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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3.06 08:28 수정 2019.03.06 09:39
이명룡(李明龍)은 1873년 8월 2일 평북 철산에서 태어났다. 호는 춘헌(春軒)이며, 이창엽(李昌葉)의 육남매 가운데 외아들이다. 7세 때인 1879년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887년까지 수학하였다. 1884년 12세 때 부친이 사망한 후 이웃 신풍리에 사는 김성련과 결혼하였다.

26세 때인 1899년 그는 유상도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2년 말에는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 출신으로 부산에서 선천 선교부로 부임해 온 노세영(盧世永·Ross Cyrl)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이듬해 1903년 서면교회 집사가 되었다. 1917년부터는 덕흥교회 장로로 시무하였다.

그 후 철산에서 정주로 거처를 옮겨 포목상을 시작한 그는 여기서 번 돈을 자본으로 대금업(貸金業)을 시작하였다. 1902년 정주군 상업인들의 모임인 상업회의소 회장으로 선출된 걸로 봐 당시 그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토착자본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훗날 그는 일제가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하여 조선인 소유의 토지를 매점하려 하자 이에 반발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점차 민족의식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05인 사건으로 모진 고초

 

이명룡

 1907년 서울 상동교회에서 도산 안창호의 발기로 신민회(新民會)가 조직되었다. 양기탁·전덕기·이동휘·이동녕·이승훈 등이 주도한 전국 규모의 비밀결사체로 국권회복을 목표로 하였다. 이를 위해 민중계몽운동을 통한 실력양성과 함께 무장투쟁도 구상하였다. 즉, 장차 해외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 기지를 창건하여 항일 독립전쟁에도 대비하였다.

이명룡은 평소 사업을 하면서 알고 지내던 남강 이승훈의 소개로 1908년 3월경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당시 이승훈은 정주와 평양 일대에서 사업을 크게 하고 있었다. 이명룡은 신간회 조직 확대를 위해 정주읍 교회 목사 이상주와 홍성건 등을 신민회에 평의원으로 가입시켰다.

신민회 가입을 계기로 그는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1909년 그는 서북학회에 가입해 정주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서북학회는 서북·관서·해서지역 출신 인사들이 1908년 서울에서 조직한 애국계몽단체로 이동휘·안창호·박은식·이갑·유동열 등이 임원을 맡고 있었다. 이 단체는 1909년 초 신민회와 같이 독립전쟁전략을 최고전략으로 채택하여 해외 독립군기지 건설에 초석이 되었다.

1910년 한일병탄 후 일제는 선진문물 견학을 명분으로 '내지(內地)시찰단'을 조직했다. 이는 조선인들에게 일제의 체제 우월성을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1911년 총독부는 전국 각 도별로 조선인 실업가 8명과 군수 2명씩을 차출, 총 130명으로 구성된 일본시찰단을 조직하였다. 일제는 1909년부터 통치 전 기간에 걸쳐 다양한 직종과 계층으로 구성된 시찰단을 조직해 운용했다. 1919년 내지시찰단의 일원으로 방일한 이명룡은 구레항(吳港)에 있던 군기(軍器)제작소와 대판(大阪)의 병기창을 둘러보고 왔다.

1910년 8월 한일병탄으로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무단통치를 시작했다. 통치의 근간은 조선에 주둔한 헌병과 경찰조직이었다. 제1차 목표는 식민체제 정착과 함께 국내에서 활동하던 항일 민족세력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었다. 일제는 전국적인 경찰망과 조선인 밀정을 동원해 민족인사와 단체들의 동정을 예의주시하였다. 이때 첫 번째로 걸려든 사람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 안명근(安明根)이었다.

안중근 의거 후 북간도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계획을 추진 중이던 그는 군자금 모집 차 일시 귀국하였다. 황해도 신천 일대에서 자금 마련을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던 그는 조선인의 밀고로 1910년 12월 평양역에서 체포되었다. 이 일로 그는 군자금을 보관하고 있던 동지들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것이 '안명근 사건'(일명 '안악사건')인데 이때 황해도 일대의 민족인사 160여 명이 체포되었다. 궐석재판에서 안명근은 종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4년 4월 가출옥하였다.

안악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사과정에서 신민회 조직이 탄로가 나고 말았다. 일제는 이를 기화로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소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을 꾸몄다. 데라우치(寺内正毅) 총독이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선천역에서 내려 선교사 맥퀸과 악수를 할 때 총독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 일로 일제는 윤치호·양기탁·유동열·안태국·이승훈 등 기독교계 인사와 신민회 간부 등 600여명을 체포하였다.

정주지역 신민회 간부였던 이명룡은 이승훈 등과 함께 1911년 10월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1912년 4월 5일 경무총감부에서 1차 신문을 받았는데 신문조서 가운데 도입부를 발췌해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문: 너는 신민회를 아는가.
답: 4년 전 음력 3월경 이승훈의 권유로 입회하였다.
문: 이승훈은 그 때 무엇 하러 왔었는가.
답: 교육에 관한 일로 왕복했었다. 그 때도 왔었다.
문: 이승훈은 언제부터 알고 있는가.
답: 그 사람도 나도 장사를 하므로 그런 관계로 15~16년 전부터 아는 사이다.
문: 신민회의 목적은 무엇인가.
답: 새로운 국민을 만들어 독립하고 공화정부를 조직하는 일이다.
문: 그 방법은 어떠한가.
답: 서간도나 봉밀산에 무관학교를 세워 청년들을 교육하고 일청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기다려 독립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총독 및 오적(五賊)·칠적대신(七賊大臣)을 암살하는 데 있다.
문: 국권회복은 독립전쟁을 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왜 암살을 하는가.
답: 오적·칠적은 우리나라를 팔아넘겼고, 총독은 우리나라를 빼앗아 버렸으며, 그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이 일본에 복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지금 총독뿐 아니라 대대의 총독을 암살하고 세계에 대하여 일본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문: 신민회의 역원(役員)은 누구인가.
답 회장은 윤치호, 부회장은 안창호로, 회장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으나, 부회장은 지금은 유동열이다. 또 평안북도의 지회장은 이승훈이지만, 지금은 양예명이 대리이다.
문: 정주 신민회의 주동자는 누구인가.
답: 최성주, 홍성린, 나이다.
문: 신민회의 목적에 대해서 무엇인가 계획한 일은 없는가.
답: 총독 암살을 계획했었다.
문: 그것은 언제였는가.
답: 선천 정거장에 한 번, 정주 정거장에 세 번 갔었는데, 합해서 네 번이다.
문: 그 정거장에 갔던 것은 언제인가.
답: 날짜는 모르겠으나, 첫 번째는 가을이었는데, 선천 정거장에 갔었던 전 달이었고, 그 다음의 두 번은 총독이 서순(西巡)했을 때 선천 정거장에 갔었으며, 그 다음 날은 정주 정거장에 갔으므로 이틀 동안 계속이었다.


신문조서에 따르면, 이명룡은 이승훈의 권유로 신민회에 가입하여 정주지역 신민회 운동의 핵심인물로 활동한 것으로 나와 있다. '정주 신민회의 주동자는 누구냐?'는 질문에 그는 "최성주, 홍성린, 나"라고 답했다. 신문과정에서 그는 신민회의 목적과 지향하는 바 등에 대해 명확하게 진술하였다.

특히 그는 신민회가 무관학교를 세워 청년교육과 함께 조선총독 및 매국노들을 처단하려 했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일제가 각본을 짠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는 미수에 그쳤다. 그러나 그의 진술을 토대로 볼 때 신민회 차원에서 데라우치 암살을 추진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들 가운데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122명, 기소된 사람은 105명이어서 흔히 이를 '105인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1심에서 징역 5년~10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는데 전원 항소하였다. 2심 재판부인 경성복심법원은 1913년 3월 20일 105명 가운데 6명에겐 유죄 판결을, 99명은 무죄판결로 석방하였다. 6명 가운데 윤치호·양기탁·안태국·이승훈·임치정 등은 징역 6년, 옥관빈은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명룡은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같이 붙잡혀간 이승훈에 비하면 무죄로 석방된 것이 다행스럽긴 했다. 그러나 그는 1911년 10월 자택에서 연행된 이래 2심 판결이 날 때까지 1년 반 가량을 미결수로 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 그는 종교 활동을 하며 지냈다. 1917년부터 덕흥교회 장로로 시무하였다. 일제 당국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지목된 몸이었으나 그는 이승훈 등 신민회 동지들과 계속해 교류하면서 국내외 정세를 예의주시하였다.

당시 이승훈은 국내외의 민족진영 인사들과 폭넓게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우선 그는 1918년 9월 평북 선천에서 열린 제7회 장로교 총회 때 상해 교민대표로 참석한 여운형을 만나 파리강화회의를 계기로 궐기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듬해 2월 6일에는 상해 신한청년당의 특사자격으로 입국한 선우혁(鮮于爀)을 만나 국제정세를 경청하기도 했다. 또 오산학교 출신의 동경 유학생 서춘(徐椿)을 통해 재일 유학생들의 동향을 파악하기도 했다.

"조선은 역사를 가진 나라, 일본과 분리하여야 한다"

이런 가운데 이명룡은 언론을 통해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접하였다. 그는 1918년 12월경 평소 가까이 지내던 장로교의 이승훈·양전백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어 1919년 2월 선천 사경회(査經會) 때 이승훈을 만나 같이 자면서 독립선언 및 동지 규합 문제를 재차 논의하였다.

그러던 중 이승훈은 최남선으로부터 급히 상경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2월 12일 상경하였다. 서울에서 송진우, 최남선, 최린 등을 만나 천도교 측에서 추진하고 있는 독립운동 계획을 들은 이승훈은 2월 14일 평양에서 길선주 등 장로회 지도자들을 만나 3.1거사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어 평북노회가 열리던 선천으로 내려가 양전백 목사의 집에서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3.1 거사계획을 재차 설명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이명룡을 비롯해 유여대, 양전백, 김병조 등 4인은 민족대표로 동참할 것을 약속했다.

한편 이명룡은 2월 15일 상경하여 재차 상경해 있던 이승훈과 함께 행동했다. 그러나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그는 상경 후의 행보에 대해 일절 함구하였다. 심지어 양전백의 집에서 유여대, 김병조 등과 만난 사실조차도 부인하였다. 자신이 만난 사람은 오직 이승훈 한사람뿐이며 3월 1일 태화관 독립선언식에 참석한 사실만 인정하였다. "조선을 독립시키려" 상경한 그가 15일 가량 서울에 머물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는 '105인 사건'을 경험한 그가 다른 관련자들을 보호하기 후해 일부러 위증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훗날 그는 그때의 일을 두고 "이승훈, 양전백씨와 나는 다같이 105인 사건에 관계되어 한 차례씩 죽었다 살아나온 목숨이므로 우리는 그때 죽었던 셈 치고 다시 나라를 위해서 일 하자고 맹세하고 즉시 이승훈씨를 서울로 올려보냈다"고 회고한 바 있다.(동아일보, 1949.3.1.)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불교대표 한용운의 간단한 식사(式辭)에 이어 참석자들이 만세 3창을 했다. 곧이어 일경이 들이닥쳐 이날 참석한 민족대표 29명 전원을 남산 경무총감부로 연행하였다.

 

이명룡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9.23.)

 
이후 1년 반에 걸쳐 검경의 심문과 재판이 진행되었다. 일행은 5월 6일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2월 경성감옥으로 이감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최종심에서 그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최조 및 재판 과정에서 그는 조선독립의 미래를 낙관하면서 자신의 소신을 당당하게 밝혔다. 신문조서 가운데 몇 대목을 발췌해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문: 피고는 조선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는가.
답: 그렇다. 일본과 각국이 같이 독립을 승인하여 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문: 앞으로도 또 계속하여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는가.
답: 나는 일한합병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독립할 생각을 가졌었고 앞으로 또 독립운동을 하고 안하고는 아직은 미래의 일이니까 말할 수 없다.
(1919년 3월 14일, 경무총감부에서)

문: 독립선언서는 어떠한 취지라고 하던가.
답: 조선은 역사를 가진 나라인고로 일본과 분리하여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취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문: 그 선언서를 배포하면 인민은 그것을 보고 자극되어 혹은 소요도 하고 혹은 폭동도 하여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가.
답: 그렇다. 경성에 선언서를 배포하여 일반 인민이 그것을 알고 소동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들의 계획에 이익이 될 줄로 생각하였다.
(1919년 4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명룡은 1921년 11월 4일 마포 경성감옥에서 만기출옥 하였다. 막 감옥에서 나온 애국지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조차 없었다. 이명룡에 따르면, 손병희가 사재를 털어 1인당 50원씩 여비로 주었다고 한다. 이 돈은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다. (경향신문, 1954.2.28.)

출옥 후 그는 각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우선 그는 이상재 등이 주도하던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다. 또 1926년 5월에는 정주산업조합 발기 총회에 참여하는데 발기위원 10명 가운데는 나중에 조선일보 사장이 된 방응모도 포함돼 있었다. 출옥 후에도 그는 정주지역 사업계에서 계속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931년에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큰아들(경화)이 설립한 신안(新安)학교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또 정주군 학교평의회 위원으로도 참여하였다. 1931년 3월 25일 열린 학교평의회에 참석해 일본인 교사 대신 조선인 교사를 적극 채용할 것을 요청했다. 당시 일본인 교사들의 경우 조선인 교사들보다 1.5배 이상의 월급을 받았으며, 사택료 등 별도의 경비를 지급해 낭비요인이 많았다. 당시 이 문제는 비단 정주 지역뿐만이 조선 전역에서 논란이 됐던 사안이다.

해방 후엔 월남... 심산 김창숙과 야당 활동

8.15 해방이 되자 고당 조만식(曺晩植)은 그해 11월 3일 평양에서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였다. 당수에는 조만식이 만장일치로 선출되었으며, 부당수에 이윤영(李允榮)·최용건(崔鏞健), 정치부장에 김책(金策)이 뽑혔다. 그러나 그해 12월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졌을 때 당수 조만식이 반탁을 결의하자 부당수 최용건 등에 의해 쫓겨나면서 당은 변질되고 말았다. 찬탁을 거부하자 조만식은 소련군정에 의해 연금되었고 더 이상의 정치활동을 불가능했다.

조선민주당의 최고고문으로 추대된 이명룡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련군정과 김일성의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웠다. 1947년 4월 7일 가산을 몰수당하는 등 북한정권의 탄압을 받게 되자 그달 25일 그는 가족과 함께 월남하였다.

이후 그는 서울 홍제동에 기거하였는데 돌보는 이도 없는데다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웠던 모양이다. 각계의 유지들이 그를 초청해 위로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조선민주당에서 같이 활동하던 이윤영(이승만 정권의 사회부장관 역임), '105인 사건' 때 같이 옥고를 치른 유동열(미군정 시절 통위부장 역임), 정일형 등 각계의 유지 20여명의 발의로 고급양식집 미장(美莊)그릴로 그를 초청해 위로하였다.

월남 후 그는 애국동지원호회 고문, 3·1정신성양회 고문,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 이준열사기념사업회 회장 등을 맡아 애국선열 현창사업에 앞장섰다. 또 심산 김창숙 등과 함께 야당 활동을 하면서 야권연합을 위해 힘썼다. 특히 1956년 이승만 정권이 김구, 윤봉길, 이동녕 등 임정 선열 7위가 잠들어 있는 효창공원에 운동장을 만들려고 하자 앞장서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무렵 그는 월간잡지 <청사(靑史)> 발간을 주도하였다. 이 잡지는 청소년과 일반국민들에게 우리 역사를 알기 쉽게 알리기 위해 창간했는데 사학자와 유지들로 편찬위원회를 조직했다. 김상기와 김도태 등이 편찬위원을, 그는 회장을 맡았다. 1955년 6월에 창간호를 냈는데 그는 '민족정기를 앙양하자'는 글을 기고하였다.

 

이명룡 사회장 관련 보도(동아일보, 1956.11.21.)

 
80이 넘어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는 1956년 11월 12일 충무로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4세, 사인은 급성기관지염이었다. 장례는 12월 20일 오전 중앙청 후원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경향신문>은 11월 17일자에서 '이명룡옹의 생애와 그 교훈'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고생을 의무로 알고 영예로 삼았으니 실로 무명영웅의 모습이요, 국민의 사표(師表)"라고 극찬하였다.

1962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그의 묘소는 강북구 수유동 통일교육원 내에 있다. 정주군민회는 2014년 5월 7일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소재 정주동산에 이명룡, 이승훈, 김병조 등 정주 출신 민족대표 3인의 추모비를 세웠다.

 

경향신문에 실린 이명룡의 생애에 대한 평가(1956.11.17.)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권, 1987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90
- 김요나 <나라사랑·교회봉사로 이어온 3대 그리고 영원히> 순혜원, 1995
- 경향신문, '이명룡 옹의 생애와 그 교훈', 1956.11.17.
- 유준기, '3·1독립운동과 기독교계의 민족대표-이명룡·박동완의 활동을 중심으로, <제4회 민족대표 33인 재조명 학술회의 자료집>, 2006.3.15
(그밖에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매일신보, 동아일보, 연합신문, 경향신문, 연합뉴스 등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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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