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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3.01 14:02 수정 2019.03.19 10:02
나인협(羅仁協)은 1872년 10월 8일 평안남도 성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 도호는 홍암(泓菴)이다.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다. 부모의 인적사항이나 집안형편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22세 때인 1894년 그는 강원도 원주에 사는 김영석(金永碩)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하였다. 1898년에는 나용화 등과 함께 동학의 북접(北接) 지도자인 최시형과 손병희 등을 찾아가서 만났다. 그해 3월 최시형이 원주 송골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 6월 교수형을 당했다. 이후 손병희가 동학의 3세 교주가 되자 그를 도와 동학 포교에 힘썼다. 일설에는 그가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자세한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동학의 갑진개화운동에 참여
 

나인협

 그 무렵 평안도 지방의 민심은 몹시 흉흉했다. 서북출신에 대한 차별대우로 불만이 고조된 데다 마침 콜레라가 창궐하여 희생자가 속출하였다. 게다가 중국에서 '의화단의 난'이 발생한 여파로 민심이 극도로 불안하였다. 이 때문에 평안남도 성천 등지의 지식인과 농민들은 동학에 입교하여 불안한 심기를 의탁하였다.

동학 입교자가 급증함에 따라 그가 관장하는 교인들의 수도 증가하였다. 나인협은 교도 1,000여명을 관리하는 대접주를 거쳐 1903년 음력 2월 교도 10,000여명을 관리하는 의창대령(義昌大領)에 임명되었다.

당시 삼남지방의 동학교인들은 반외세·반봉건 투쟁을 전개하였다. 반면 평안도 지역 동학 교인들은 개화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1901년 일본으로 건너간 손병희는 동학의 개화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손병희는 당초에는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갈 요량이었으나 사정이 생겨 중도에 일본에 눌러앉게 됐다. 그곳에서 박영효, 김옥균 등 일본으로 망명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개화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얼마 뒤 손병희는 두 차례에 걸쳐 동학교도들의 자녀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공부시켰다.

1904년 3월 나인협은 평안도 지역 동학 우두머리인 문학수, 이령수, 나용환, 김안실, 홍기억, 홍기조, 노양기, 임예환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손병희는 만났다. 손병희는 이들에게 국내에 돌아가 민회(民會)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귀국 후 그는 1904년 9월 1~6일까지 나용환, 오영창, 임예환, 홍기조, 홍기억, 황학도 등 약 13,000명의 동학교도들과 함께 평양 영문(營門) 뜰 안에서 진보회를 개회하였다. 그 자리에서 '4대 강령'을 발표하고 일제히 단발(斷髮)을 행하였는데 깎은 머리털이 4칸짜리 창고에 가득했고 한다. 이것이 소위 동학의 '갑진(甲辰)개화운동'이다.
 

나인협 명의의 동학 광고문(대한매일신보, 1904.9.13.)

 
그 무렵 '동학 차(次)회장 나인협'의 명의로 각처에 광고문을 발송하였다. 내용은 조선팔도의 인민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한·일·청 3국이 동양평화를 견고히 하자는 것이 골자다. 신문에 실린 그 내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惟我大韓 僻在一隅하야 人心이 未開故로 界各國文明化之風을 未知하야 各部大臣은 壅藪 聖聰하야 但知 官賣職하고 列邑守宰난 剝割民脂하야 貪財虐民故로 世界各國이 野蠻國이라 稱하니 豈不痛哉아 是故로 今春에 俄兵이 咸鏡道 平安道 等地에 出하야 衝火焚蕩하며 刧巡婦女하며 勒奪財產하되 未知防禦하고 驚惶奔走하니 此是人心이 未開야 不得團聚之故也라 是故로 我國八路有志之十가 公論하되 皇城에 會社를 設하고 八道人民 團結하야 他國文明開化 法바다 韓日淸 三國이 東洋平和하야 國家를 堅固케하고 大臣과 守宰의 暴虐 政事 無케하야 人心을 扶持켸할 意로 通奇가 有한 故로 如是齊會하니 韓國에 開化하면 强暴한 國을 防禦하기 易할터이니 我國民心歸化가 非但我國之爲好오 亦日本之爲好인 則以此下諒홈 (<皇城新聞>, 1904.9.13.)

그러나 진보회 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책임자로 있던 이용구(李容九)의 배신 때문이었다. 그는 개인적인 이권을 위해 진보회를 친일단체인 송병준(宋秉畯)의 유신회와 통합시켜 일진회(一進會)를 발족하였다. 이로 인해 동학이 친일단체로 오해 혹은 매도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간판을 바꾸었다. 1906년 1월 5일 귀국한 손병희는 이용구와 그 휘하의 62명을 출교(黜敎) 조치하고는 교인들에게 일진회에서 탈퇴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일본 측 비밀문서에 따르면, 나인협은 1905년 11월 중순경 일진회장 이용구를 비롯해 김택현, 정경수, 박중호, 오창영, 홍기조 등 총 13명과 함께 재차 일본을 방문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용구가 송병준과 야합하여 일진회를 발족시킨 것과 관련해 사태 수습을 위해 손병희가 이들을 일본으로 불러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얼마 뒤 이용구 일당이 출교처분을 당한 것을 보면 이때 사태가 원만하게 마무리되지 못한 것으로 짐작된다.

동학이 천도교로 재탄생한 후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1906년 3월 천도교는 전국 각지에 72개의 대(大)교구를 설치했다. 교구(敎區)는 교인 10만 명 이상을 기준으로 하였는데 나인협은 14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민족대표인 홍기조는 13교구장, 나용환은 15교구장, 임례환은 25교구장에 임명됐다. (대한매일신보, 1906.3.17.) 1909년 6월에는 교호(敎戶) 1,500호를 관장하는 도훈을 바라보는 예비도훈에 임명되었다. 3·1혁명 발발 직전 나인협은 성천에서 도사(道師)로 활동하였다.

"자주국가의 자주국민이 되니 기쁘다"

나인협은 1919년 2월 24일 성천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해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손병희의 명령으로 49일 기도회를 가졌는데 이에 대한 보고를 겸해 상경한 것이었다. 상경한 이튿날 25일 천도교 중앙총부에 들렀다가 그는 오세창과 권동진을 만났다. 두 사람은 그에게 3.1혁명 거사 준비소식을 들려주면서 민족대표로서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자 평소 한일합방을 반대하였고 또 조선의 독립을 희망해오던 나인협은 즉석에서 승낙하였다.

두 사람은 그에게 2월 27일 재동에 있는 김상규의 집으로 오라고 하였다. 마침 상경해 있던 홍기조·임예환 등과 함께 김상규의 집으로 갔다. 그날 밤 모임에서 참석자들은 일본정부와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건의서·청원서에 조인하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개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어 다음날인 2월 28일 밤 8시경 그는 손병희 집에서 열린 최종점검 모임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최린으로부터 만일의 소요사태에 대비해 독립선언식 개최장소를 파고다 공원에서 명월관 지점(태화관)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밤 천도교 중앙총부 근처 한계천(韓桂天)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홍기조, 임예환 등과 함께 투숙하였다. 밤 9시경 권동진으로부터 3월 1일 오후 2시 명월관 지점에 다들 모이라는 전달을 받았다.

예정대로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이 열렸다. 한용운의 식사(式辭)에 이어 만세삼창이 끝나자 일경이 들이닥쳤다. 민족대표 일행은 몇 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일경의 취조와 심문은 연행 당일부터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 한 대목을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문: 어느 날 상경하였는가.
답: 지난달 24일 상경하였다.
문: 무슨 목적으로 상경하였는가.
답: 기도회에 참가할 겸 국장을 배견(拜見)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문: 기도회는 무엇인가.
답: 천도교의 한 행사이다.
문: 오늘 명월관 지점에서 회합하였는가.
답: 회합하였다.
문: 회합의 목적은 무엇인가.
답: 독립할 목적이다.
문: 독립이란 것은 조선을 정치적으로 독립한다는 뜻인가.
답: 정치적이란 것은 어떤 것인지 불명하나 조선을 독립할 목적으로서이다. 그런데 그 목적은 오세창, 권동진이 잘 알고 있다.
(1919년 3월 1일, 경무총감부에서)

 

독립선언서 사건의 손병희 등 48인 기소장 ⓒ 독립기념관

 
나인협은 3.1거사 준비 초기단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그런 고로 독립선언서의 내용은 물론 작성 및 배포 경위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독립선언서는 3월 1일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 자리에서 처음 보았다. 그는 전적으로 오세창과 권동진의 말을 믿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독립선언서의 취지에 전적으로 공감하였으며, 조선독립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신문조서 가운데 일부를 발췌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문: 독립선언서를 언제 보았는가.
답: 명월관 지점에서 처음 보았다.
문: 피고는 이 선언서의 취지에 찬성하는가.
답: 그렇다. 찬성하므로 명의를 냈다.
문: 선언서는 누가 기초하였는가.
답: 모른다.
문: 선언서는 이종일이 인수하여 보성사에서 인쇄하였나.
답: 그것도 모른다.
문: 선언서를 많이 인쇄하여 경성과 지방에 배포하고 3월 1일에 발표하기로 하였는가.
답: 3월 1일 명월관 지점에서 비로소 보았을 뿐이다.
문: 피고는 조선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그 사정을 모른다고만 하는가.
답: 나는 명의만 냈지 자세한 것은 모른다.
문: 피고는 어째서 조선독립을 희망하는가.
답: 나는 별로 생각한 일은 없었고 권동진, 오세창 두 사람의 권유로 가입하였다.
문: 그러면 피고는 일본정부에 불평이 있어 조선독립을 계획하는 데 가입하였는가.
답: 나는 정치는 모르나 조선이 전과 같이 독립국이 될 것을 희망하여 가입하였다.
문: 어째서 독립국이 되려는 희망을 갖고 있는가.
답: 그것은 자주국가의 자주민족이 되는 것이 기쁘기 때문이다.
문: 피고는 (총독)정치에 대하여 불평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오세창, 권동진이 권하므로 의리상 독립운동에 가입하였다고 하였는가.
답: 그렇다.
문: 피고는 그러한 운동을 하면 처벌될 줄 알았는가.
답: 그렇다. 처벌될 것을 알고 있었으나 (조선이) 독립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가입하였다.
(1919년 4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후 1년 반에 걸친 심문과 재판이 진행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최종심에서 그는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 산입)을 선고받았다. 서대문감옥을 거쳐 마포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그는 1921년 11월 4일 만기출옥하였다. 이날 출옥한 사람은 서대문감옥에서 풀려난 이종훈을 포함해 총 17명이었다. 경성감옥 출옥자 16명은 4명씩 4차에 걸쳐 출옥하였는데 그는 신석구, 나용환, 임예환 등과 함께 2차로 풀려났다. 이날 경성감옥의 출옥 풍경은 이튿날 동아일보에 17명의 얼굴사진과 함께 크게 실렸다.

김일성과 맞서다 월남... 부산 피난민촌에서 운명

출옥 후 그는 즉시 본업으로 복귀하였다. 1921년 말 천도교 임시 대종사장에 임명되었으며, 1922년 9월에는 중앙총부에서 명칭을 바꿔 성립된 종리원의 종리사에 선임되었다. 1923년경 서울에서 평남으로 내려온 그는 종교 활동에 주력하면서 서북청년들이 주도하던 문화운동을 후원하였다.

교주 손병희가 사망한 후 천도교는 혁신문제를 놓고 내분에 휩싸였다. 세상의 변화에 따라 종래의 교주 1인 독재체제에서 중의제(衆意制)로 바꾸면서 조직혁신을 꾀하였다.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보수파와 개혁파 간에 갈등이 빚어졌다. 이때 그는 서북지역 출신과 일본 유학파들이 중심이 된 기존의 교권파를 지지하였다. 1925년 천도교가 신·구파로 분열하자 그는 서북지역 교인들이 중심이 된 신파에 참여하였다.

해방 후 그는 평남 성천에 머무르면서 교회 원로로서 활동하였다. 천도교 교사 출신의 김달현(金達玄)은 1946년 2월 천도교 청우당을 결성하여 위원장에 취임했다. 이후 김달현은 북한의 민족통일전선체인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 의장을 맡았으며, 1947년 2월에는 북조선인민회의(최고인민회의의 전신)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김달현은 김일성과 손잡고 사회주의국가 수립을 위해 뛰었다. 이에 대해 나인협은 반대 입장을 펴다가 6개월간 평양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1·4후퇴 때 월남하였다.

월남 후 그는 부산 범일동 피난민촌에서 어렵게 생활하였다.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 당시 관재청에서 적산가옥 한 채를 알선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쫓겨나야 하는 처지라는 걸 알고는 이마저도 포기하였다.(동아일보, 1952.4.21.) 그의 가족들은 당시 교통부에 근무하던 장남 상윤(尙允)의 박봉으로 겨우 생활을 영위하였다.
 

동아일보에 실린 나인협 장례식 기사(1952.4.21.)

 
그가 사망한 직후 동아일보 기자가 그의 집을 답사한 후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바락크 촌'의 토막집 한 칸을 얻어 8인 가족이 함께 살았다고 한다. 다다미 두 장 정도 되는 흙방의 문은 거적으로 둘러져 있었고 벽은 종이를 발랐으며, 지붕은 비가 새는지 거적때기 몇 장이 덮여 있었다고 했다.

타계하기 일주일 전 그는 서울에 사는 교인들을 찾아보겠다며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서울을 다녀왔다. 1952년 4월 16일 새벽, 그는 갑자기 기침을 심하게 하더니 오전 9시 25분경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81세였다. 임종에 앞서 그는 시 한 수를 남겼다고 한다. (동아일보, 1952.4.18.)

畏神聖之法訓
當殺我而生他
內有定而外變
道自遠而渠我


그의 빈소는 부산 초량역전 천도교 부산교구에 마련되었다. 장의위원장은 오세창, 부위원장은 이갑성, 이명룡 등 민족대표 33인 동지들이 맡았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다. 4월 20일 오전 초량역전 광장에서 영결식을 갖고 유해는 부산 대연동 범디산 중턱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200만원을 장의비 명목으로 지원하였으며, 국회의원들은 세비의 1할을 거둬 조위금으로 냈다.

사후 105일 되는 1952년 7월 29일 천도교 예식에 따라 제복식(除服式)을 치렀으며, 1962년 8월에는 천도교 부산교회 주최로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 이후 그의 유해는 1973년 10월 31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현 서울현충원)로 이장되었다.
정부는 1962년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권, 1987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나인협 편
- 조규태, '3·1독립운동과 천도교계의 민족대표-오세창과 나인협을 중심으로', 민족대표 33인 제3차 학술회의, 33인유족회, 2005.2.28
(그밖에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매일신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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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