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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3.05 08:46 수정 2019.03.05 08:46
민족대표 33인은 성직자이거나 혹은 종교계와 관련을 맺고 있는 인사들이다. 비성직자 가운데 이종일은 천도교의 비밀결사체인 천도구국단 단장, 천도교 계열 인쇄소 보성사 사장 출신이며, 최린은 천도교 산하의 보성고보 교장 출신이다. 기독교계 인사 가운데 박희도는 YMCA 간사로 있었으며, 박동완은 기독신보사 서기 출신이다. 순수 민간인 출신은 이갑성 한 사람뿐이었다. 3.1거사 만 30세였으며, 당시 세브란스의전(醫專) 부속병원 사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순수 민간인 출신... 독립선언 배포 역할

 

이갑성

 연당(硏堂) 이갑성(李甲成)은 1889년 대구에서 이기덕(李基德)과 파평 윤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13세 때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다. 13~15세까지 대구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1904년경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경신학교와 세브란스 의학교 약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3학년을 다니다 중퇴하였다. 의전 재학시절 학비는 세브란스 병원 사무원으로 근무하면서 받은 월급으로 해결했다. 그는 1915년부터 세브란스병원 제약주임으로 근무하였다.

세브란스병원 사무원으로 있던 이갑성이 민족진영에 가담하게 된 것은 기독교와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신문조서에 따르면, 그는 14~15세 때부터 예수교(장로파)를 믿게 됐다고 한다. 그 후 미션스쿨인 세브란스 의학교·의전을 다니면서 기독교 인사들과의 교류가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갑성이 3.1혁명에 참여하게 된 직접 계기는 고종이 승하(1919.1.21.) 한 지 2주일 뒤 무렵 이승훈의 권유를 받고서였다. 두 사람은 같은 장로교파 소속으로 7~8년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러나 이갑성은 그 이전부터 학생들과 독립운동 논의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학생들과 선이 닿던 사람은 YMCA 간사로 있던 박희도였다. 그는 박희도한테서 학생들의 움직임을 전해 듣고 YMCA 청년부 회원들을 규합하기로 뜻을 모았다. 박희도는 경성의학전문학교 2학년생 한위건을, 이갑성은 경신학교 후배인 연희전문 학생 김원벽을 만나 시내 각 전문학교의 졸업생과 재학생 가운데 대표자들을 수소문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하였다.

일차적으로 박희도는 1월 26일 보성전문 졸업생 주익, 연희전문 재학생 윤화정, 보성전문 강기덕, 연희전문 김원벽, 경성전수학교 윤자영, 세브란스의전 이용설, 경성공업전문학교 송종우, 경성의전 김형기 등 8명을 관수동 대관원(大觀園)으로 초대하였다. 박희도는 이들에게 YMCA 가입을 권고하면서 그 자리에서 독립운동 건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당시 학생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김원벽이 처음에는 신중론을 폈으나 결국 그도 찬성하면서 의견이 하나로 모아졌다. 이들은 2월 20일을 전후하여 독립선언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이갑성은 남대문교회와 세브란스의전 학생들을 중심으로 또 한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2월 12, 14일 이틀간 음악회를 핑계로 모임을 갖고 전문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과 선언서는 주익이 기초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때 박희도가 이승훈을 통해 천도교와 기독교측이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할 가능성이 있음을 전하면서 학생들의 독자적인 행동을 자제할 것을 요청했다. 2월 20일 각 전문학교 대표들은 승동교회에서 제1회 학생간부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박희도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한고 종교계 인사들과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하였다.

최남선의 요청을 받고 2월 12일 정주에서 상경한 이승훈은 천도교 측 인사들을 만나 독립선언 건을 상의하였다. 천도교측은 기독교계 내에서 신망이 높던 이승훈에게 장로-감리회 양 교단의 제휴를 요청하였다. 이에 이승훈은 평소 아끼던 이갑성과 상의한 후 이어 김병조, 이명룡, 양전백, 유여대, 길선주, 손정도 등과 상의하였다. 그 후 이승훈은 재차 상경하여 2월 20일~22일까지 총 3차례에 걸친 논의를 거쳐 천도교와의 제휴를 최종 결정하였다.

1차 회의는 2월 20일 협성학교 사무실에서 이승훈, 박희도, 정춘수, 오화영, 신홍식, 오기선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는 일본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기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또한 독립청원이냐, 독립선언이냐를 두고 논의 끝에 오화영 목사의 제안대로 기독교 측에서 연서한 독립청원서를 일본정부에 보내기로 하였다. 동지 규합 문제는 오화영은 개성과 춘천지구에서, 정춘수는 원산 지구에서, 나머지 사람들은 서울에서 동지들을 모집하기로 결정하였다. 천도교와의 연대문제를 놓고 박희도와 정춘수가 교리상의 이유 등을 들어 반대 입장을 폈다.

2차 회의는 2월 21일 남대문 밖 이갑성의 집에서 열렸다. 이날 처음으로 양 교파가 한 자리에 모였는데 장로교 측에서는 함태영, 이승훈, 안세환, 김세환, 김필수, 오상근 등이, 감리교 측에서는 박희도, 오화영, 신홍식, 오기선 등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청원서 초안 작성 문제를 비롯해 종파를 초월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천도교와의 제휴 문제가 상당한 진척을 보였다. 이밖에도 국제정세와 강화회의에 대한 정확한 정보 파악을 위해 현순을 상해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지방의 동지규합을 위해 이갑성, 김세환, 신홍식, 이승훈을 지방순회위원으로 추가로 임명하였다.

3차 회의는 2월 22일에 개최되었는데 이 자리에서는 양 교단의 연대문제가 최종 결정되었다. 합의 결과는 2월 24일 손병희에게 전달되었으며 이후 양측은 3.1거사의 진행절차와 역할을 분장하였다. 선언서 및 청원서 작성과 인쇄는 천도교 측에서 맡고 미국 대통령 및 강화회의 참전국 대표들에게 청원서를 전달하는 일은 기독교 측에서 맡기로 했다. 또 청원서를 일본정부에 제출하는 일은 천도교 측에 맡고 대표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정부와 직접 담판하는 일, 독립선언서 배포와 3월 1일에 학생과 시민을 동원하는 일은 기독교 측에서 맡기로 정하였다.

2월 27일 정동교회 목사 이필주의 집에서 기독교 대표자들의 모임이 있었다. 이날 모임의 목적은 함태영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 초안과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보낼 '독립청원서' 초안을 심의하는 일이었다. 참석자들은 이 초안에 서명한 후 완성본이 나오면 서명하도록 함태영에게 인장을 맡겼다. 이 자리에서 기독교 측 대표는 최종 16인으로 하며, 서명자 가족에게는 부양료를 지불하기로 정하였다.

기독교 측의 일원인 이갑성은 독립선언서 배포에 적극 나섰다. 2월 28일 김창준으로부터 선언서 약 600매를 받아 그날로 5매를 세브란스의전 학생 이용설에게 교부하였다. 3월 1일에는 400여 매를 자기 사무실에서 역시 세브란스의전 학생 이용상에게 교부하였으며, 그중 200매는 대구 이만집 목사에게, 나머지 200매는 마산의 임학찬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또 김병수를 통해 군산의 박연세에게 200매를 보내도록 하였으며, 서울에서는 보성전문 학생 강기덕에게 1,500매를 교부하여 배포토록 하였다.

거사 전날인 2월 28일 밤, 가회동 손병희 집에서 기독교·천도교·불교 대표자회의 겸 최종 점검회의가 열렸다. 이갑성도 참석하였다. 이날 모임에서는 거사장소를 당초의 탑동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만에 하나 발생할지도 모를 시위 군중과 일경 간의 충돌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이갑성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9.25.)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예정대로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마치고 참석자 29명 전원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연행 당일부터 경찰의 취조가 시작됐다. 구류 13일 만에 전원 기소되었고, 5월 6일 33인은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이갑성 역시 여러 차례에 걸쳐 일경과 검사, 판사로부터 신문을 받았다. 그 가운데 3월 8일, 4월 29일 신문내용 가운데 몇 대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문: 피고는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는가.
답: 독립운동은 그때 봐야 알 것이다.
(1919년 3월 8일, 경무총감부에서)


문: 피고는 어찌 하여 조선독립을 희망하는가.
답: 일본정부가 조선인에 대하여 조선어로 교육을 시키지 아니하고 조선역사를 가르치지 않으며 징병 의무를 부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정치에도 관여시키지 않고 열등한 대우를 하므로 독립을 희망한다. 또 이번에 구류되어서 더욱 그런 생각을 강하게 하였다. 그것은 내가 감옥에서 금수와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매일 간수들은 이놈아 저놈아 욕설을 하면서 구타할 뿐 아니라 나에게 1일 3회씩 식사를 차입하므로 내 집의 형편을 생각하여 1일 1회씩만 차입하게 해달라고 간수에게 부탁하였으나 간수는 건방진 놈이라고 욕설을 하면서 거절하였다. 감옥은 지옥 이상의 지옥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문: 피고는 조선이 독립국으로서 잘 감당하여 갈 줄로 생각하는가.
답: 그것은 조선이 독립이 된다면 잘 하여 갈 줄로 안다. 조선이 일본에 반항해서는 국가 유지상 곤란할 것을 알고 있으므로 조선이 독립국이 된다 하더라도 역시 일본의 원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황인종이 단결하여 백인종에게 저항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들과 같이 서양인과 가까이 하고 있다고는 하나 일본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일본정부가 우리들을 배일당(排日黨)이라고 지목하고 있는 것은 큰 오해다. 나는 일본이 조선독립을 승낙하여 준다면 조선은 일본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더욱 친할 것이며 나의 감정도 해소될 것이므로 황인종 전체가 단결되리라고 생각되어 이번 (3.1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1919년 4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2심 재판에서 그는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감옥 안에서 그는 동지들과 함께 옥중투쟁을 벌였다. 그의 술회에 따르면, 구속된 지 1년 후 가출옥이 결정됐으나 이를 거부하고 3.1혁명 1주년 때 옥중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경향신문, 1981.3.26.) 그는 1922년 5월 5일 경성감옥에서 오화영과 함께 만기로 출옥하였다. 출옥 후 고향으로 내려가자 대구지역 유력자들이 성대한 환영회를 베풀어주었다.

 

이갑성과 오화영의 만기출옥 관련 보도(동아일보, 1922.5.6.)

 

출소 후엔 물산장려운동 등 활동

출옥 후에도 그는 민족진영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1920년대 국내에서는 민족우파를 중심으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민립(民立)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두 운동 모두 별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오래 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숭실대학교는 1907년에 이미 대학부를 설립하였고, 이화학당 역시 1910년에 대학부를 개설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우민화 정책으로 1915년 '개정 사립학교규칙'과 '전문학교 규칙'이 공포되면서 모두 '각종 학교'로 격하되었다. 이 때문에 1907년 국채보상운동 때 모금된 600만원을 기금으로 하여 대학설립을 위한 민립대학 기성회를 조직하였지만 총독부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20년대에 와서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다시 불이 붙었다.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발기인 47명이 1922년 12월 23일 남대문 식도원에서 조선민립대학 기성준비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이갑성은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듬해 3월 29일부터 3일간 열린 민립대학기성회 창립총회에서 이갑성은 중앙집행위원에 피선되었다. 기성회는 1차로 400만원을 모금하여 법학부·경제학부·문학부·이학부를 설립하고, 2차로 총 1,250만원으로 여기에 공학부·농학부·의학부를 추가하여 총 7학부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논란이 된 이갑성의 민립대학 강연 관련 보도(시대일보, 1924.4.15.)

 
1923년 5월 10일 경성부·지방부 발기를 시작으로 민립대학 지방부가 설치되었는데 이갑성은 황해도 지방 순회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4년에는 평안남북도의 특파위원으로 파견돼 선전 및 강연활동을 하였다. 4월 12일 평양 천도교회당에서 '우리의 요구'란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는데 청중이 천여 명에 달했다. 강연 도중 영국이 식민지 인도의 물산을 착취한다는 대목에 이르러 일경은 돌연 강연 중지명령을 내렸다.(시대일보, 1924.4.15.) 그 후 그는 강연 도중에 두 차례나 체포돼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1923년·1924년의 대홍수로 기금모집이 제대로 되지 않은 데다 총독부의 집요한 방해책동 때문이었다. 여기에다 중앙과 지방의 조직관리 미비에다 회원모집 등 제반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 민립대학 설립이 좌절되자 일제는 민심수습용으로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다. 결국 일제 통치하 조선에서는 경성제대 이외에 다른 대학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물산장려운동은 1920년 8월 조일식, 오윤선, 김동원, 김보애 등이 평양에서 조직한 조선물산장려회로부터 시작하였다. 이들은 그해 12월 평양기독교청년회관에서 선전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 운동이 전국적 차원에서 본격화한 것은 1923년 1월 9일 유진태, 이종린, 백관수 등 20여 단체의 대표들이 서울에서 조선물산장려회발기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을 개시하면서부터다. 이갑성은 1월 20일 협성학교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이사로 선출되었다.

조선물산장려회는 창립 직후 맞이하는 구정 때부터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즉 남자는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를 토산품 또는 가공품을 염색하여 입고 음식 및 일용품은 가능한 한 토산품을 사용하도록 결의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 사람 조선 것'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강연회와 가두시위를 하며 선전활동을 벌였다. 활동 개시 후 전국에서 열렬한 호응을 얻었고, 조선기업의 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그러나 이 열기는 채 1년도 되지 못해 식고 말았다. 토산품의 가격급등으로 기업과 상인은 큰 이익을 남긴 반면 서민들은 손해를 보게 되었다. 여기에다 사회주의자들의 거센 비판도 한 몫을 했다. 그들은 식민지하에서 민족적 산업기반 구축은 불가능하며 설사 민족기업이 생겨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가진 자를 위하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물산장려회는 소비조합 조직, 조선물산진열관 설립, 조선물산품평회 개최 등 새 사업을 시도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결국 막을 내렸다.

1924년 5월 북감리파 총회 및 기독교청년회간부협의회에 조선대표로 참석한 신흥우는 귀국 길에 호놀룰루에 들러 이승만을 만났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조선독립을 위해 동지회를 결성하여 활동 중이라며 국내에서도 동지회와 같은 목적의 단체를 조직하여 조국광복에 힘써달라고 부탁하였다. 귀국 후 신흥우는 이듬해 3월 23일 자신의 집에서 이상재 등 9명이 모여 흥업구락부를 조직하였다. 모임의 명칭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친목단체로 위장하였다.

흥업구락부는 동지회의 국내지부 격으로 미국의 이승만과 연결되어 있었다. 게다가 상해 임시정부와 이승만에게 거액을 모금해 보내는 과정에서 일제의 정보망에 노출되었다. 1937년 가을 일제는 윤치호, 장덕수, 유억겸, 신흥우 등 핵심인물들을 1차로 검거하였다. 이어 1938년 5월 22일에는 구자옥, 안재홍 등 흥업구락부 간부회원 60여명 등 모두 100여명을 대량 검거하였다. 일경은 구자옥 등 52명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흥업구락부사건'이다. 흥업구락부 간사로 활동하던 이갑성은 이 일로 나중에 7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국내에서는 실력양성론과 함께 타협적 민족주의가 등장하였다. 김성수, 이광수, 최린 등이 주장한 자치론, 참정론 등이 그것이다. 총독부 체제 하에서 항일투쟁이 쉽진 않았으나 이는 분명히 변질된 민족주의였다. 결국 민족주의 진영은 타협-비타협으로 분열되었는데 비타협 진영은 사회주의 세력과 손잡고 사상 첫 좌우합작을 이뤄냈다. 1927년 2월에 창립된 신간회가 그것이다. 1927년 2월~1931년 5월까지 존속한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120~50여 개의 지회가 있었다. 회원은 2만~4만 명에 달했으며, 일제하 가장 규모가 큰 반일사회운동단체였다.

이갑성은 1927년 1월 초순경 천도교 간부 권동진과 홍명희, 박동완, 백관구 등이 조선일보사에서 회합하여 신간회 발의에 합의하였다. 이들은 조선민흥회 발기인들과 접촉하여 강령을 초안하여 창립준비를 서둘렀다.

민족적 단결, 비타협주의 등을 표방한 신간회 강령 초안은 총독부의 허가를 받을 수 없어 수정이 불가피했다. 이갑성은 강령 수정작업에 참여하였으며, 이승훈, 박동완, 이상재 등과 함께 기독교계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발기인은 이들을 포함해 신석우·안재홍 등 조선일보사계가 중심이 된 34명이었다. 7월 10일 경성지회를 설치하였는데 지회장에는 한용운이 임명되었다.

당시 이갑성은 흥업구락부원, YMCA 임원들과 함께 조직기반을 다져 신간회 운동에 기독교세력을 규합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신간회는 일제의 예속에서 벗어날 것을 외치면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상규명을 위해 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

민중대회 중지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급기야 일제는 칼을 빼들었다. 일제는 조병옥, 권동진, 김병로 등 신간회 간부와 근우회 간부 등을 대거 검거하였다. 이갑성 역시 이 일로 검거돼 6개월간 수감생활을 하였다. 출옥 후 자동차수리업소인 경성공업사 지배인으로 있던 그는 이듬해 1931년 상해로 망명하였다. 1937년 일경에 체포돼 본국으로 압송될 때까지 근 7년간의 행적을 두고 훗날 논란이 제기되었다.

정계 투신해 박정희 쿠데타 지지... 일제 밀정설 논란도

해방이 되자 이갑성은 정계로 투신하였다. 흥업구락부에서 활동한 인연으로 그는 이승만 계열에 속했다. 1945년 10월 반탁운동을 위해 이승만이 결성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참여하였으며, 1947년 10월 미군정이 설치한 남조선과도입법위원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참여하였으며, 1950년 5월 국민회 소속으로 대구에서 제2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1년 5월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이시영 부통령이 사임하자 당시 여당 역할을 하던 신정동지회의 지명으로 제2대 부통령 선거에 나섰으나 야당 측 김성수 후보에게 78표 대 75표로 3표차로 석패하였다.

한국전쟁 기간인 1952년 10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전시내각의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으나 국회에서 인준이 부결되었다. 1952년 독립촉성중앙회는 이름을 자유당으로 바꿨다. 그는 자유당 정무부장(1953) 등을 맡아 자유당 창당에 적극 앞장섰으며, 이승만 정권의 핵심세력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문에 4.19혁명 후 그의 전력이 문제가 됐다. '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 서울시조사위원회'는 그가 1960년 3.15부정선거 당시 자유당 선거대책 최고고문 겸 중앙위원을 지낸 점, 이승만 후보의 찬조연설을 한 점 등을 들어 공민권 제한 심사문제를 거론하였다.(동아일보, 1961.2.25.)

4.19혁명으로 들어선 민주당 정권 역시 1년 만에 막을 내렸다. 박정희 소장 일파는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찬탈하였다. 이갑성은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크게 염려하던 군인들에 의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은 크게 다행한 일"('3.1운동과 나', <최고회의보>, 1962.6)이라며 5.16쿠데타를 적극 찬양, 지지했다.

이후 그는 헌법 개정 국민투표관리 위원장(1962), 공화당 창당 발기위원(1963) 등을 맡아 박정희 정권 창출에 기여하였다. 그런 그가 1963년 5월 돌연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경향신문, 1963.5.28.) 그러나 이후에도 그는 한동안 공화당 총재 고문(1963~1967)을 지냈다. 이밖에도 독립유공자 공적심사(1963)에 참여하였으며, 광복회 초대·2대 회장(1965~1970)을 역임했다.

그를 두고 일제의 밀정설이 제기된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그가 초대 광복회장에 취임하기 직전에는 한국·동아일보 두 일간지 지면에, 2대 광복회장에 취임한 직후에는 <대한일보> 광고란을 통해 그의 밀정설이 제기됐다.

광고를 낸 사람은 임정 국무위원 출신의 조경한과 임정 서무국장 출신의 임의탁이었다. 이들은 광복회 비상총회 명의의 성명서에서 이갑성이 △이와모토(岩本正一)로 창씨개명한 사실 △상해 체류 시 밀정설 △미츠비시(三稜)회사 만주 신경(新京) 소장 설 △조선총독부 마루야마 경무국장의 촉탁설 등을 거론하며 이갑성의 친일 의혹을 제기했다.

이후로도 유우석, 김성수 등 독립운동가들이 이갑성의 친일 의혹을 제기했다. 관련 기사와 책도 잇따라 나왔으며, 심지어 국회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갑성은 생전에 의혹을 전면 부인하면서 조경한 등 3명에 대해서는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였다. 그러나 의혹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물론 미츠비시 신경(新京) 소장 설, 경무국장 촉탁 설 등은 아직도 확인된 바 없다.

2000년대 들어 몇몇 역사학자 등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탐구를 시도하였다. 유준기, 허동현, 김행식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기존에 제기된 이갑성의 친일의혹은 모두 근거 없는 모함, 또는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하였다. 창씨개명 건은 그와는 무관한 일이며, 상해 시절 그는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고, 미쓰비시 신경 소장설도 근거가 없다는 주장했다. 또 경무국장 촉탁 설은 그 시기에 이갑성이 국내에서 민족운동에 열중하던 시기여서 납득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도 아닌 독립운동가들이 그를 친일 변절자라고 주장한 것은 왜일까? 허동현은 광복회 주도권 다툼에서 밀린 조경한 등이 개인감정 차원에서 음해했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덧붙여 정치적인 배경도 거론했다. 즉, 5․16 이후 군사정부나 1980년 신군부가 헌법 전문에 3․1운동 정신만 강조하고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을 표방하지 않은 것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갑성의 유족들 역시 이와 비슷한 입장을 편 바 있다. 즉, 광복회 설립과 회장 선거 과정에서 불거진 음해성 주장이라는 얘기다. 이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갑성에 대한 친일의혹 제기는 중단돼야 한다.

33인 가운데 제일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그는 1981년 3월 25일 94세로 별세했다. 1주일 전 신병치료차 수안보 온천에 갔다가 졸도하여 곧장 집으로 돌아왔으나 계속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가 결국 숨을 거뒀다. 1979년 3.1절 행사를 끝으로 대외활동을 중단했는데 사망 3개월 전부터는 실어증까지 겹쳐 대화조차 하지 못했다. 장례는 3월 29일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첫 부인 차숙경(車淑卿)은 그보다 먼저 1948년 8월 18일 사망했으며, 재취 부인 최마리아는 1997년 2월 24일 사망했다. 이용희 전 통일원장관은 그의 차남이다.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수여했다. 묘소는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183번)에 마련됐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권, 1987
- 민족문제연구소, <청산하지 못한 역사 2>, 민족사, 1994
- 정운현,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개마고원, 1999
- 이갑성, '3.1운동과 나', <최고회의보>, 1962.6
- 유준기, '이갑성의 항일 독립운동과 문화투쟁', 33인유족회, 2006.12.5
- 허동현, '해방 후 이갑성의 삶 재조명', 33인유족회, 2006.12.5.
(그밖에 매일신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한성일보, 경향신문 등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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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