원유도하 사업을 맡다가 UN군 수복기에 북으로 후퇴했다. 우여곡절 끝에 1951년 초겨울 금강정치학원에 입소했다. 소위 '남파간첩 교육기관'이다.

'똑똑'하는 소리에 이어 "동무들 하선하시오"라는 소리가 배 갑판에서 들렸다. 캄캄한 새벽에 배에서 내려 무작정 산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마을 이장한테 갔다. "이장님! 군산으로 장사하러 가는 사람인데, 길을 잃었습니다. 통통배 하나만 내 주세요." 하지만 이장은 의심스런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야 이 사람아! 풍랑이 이렇게 심한데 배를 어떻게 띄워?" 그러자 이종은 조용히 이장의 주머니에 돈 봉투를 찔러줬다. 돈의 효력은 바로 나타났다. "어이 ○씨, 이 양반 군산까지 태워다 줘."

충남 당진을 거쳐 전북 군산에 도착한 때는 1953년이었다. 그는 북한과의 선이 끊겨 소위 간첩 활동을 하지 못했다. 모시 장사를 하기도 하면서 낚시를 즐겼다. 그러다 하루는 군산시장에서 고향 사람 박○○을 만났다. 북한에서 교육받을 때 "친척이나 지인을 만나면 즉시 근거지를 옮겨라"는 교육을 받았지만, 그는 '설마' 했다. 그날 밤 영동 경찰들에게 붙잡힌 이종은 만 10년간의 옥살이를 꼬박했다.

그가 풀려난 때는 1969년이었다. 갈 곳 없는 그에게 귀향을 권유한 이는 이경종이었다. 어찌 보면 가족의 불행이 육촌형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건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의 불행을 '시절 탓'으로 돌린 그는 육촌형을 집으로 데리고 와 깍듯이 모셨다.

그는 시간 날 때마다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노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을 둥구나무 아래서 항상 책을 읽던 모습을 7촌 조카 이규태는 기억한다. 이규태(78세. 영동군 영동읍)는 "닐 암스트롱이 달나라에 갔을 때요, 이종 아저씨가 마을 노인들한테 '저기(달)에 가면 중력 때문에 한 번 쓰러지면 힘들어서 일어나기가 힘들어요'라고 이야기기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1969년 만기석방 된 이종은 육촌 동생 이경종의 집에서 2년간 머무르다가, 영동읍 조심동에 살고 있던 친누나 이인의 집으로 가 4~5년을 살았다. 이인의 손자 임두환(80. 영동군 영동읍)은 "이종 할아버지가 새벽에 일어나서 한겨울에도 철길 옆 개울가에서 냉수마찰을 했어요, 정신력이 대단한 분이었어요"라고 회고한다.
 

이종이 쓴 시집 <독방>을 들고 있는 임두환 ⓒ 박만순

 
하지만 전쟁의 광기는 이종을 징역 10년으로 풀어주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 들어서 장기수들에게 사상전향을 강요했다. 사상전향은 폭력배와 교도소 간수를 동원해 폭행과 고문을 수반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분단체제를 이용해 악법을 휘둘렀다.

국가보안법에 이은 사회안전법 제정(1975년)으로 이중처벌을 가했다. 이종은 간첩다운 간첩활동도 하지 못한 채 징역 10년을 살았는데, 사상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975년부터 1988년까지 2차 감옥생활을 했다. 총 23년간의 감옥생활을 했다. 그는 1999년 비전향장기수 동료들과 함께 북한으로 송환되었고, 2011년에 만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장에서 공무원으로 특채돼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당한 이복종의 가정은 풍비박산났다. 이삼종은 전쟁 전부터 행방불명되어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이경종은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후 집에서 농사생활에 전념했다. 특별한 어려움 없이 살던 그에게 육촌형 이종이 남파간첩사건으로 구속된 것은 '날벼락'과도 같은 일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종의 구속으로 인해 이경종이 특별히 불이익을 받거나 어려움에 부닥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경종의 아들 이규태는 1970년대 봉현리 이장을 하면서 '모범이장'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영동읍에서는 '모범이장'을 상대로 공무원 특채시험을 치렀는데, 이규태가 여기에 합격했다. 정식채용 직전 경찰에서 신원조회를 실시했다. 엄격하게 신원조회를 하면 이규태가 낙마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영동읍장 배정혁이 이규태의 사람 됨됨이와 능력을 알아보고 신원조회를 벗어나게 도움을 주었다. 즉 배정혁 읍장이 영동경찰서에 이규태 신원조회 서류를 들고 가 "빨리 처리해 달라"고 윽박지르다시피 해, 무사히 넘어간 것이다. 배정혁은 해방 직후 영동경찰서 사찰과에 근무했고, 자유당 시절에는 선거관리위원장을 역임한 지역 유지였다. 공무원에 특채된 이규태는 영동읍사무소와 심천면사무소에 근무했고, 추풍령면사무소에서 민원실장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무리했다.

일제강점기에 계몽운동 차원으로 시작된 봉현리에서의 야학이 사회주의운동과 연계되었다는 혐의로 강제 폐쇄되고, 관련자들은 빨갱이로 규정되었다. 이경종 삼형제는 육촌형 이종과의 관계로 상처를 입었다. 물론 이복종이 학살당하고 나머지 형제가 곤욕을 치른 것이 이종의 탓은 아니다. 전쟁범죄를 저지른 국가와 정부의 잘못이다.

특히 대전에서 학살당한 이복종이 뚜렷한 좌익 활동을 했다는 근거도 없다. 전쟁의 상처는 끝나지 않았다. 상처를 누가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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