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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3.04 08:47 수정 2019.03.04 08:47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33인 가운데 참석자는 29명이었다. 길선주, 정춘수, 유여대, 김병조 등 기독교계 인사 4명은 불참하였다. 이날 유여대는 김병조와 함께 평북 의주에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33인 가운데 3월 1일 당일 현장에서 시위를 주도한 사람은 이들뿐이다. 유여대는 당일 현장에서 체포됐으나 김병조는 상해로 망명하여 검거되지 않았다. 의주지역의 3.1혁명은 유여대의 지도와 영향력에 힘입은 바 크다.

일신학교 설립 등 교육분야에서 활동

 

유여대

 낙포(樂圃) 유여대(劉如大)는 1878년 12월 10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부친 유택현(劉澤賢)과 모친 윤치현(尹致賢) 사이에 3대 독자로 어려서부터 향리에서 한학을 사숙하였다. 17세가 되던 해인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 의주, 평양 등 서북지역이 전쟁터가 되자 잠시 고향을 떠나 피신하였다. 이듬해 피난지에서 돌아와 자택에 서당을 열고 학동들을 가르치며 훈장노릇을 하였다. 고매한 인격과 뛰어난 학문으로 주변에서 '유이학(劉理學)'으로 불렸으며, 20세 때 효자문을 받기도 했다.

그가 처음 사회활동에 나선 것은 교육 분야였다. 1899년 휘트 모어 선교사, 장유관, 김창건 등과 함께 의주지역 최초의 신식 교육기관인 일신(日新)학교를 설립하여 그 학교의 한문교사를 맡았다. 1907년 의주읍 서교회에서 장유관 등의 발기로 모금을 하여 양실(養實)학원을 확장할 때도 최광옥 등과 함께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그 무렵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그는 지역유지들과 함께 5환(圜)을 의연금으로 내기도 했다. (대한매일신보, 1907.11.5.)

20세 때인 1898년 그는 친구 안승원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교하여 의주 서(西)교회에 출석하였다. 미 북장로회 선교사 휘트 모어(한국명 魏大模)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905년 서교회에서 운천교회가 분립하고 부설학교를 설립할 때 참여하여 교사를 맡았다. 1910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6월 제8회로 졸업하였는데 그해 8월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동(東)교회를 담임하였다. 만 37세 때였다.

의주 만세 시위의 주동자

1917년 9월 제6회 조선장로회 총회에 평북노회 총대로 참석하여 안식년 휴가 중인 휘트 모어 선교사 대리로 학무위원을 맡았다. 1918년 11월 평북노회에서 의산노회(義山老會)가 분립될 때 그는 의산노회에 속하여 창립노회에서 부회계로 선임되었다. 이듬해 2월 10일 선천에서 열린 평북노회를 방문하여 이승훈과 양전백을 만나 민족대표로 참여하게 된 것도 실은 새로 분립된 의산노회의 회계처리 일로 갔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3월 1일 체포될 당시 그가 담임목사로 있던 의주 동(東)교회의 교인 수는 300여명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의주에서 거사를 이끌기로 작정하였다.

"금년 2월 10일경 선천(宣川) 평북노회(平北老會)가 끝나는 날에 나는 선천으로 갔다. 의주(義州) 방면의 노회는 의산노회(義山老會)라고 부르는데, 전에 평북노회에 속하여 있었는데 작년에 위 노회로부터 분리되어서 작년까지의 전도회가 남아 있어서 이번에 분리하기로 되어 있어서 나는 의산노회의 회계를 담임하고 있으므로 그 돈을 받기 위하여 간 것인데, 선천에서 양전백(梁甸伯)의 집에서 동인을 만났던바 동인이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독립선언서의 대표자로 되면 어떻겠느냐고 하므로 나는 원래 조선독립의 의사가 있었으므로 거사를 같이 할 것을 약속하였던 바, 양전백은 독립선언은 경성(京城) 및 각지에서 하기로 되었는데 그 운동을 하기 위하여 자기는 경성으로 갈 생각이므로 너도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묻기에 나는 찬성은 하겠으나 경성으로 가는 것은 어려우므로 의주 방면은 일을 (내가) 담임하겠다고 말하여 두었다." (1919년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2월 10일 양전백을 만나 3.1거사 참여 의사를 밝힌 그는 이후 의주에서 거사준비에 착수했다. 2월 13일 김병조 목사와 함께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하였으며, 2월 17일에는 정명채·김두칠을 만나 3.1거사 동참을 권유해 승낙을 받아냈다. 2월 27일 도형균으로부터 거사일자를 전달받고는 이튿날(2.28) 양실학교에서 신도 등 2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서 발표를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정명채·김두칠에게는 독립선언서 등사를 맡겼으며, 안석응에게는 도청 등 관공서에 선언서 배포를 부탁하였다. 거사 하루 전날인 28일까지 서울에서 선언서 인쇄물이 도착하지 않자 임시로 2.8독립선언서를 등사해 쓰기로 했다.

3월 1일, 마침내 거사일이 밝았다. 이날 오후 2시반경 의주 읍내 서(西)예수교회당 부근 공터에 양실학교 교사와 학생 등 주민 700~80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선언식을 주재한 사람은 유여대 목사였다. 식순에 따라 일행이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안동현(安東縣)에 거주하던 김병농 목사가 조선의 독립을 성취하도록 하나님께 비는 기도를 드렸다. 이어 이어 유여대 목사가 '이로부터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는 식사(式辭)를 마치고 선언서를 낭독하려할 때 마침 서울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가 도착하여 그것을 낭독하였다. 끝으로 일행은 아래의 '독립창가'를 합창하였다.

독립선언을 한 것은 3월 1일 오늘이라.
반도의 강산 너와 내가 함께 독립만세를 환영하자.
충의를 다하여 흘리는 피는 우리 반도의 독립의 준비라.
4,000년 이래 다스려 온 우리 강산을 누가 강탈하고
누가 우리의 정신을 변하게 할 수 있으랴.
만국평화회의의 민족자결주의는 하나님(天帝)의 명령이요.
자유와 평등은 현시(現時)의 주의(主義)인데
누가 우리의 권리를 방해할 소냐.


창가 합창이 끝나자 다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고는 학생을 선두로 가두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이 때 헌병들이 달려와 해산을 강요했으나 오히려 시위대는 점점 더 늘어 2000여 명에 이르렀다. 행사 직후 일제 관헌들은 유여대 목사 등 주동자 7명을 헌병대로 연행했다.

이튿날 천도교 측이 가세하면서 시위대는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3월 3일에는 의주 일대의 1200여 명이 읍내로 집결하여 시위운동을 벌이자 헌병대가 출동하여 총검과 쇠갈고리로 진압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위대는 결사항쟁을 다짐하고 몇 개의 시위대를 조직하여 헌병대와 관공서로 몰려가 탄압에 항의하고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3월 4일에도 양실학교 학생 600여 명이 시위를 벌였고, 읍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3월 6일까지 계속되었다.

의주 만세시위는 3월말 들어 다시 불이 붙어 4월초까지 계속됐다. 30일 영산시와 수구진, 평구진에서 각각 200~400명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31일 고령삭면 영산시장에서 4000명이 시위를 벌여 헌병주재소를 파괴하였다. 이에 일경 11명이 출동, 발포하여 시위대 4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하였다. 4월 2일 옥상면에서는 주민 2000명이 면사무소로 몰려가 "우리는 이미 독립선언을 하였으니 면사무소를 마땅히 폐지하고 우리가 새로 조직할 자치민단(民團)에 면사무소 청사와 비품, 재산 일체를 넘기라"고 선언한 후 면사무소를 접수하여 십수일간 자치활동을 하였다.

유여대, 김병조 두 사람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나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은 의주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이 민족대표들만의 행사였다면 이들 두 사람이 주도한 의주 3.1만세시위는 민족대표가 직접 민중들을 지도하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시위를 벌인 유일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유여대는 당일 시위현장에서 체포됐으나 김병조는 상해로 피신하여 망명하였다.
   

유여대 심문기사(동아일보, 1920.9.25.)

   
체포된 유여대 등 7명은 의주 헌병분대에서 신문을 받고 3월 4일 '보안법 제7조' 위반 혐의로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 이송되었다. 3월 7일 신의주지청 검사의 신문에서 그는 자신이 의주 독립선언식의 지휘자임을 당당하게 인정하고 조선독립에 대한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피력하였다. 다음은 이날 신문조서의 한 대목이다.

문: 이들의 문서나 기 등은 모두 그대가 지휘하여 만든 것이 틀림없는가.
답: 나는 독립선언을 하려면 이러이러한 물건이 필요하다고 신도를 모아 놓고 이야기하였더니 그자들이 협의를 하고 만들어 가지고 온 것이므로 내가 지휘한 것과 같은 셈이다.
문: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이번과 같은 소요를 일으켰는가.
답: 양전백의 말에 의하여 조선민족 대표자로부터 파리의 강화회의에 파견하는 사람들에게 조선은 일반적으로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통지하면 강화회의에 독립 요구를 제출하여 각국의 동정을 얻고 독립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 것이다.
문: 가령 조선이 독립이 된다고 할지라도 이전의 조선과 같이 당파의 싸움과 각국의 야심 등으로 도저히 독립을 유지할 수 없고 도리어 국내는 혼란 속으로 빠진다는 것을 생각하여 보지 않았는가.
답: 국민 전부가 독립정신이 충만해 있으므로 완전히 독립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문: 가령 정신만 있다고 할지라고 실력이 수반하지 않는 이상은 독립을 오래 지탱할 수 없지 않은가.
답: 실력은 이제부터 양성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3월 8일 유여대 등은 '보안법 위반'으로 신의주지청에서 기소되었다. 그러나 상부의 지시로 3월 25일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되었다.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판사의 신문을 받았다. 이후 그는 다른 사람들과 분리돼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과 함께 재판을 받게 됐다. 9월 20일부터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심 재판이 열렸다. 공판 3일째인 9월 22일 그는 독립에 대한 감상을 묻는 판사의 질문에 대해 "다만 하나님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노라."라고 대답하였다. 10월 30일 열린 최종판결에서 경성복심법원에서 그에게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다음은 1919년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손병희 등 민족대표 관련 사건의 참고인 자격으로 출석해 진술한 신문조서의 한 대목이다.

문: (일본)정부의 승인을 거친 후 비로소 독립국이 될 수 있는 것인데, 그 이전에 피고 등은 어찌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는가.
답: 그것은 자결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한 것이다.
문: 참고인은 어찌하여 일본의 주권을 이탈하고 조선을 독립시키려고 희망하는가.
답: 조선민족이 자유롭게 발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독립을 희망한다.
문: 일본 제국신민이 되어 있는 편이 자유의 발달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답: 나는 독립하지 않으면 발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문: (한일)병합 전은 인민은 자유를 압박받고 있었으나 독립을 하여서 그와 같은 상태로 되는 것을 희망하고 있는가.
답: 독립을 하여 공화정부가 되고 열국의 대열에 서서 가도록 하고자 생각하고 있다.
문: 그대는 정치에 대하여 불평을 가지고 있는가.
답: 독립을 희망하는 것은 조선인에 대하여 자유를 주지 않는다는 데 불평이 있는 까닭이다.


그는 조선민족이 자유를 되찾기 위해 독립이 필요하며 이 때문에 평소 총독부 체제에 불평을 갖고 있었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또 만약 조선이 독립할 경우 이전과 같은 전제군주제가 아닌 공화정부를 구성해 다른 열강들과 어깨를 겨루고자 하였다. 당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온건한 독립청원론와 비타협적인 독립선언론으로 양분돼 있었는데 그는 분명하게 독립선언론 쪽에 서 있었다.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그는 1921년 11월 6일 홍기조와 함께 만기로 출소하였다. 이튿날 동아일보가 전한 출옥소감에서 그는 "모든 자유를 빼앗긴 옥중 생활을 하여보니까 더욱 자유에 대한 깨달음이 깊었으며 출옥한 후에 대하여는 모든 일이 순서가 있고 세월이 있는 것이니까 우리는 오직 가장 정의 인도라고 생각하는 일을 위하여 힘을 쓸 뿐"이라고 말했다.

출소 후엔 교육사업에 집중

 

유여대와 홍기조 2인의 출옥 관련 보도(동아일보, 1921.11.7.)

 출옥하자마자 그는 자신이 담임목사로 있던 의주 동(東)교회 담임으로 복귀하였다. 어느덧 40대 후반의 중진 목회자가 된 그는 1925년 2월 제13회 의산노회에서 노회장에 선출되었다. 틈나는 대로 그는 교회에서 강연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와 인재양성을 강조하였다. 그 무렵 동아일보는 민족대표들의 근황을 연재하였는데 1925년 10월 4일자에 실린 그의 근황은 아래와 같다.

류여대 선생은 지금까지 고향인 평북 의주 홍서동(弘西洞)에 사시면서 예전 서문안(西門內) 예배당(의주 동예배당)엔가 목사로 계신데 선생은 장로파 목사라 아마 정년이 되시도록 그 예배당에서 그곳 사람을 교화하시기에 진력을 하시겠지오. 아직도 오십 전이라 선생의 정력은 갈수록 더하리라고들 합니다.

목회 활동과 함께 그가 정열을 쏟은 일은 교육 사업이었다. 의주 3.1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후 그가 경영자로 있던 양실학교는 폐쇄되고 말았다. 그는 양실학교의 재건을 위해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기부금을 모집하였다. 그의 노력 끝에 1926년 양실학교는 재단법인으로 등록하였다. 총 6학급에 남녀 학생 170여명, 교직원은 교장 박종걸 외 6인이었다. 지역유지들로 구성된 동락회(同樂會)에서 매년 기부금을 내줘 학교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양실학교는 1932년 12월 1일부로 보통학교로 승격되었는데 의주지역 내 사립학교로는 처음이었다.

1920년대 이후 그는 의주지역에서 최고의 명사로 꼽혔다. 잡지 <개벽>의 1923년 8월호(제38호)에 재미난 기사가 하나 실렸다. 필자는 '의주편편(義州片片)'이라는 의주 기행문에서 의주의 '명물'로 고도주(古都紬·명주)와 작삼사(柞蠶絲·산누에 꼬치실)를 들었다. 또 '중심인물'로는 '양실학원장 장창계(張昌械)와 목사 유여대를 친다'며 그밖에는 '이럿타 할 이가 업고'라고 썼다.

 

대표 저서 3권(동아일보, 1935.9.3.)

 
1931년 그는 17년간 시무하던 의주 동교회를 사임하였다. 이후 신의주로 이사하여 그곳 백마(白馬)교회를 담임하여 예배당을 새로 짓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1935년에는 조선중앙일보 신의주지국 고문을 맡기도 했다.

56세 되던 1934년 그는 신병(身病)으로 목회자 생활을 마감하였다. 이후 요양을 하면서 후학들을 위해 계몽적인 저술활동에 힘썼다. 자신의 설교를 모은 <강대지남(講臺指南)>, 귀감이 될 만한 동서고금 위인들의 이야기들을 소개한 <위인기담(偉人奇談)>, 각종 서식 작성법과 상식 등을 알기 쉽게 소개한 <면무식(免無識)> 등을 신의주 광명사에서 출간하였다. 이 가운데 <면무식>은 1935년 초판이 반년이 못돼 절판되자 1936년 2월 증보판을 새로 찍었다. 수익금은 고아들을 위하여 쓸 작정이었다.

교육자이자 목회자, 민족지사로서 평생을 헌신한 유여대는 1937년 1월 13일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아들 삼형제에게 최후로 남긴 필담은 '생명유도(生命有道)'였다. 그의 유해는 의주군 고성(古城)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1971년 1월 20일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111번)에 새로 묘소가 마련됐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권, 1987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유여대 편>, 2003년 3월
-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7권, 2002
- 허동현, '3.1독립운동과 기독교계의 민족대표 : 오화영과 유여대를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6,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6
- 김승태, '의주에서의 3·1운동과 유여대 목사', <교회와 현장>, 2018.7
(그밖에 대한매일신보, 매일신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중앙일보, 조선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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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