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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3.10 20:55 수정 2019.03.10 20:55
임예환(林禮煥)은 1865년 7월 19일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용산동(용산리 임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택, 도호(道號)는 연암(淵菴)이다.

<동학천도교인명사전>에 따르면, 그는 24세에 동학에 입도하여 접주, 수접주, 대접주를 역임하였다. 이후 관서지방의 신도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천도교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한 그는 1895년 동학혁명에 참가하여 교장, 교수, 교령을 지냈다.

갑진개화운동에 앞장선 천도교 도사
 

임예환

 
1898년 4월 5일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崔時亨)이 관군에 체포되었다. 최시형은 혹세무민과 좌도난정(左道亂政), 즉 동학으로 유교의 가르침과 법도를 어지럽혔다는 죄명으로 그해 7월 2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동학으로서는 갑오농민혁명 좌절에 이어 또 하나의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최시형에 이어 동학의 3세 교주가 된 손병희는 1901년 3월 미국행에 올랐다. 정부의 탄압을 피해 은신도 할 겸 서구의 신문명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경비문제로 미국행이 좌절되자 중도에 일본에 체류하였다. 손병희는 동학의 교세가 날로 확장되자 동학 교인들의 자제들을 일본으로 유학시켜 신문명을 배우게 할 계획을 세웠다. 1902년 손병희는 1차로 전국에서 24명을 선발하여 교토(京都)의 부립(府立) 제1중학교 등에 입학시켰다. 1904년 3월에는 다시 40명을 데려가 수학케 했다. 이때 임예환, 홍기조, 홍병기 등이 이 일을 적극 도왔다.

손병희는 일본에서 박영효,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조선 조정에 대해 서구식 근대화를 요구하는 상소를 수차례 올렸다. 그러나 이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손병희는 방향을 바꿔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1904년(갑진년) 4월, 손병희는 동학 지도자들을 비밀리에 일본으로 불러들였다. 그때 일본으로 간 사람은 임예환을 비롯해 문학수, 이겸수, 나용환, 나인협, 홍기조 등이었다. 손병희는 이들에게 동학교도들을 규합하여 민회(民會)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임예환은 동지들과 함께 민회를 조직했다. 처음에는 민회의 명칭을 대동회라고 했다가 나중에 진보회(進步會)로 개칭했다. 임예환, 나용환 등 관서지역 동학 지도자들은 그해 9월 1일 평양에서 진보회 민회를 개최했다. 통문(通文)이 돈 것은 8월 20일이었다. 나용환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평양 개회(開會)는 위세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일시에 2만여 명이 모였으며, 그 자리에서 단발한 사람도 수천 명이나 됐다고 한다. 나용환의 회고담 한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때를 생각하니 실로 감개가 만슴니다. 당시 우리 東學軍(進步會)들의 기세야말로 굉장하얏슴니다. 朝鮮八道 어느 곳이 그러치 안엇슴니까마는 우리 平安道가 더 굉장하얏지요. 그 중에도 平壤開會가 더 굉장하얏지요. 엇잿든 이만여명이 일시에 動햇섯고 수천여명이 일시에 단발을 하얏구려! 그리고 平安道 사십사주 方伯守領을 호령하고 官公吏가 못하는 訴狀을 一日에 십이백도식 처리하얏구려! 大洞江으로 警務廳삼고 列邑守令을 불러다 굴복을 시켯슴니다. 그때야말로 우리의 세상가탯슴니다."
('갑진개혁 실화, 대동강을 경무청(警務廳) 삼고, 민청(民廳)에서 호령하던 이약이', <별건곤> 제4호, 1927.2.1.)


당시 진보회는 동학교인들에게 단발(상투 자르기)과 함께 흑의(黑衣·개화복)를 입도록 권장하였다. 소위 천도교의 '갑진(甲辰)개화운동'이 그것이다. 손병희는 이 운동을 통해 서구식 근대문명을 수용하고 민회를 조직해 조선을 근대 국민국가로 개조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진보회 회장을 맡고 있던 이용구의 배신 때문이었다. 그는 개인적인 이권을 위해 그해 12월 진보회를 송병준의 일진회(一進會)와 통합시켰다. 그런데 이 일진회가 1905년 11월 4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전격 발표했다. 그로부터 13일 뒤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용구의 매국행위로 동학교도들이 크게 반발하였고, 동학은 매국 종교단체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얼마 뒤 임예환 등은 급히 일본으로 향했다. 악화된 국내 여론을 수습하기 위해 교주 손병희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간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 일본 경무총감이 외무차관에게 보낸 비밀문서(1905.11.28)에 따르면, 임예환·김영학·나인국·최주덕 등 일진회원 4명은 11월 21일자로, 이병춘·허선 등 6명은 26일자로 일본으로 건너와 이상헌(李祥憲)을 만난 것으로 나와 있다. 일본 체류 당시 손병희는 신분을 감춘 채 '충청도 거부(巨富) 이상헌(李祥憲)'으로 활동하였다.

사태가 악화되자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간판을 바꾸었다. 이는 동학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어내고 근대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1906년 1월초 서둘러 귀국한 손병희는 먼저 교단을 정비하였다. 그해 9월 이용구 등 62명의 일진회 무리를 출교(黜敎)시킴으로써 친일세력과 단절시켰다. 그리고는 교인들에게 일진회에서 탈퇴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은 원래 독립국이었다"

한편 이런 와중에도 천도교의 교세는 날로 커져갔다. 천도교는 1906년 3월 6일 전국에 72개의 대교구(大敎區)를 설치했다. 이때 홍기조는 13대교구, 나용환은 15대교구, 임예환은 25대교구 교구장에 각각 임명되었다.(대한매일신보, 1906.3.17.)

1907년 5월 21일 임례환은 그간의 포교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2등 은장포증(銀章褒證)을 받고 정주순독(定住巡督)에 임명되었다. 정주순독은 휘하의 교구장, 교령, 봉교 이하 교인의 진퇴출척(進退黜陟)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해 12월 10일 임예환은 정주교사(定住敎師)에, 1909년 5월 6일에는 종문직접(宗門直接)에 임명되었다. 1919년 3·1혁명 이전까지 임예환은 평남 중화에서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타계했다.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국민들은 분노했다. 장례는 3월 3일로 정해졌다. 그 무렵 국내외 민족진영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이 모색되고 있었다.

1910년대 들어 천도교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민중시위운동을 추진하였다. 이 일에 앞장선 사람은 옥파 이종일(李鍾一)이었다. 이종일의 회고록인 <묵암비망록>에 따르면, 임예환은 이종일의 지시로 이종훈과 함께 농어민을 포섭하여 민중운동을 시도하였다. 당시 농어민들은 일제의 가혹한 경제수탈로 배일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다. 1912년 1월 이종훈과 임예환은 농어민 피해실태 현장조사를 벌였다. 이종훈은 경기도 근처의 농민을, 임예환은 서해안 일대의 어민을 맡았다. 예상했던 대로 농민은 8할, 어민은 6할 이상이 반일감정을 갖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이종일과 임예환·이종훈은 보성사 사원 60여 명과 함께 범국민신생활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는 비정치적 국민집회를 표방한 것으로, 손병희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집회일은 7월 15일로 정하였다. 그런데 집회 이틀 전에 종로경찰서에 발각돼 서류일체를 압수당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집회의 성격이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단순한 생활개선운동이라고 둘러대 겨우 화를 면했다.

임예환은 1919년 2월 24일 서울에 도착했다. 일행은 홍기조·나인협 등 세 사람이었다. 이들은 안국동 18번지 한주천(韓桂天)의 집에 숙소를 잡았다. 이들이 상경한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은 1월 5일부터 시작한 49일 특별기도회 결과를 천도교 중앙총부에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또 3월 10일은 1대 교주 최제우가 순교한 날로 천도교 기념일이어서 해마다 행사 참석차 상경하곤 했다.

2월 25일, 임예환은 천도교 중앙총부에 들렀다가 권동진과 오세창을 만났다. 이들로부터 "조선을 독립국으로 하려고 선언서를 발표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나도 예전부터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며 적극 동조하였다. 27일 오후 5시경, 임예환은 재동 김상규 집에서 열린 모임에 홍기조·나인협 등과 함께 참석하여 선언서 등에 서명 날인하였다. 이로써 그는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최린은 선언서 발표는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하기로 정했다고 알려주었다.

거사 전날인 2월 28일 밤, 가회동 손병희 집에서 최종 점검모임이 열렸다. 신문조서(1919.4.12., 경성지방법원)에 따르면, 임예환은 무슨 사정 때문이었는지 이 모임에는 참석치 않았다. 이날 밤 10시가 지나서 손병희 집에 도착한 임예환은 나용환한테서 선언서 발표장소가 파고다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바뀐 사실을 전해 들었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예정대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그 시각 인근 파고다공원에서는 학생 등 3~4천명이 집결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집회를 열었다.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진 민족대표들은 직후에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전원 연행되었다.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등 불참자 4명은 예외였다.
 

임예환 심문기사(동아일보, 1920.9.22.)

 
이후 1년 반에 걸쳐 심문과 재판이 진행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최종심에서 그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죄로 징역 2년(미결구류 360일 통산)을 선고받았다.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임예환은 조선의 독립 필요성과 독립의지를 당당하게 피력하였다. 다만 총독정치에 대해 '아무런 불평도 없다'고 답했는데 진심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의 신문조서 가운데 일부 발췌해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문: 그대는 (조선이) 독립국이 안 되리라는 생각은 없었는가.
답: 조선은 원래 독립국이었으므로 독립국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기타 의견은 없었다.
문: 어째서 이태왕(李太王·고종) 전하 장의를 눈앞에 두고 이런 일을 하였는가.
답: 조선을 독립하려고 한 것은 전에 말한 바와 같이 항상 생각하고 있었던 터이므로 기 기회에 하려고 하였다.
(1919년 3월 1일, 경무총감부)


문: 피고는 언제부터 조선을 독립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는가.
답: 일한병합 무렵부터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4~5년 전부터 한층 더 그 생각이 깊어졌었다.
문: 조선은 정치가 어지러워서 도저히 나라를 다스려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병합되었던 것이 아닌가.
답: 이전의 조선인은 유치하였기 때문에 정치가 어지러웠다. 일한병합 후에는 이전보다 조금 잘 나라가 다스려졌지만, 독립하면 한층 더 잘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문: 그러면 피고는 총독 정치에 대하여 불평을 품고 있었던 것인가.
답: 그런 것은 아니고, 아무런 불평도 없다.
문: 조선이 독립되었을 때에는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생각이었는가.
답: 그것은 독립국이 되어서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 피고는 조선독립 등의 일은 염두에도 없다가 이번에 상경하여 孫秉熙에게서 그 계획을 듣고, 가담하도록 권유되었기 때문에 가입한 것이 아닌가.
답: 결코 그렇지 않다.
문: 어떤 생각으로 이 기회에 조선독립운동을 하기로 했는가.
답: 그것은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이란 것을 제창하고, 각국은 그 취지에 의하여 독립한다는 것이 신문에 나와 있었으므로 조선도 이 기회에 독립을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었다.
문: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 일반 인민은 그것에 찬동하고,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일본정부가 각성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는가.
답: 그렇다. 그 선언서를 배포하면 각지에서는 다소 폭동이 일어날 것이고, 폭동이 일어나면 일본정부는 조선의 독립을 허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 피고는 이번 기도를 한 이상은 체포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가.
답: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문: 피고가 체포되면 피고의 가족에 대해서 천도교에서 뒤를 돌보아 주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답: 그런 일은 없다.
(1919년 4월 12일, 경성지방법원)


그는 경성감옥에 수감돼 옥고를 치렀는데 노역으로 그물뜨기를 하였다. 감옥에 있으면서도 그는 1920년 도사, 1921년 공선관장에 선임되었다. 이는 교단이 그의 공적을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출소 후엔 소작농 생활... 사망일자 정확치 않아
 

17인 만기출옥(동아일보, 1921.11.5)

 
임예환은 1921년 11월 4일 경성감옥에서 만기출옥 하였다. 이날 출옥한 사람은 서대문감옥에서 풀려난 이종훈을 포함해 총 17명이었다. 이때부터 감옥 규정이 바뀌어 경기도 경찰부 사진반에서 나와 출옥자들의 사진을 찍었는데 다음날짜 동아일보에 크게 실렸다.

출옥 후 임예환은 두 달 정도 휴식을 취한 후 이듬해 1922년 1월 7일 공선관장(共宣觀長)에 선임되었다. 열흘 뒤 1월 17일에는 종리원 종법사와 황해도구(區) 순회 임무를 맡았다. 그 무렵 천도교는 노선투쟁에다 신·구파로 나뉘어 갈등이 첨예하였다. 이때 임예환은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사태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출옥 후 임예환의 동정 기사(동아일보, 1925.10.1.)

 
1925년 9월말부터 동아일보는 3·1 독립선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민족대표들의 근황을 여러 차례에 걸쳐 소개하였다. 10월 1일자에는 김창준·임예환·나인협 등 세 사람이 실렸는데 그 가운데 임예환의 근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때 천도교 도사로 계시던 임예환 선생은 지금은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용산리에서 사위를 데리고 농사를 짓고 지방교회 순시를 하며 남은 세상을 보내시는데 늙으신 몸에 호미를 들고 밭고랑에 허리를 구부릴 때 철없는 아이들인들 무심히 볼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나 소작농이시라니 가을이 또 다시 와 곡식은 익었으되 62년 동안 살아오시는 동안에 조선의 수확은 무엇인가 하고 긴 탄식을 금치 못한다 합니다."

이후 그는 법정(1934), 중화군 종리원장(1939.4), 중화교구장(1940), 선도사(1942.4)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그는 포교가 독립투쟁이라는 신념으로 천도교 포교 사업에 진력하였다.

해방 후 임예환은 월남하지 않고 고향 중화에 머물렀다.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사망일자와 사인도 정확치 않다. 보훈처가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1948년 5월 7일'로 돼 있다. 반면 이병헌의 <3.1운동비사>에는 '4282년(1949년)', 오재식의 <민족대표33인전>에는 '단기 4282년(1949년) 을축(乙丑) 4월 병사(病死)'로 나와 있다. 유족들은 그가 1948년 5월 17일 환원(사망)하여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용산리 선영에 안장되었다고 밝혔다.

정부는 1962년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90
- 옥파문화재단, <옥파 이종일선생논설집> 3, 교학사, 1984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임예환 편
- 동학천도교사전연구회 기획, 이동초 편, <동학천도교인명사전>(제1판),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15
- 천도교 중앙총부, <천도교회월보> 제63호, 1915.10.15
- 나용환, '甲辰改革 實話, 大洞江을 警務廳 삼고, 民廳에서 呼令하던 이약이', <별건곤> 제4호(1927.2.1.)
- 조규태, '3·1운동과 천도교의 민족대표 최린·홍기조·임례환'. <제5회 '민족대표 33인의 재조명' 학술회의 논문집>, 2006.3.15., 서울프레스센터
(그밖에 대한매일신보, 매일신보, 동아일보 등 기사 참조)



3.1 혁명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정운현 지음, 역사인(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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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