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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2.28 07:49 수정 2019.02.28 08:30

나용환(羅龍煥)은 1864년 8월 7일 평안남도 성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 도호는 봉암(浲菴)이다. 부모의 인적사항이나 집안형편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어려서 그는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다. 이후 벼슬길에 나가려고 몇 차례 과거시험을 보기도 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고향에서 훈장 노릇을 하며 지냈다.

동학 교리 접하고 스스로 동학 입도

 

나용환

 30세가 되던 1893년 그는 영변에 사는 고화경(高化景)을 통해 동학을 처음 접하였다.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등 동학의 교리를 접한 후 "야, 이것은 실로 유교보다 크구나!" 하고 감격하였다. 이후 초대 교주 최제우(崔濟愚)가 지은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을 혼자 연구하였다. 1894년 4월 5일 그는 <동경대전>을 갖고 산으로 들어가서는 스스로 동학에 입도(入道)하였다.

이후 동학 포교에 열정을 쏟은 결과, 1897년 중화군 접주(接主)에 임명되었다. 1898년 3월 그는 나인협, 이두형과 함께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찾아가 만났다. 최시형은 이들에게 "동학의 운이 북에 있으니 힘써 노력하라"고 당부하였다. 이후 그는 나인협과 함께 평남의 성천, 강동, 양덕 등지에서 포교에 힘을 쏟았다. 1899년 평안도 대접주에 임명되었으며, 1903년에 의창대령(義昌大領)에 임명되었다. 당시 그는 '포덕대왕(布德大王)'으로 불렸는데 이는 그가 포덕(전도)을 제일 많이 한데서 얻은 별명이었다. 의창대령은 3만 도호(道戶)를 통솔하는 자리를 말한다.

1894년 2월 전봉준이 고부군청을 습격한 것을 시발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얼마 뒤 일본군의 개입으로 진압되고 말았다. 북접의 최고지도자 최시형은 피신생활을 하면서 동학 포교에 진력하였다. 그러던 중 최시형은 1898년 4월 5일 원주에서 관군에게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었다. 고등재판소에서 10여 차례의 재판 끝에 7월 18일 교수형에 처해졌고, 이틀 뒤 7월 20일 형이 집행되었다.

앞서 최시형은 북접의 지도자들 중에서 손병희(孫秉熙)의 신심과 인물됨을 두고 "천하에 의(義)를 따를 자 없도다"하면서 손병희에게 도통(道統)을 전수하였다. 그러나 최시형이 처형된 후 동학교단은 갈등에 휩싸였다. 우선 오랫동안 최시형을 모셨던 김연국의 반발이 컸다. 또 동학 재건을 놓고도 의견대립이 심했다. 손병희는 동학을 널리 포교하려면 세계문명국과 같이 개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연국·손천민 등은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때 나용환은 손병희를 지지하면서 힘을 보탰다.

한편 손병희는 손천민을 성도주(誠道主), 김연국을 신도주(信道主), 박인호를 경도주(敬道主)로 임명하는 등 지도체제와 조직체계를 정비하였다. 이로써 동학은 손병희 중심의 제3기 체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동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면서 손병희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이에 손병희는 신변안전을 위해 일단 국외로 망명할 계획을 세웠다.

그 무렵 손병희는 유길준이 펴낸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조류 속에서 서양문명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갈 생각을 하였다. 1901년 3월 그는 원산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편을 수소문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자 일단 일본으로 가서 미국행 배편을 알아보기로 하고 나가사키를 거쳐 오사카에 도착했다. 이 과정에서 경비가 모두 바닥이 나고 말았다. 결국 그는 일본에 머물면서 서구의 선진문명을 배우기로 하였다.

교주 손병희가 자리를 비운 와중에도 동학의 교세가 날로 확장되었다. 손병희는 동학 교인들의 자제들을 일본으로 유학시켜 선진문명을 배우게 할 계획을 세웠다. 1902년 손병희는 1차로 전국에서 24명을 선발하여 교토(京都)의 부립(府立) 제1중학교 등에 입학시켰다. 1904년 3월에는 다시 40명을 데려가 수학케 했다. 이때 나용환은 임례환, 홍기조, 홍병기 등과 함께 이 일을 적극 도왔다.

1904년(갑진년) 4월 손병희는 동학 지도자들을 비밀리에 일본으로 불러들였다. 그때 일본으로 간 사람은 나용환을 비롯해 문학수, 이겸수,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등 여러 명이었다. 손병희는 이들에게 동학교도들을 규합하여 민회(民會)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나용환은 동지들과 함께 민회를 조직했다.

민회의 첫 명칭은 대동회였는데 중립회로 고쳤다가 최종 진보회(進步會)로 정했다. 나용환은 1904년 7월 홍병기, 이종훈 등과 함께 모화관 산방에 모여 대동회를 중립회로 고치는 데 참여하였다. 나용환, 임례환 등 관서지역 출신들은 그해 9월 1일 평양에서 진보회 민회를 개최했다. 통문(通文)이 돈 것은 8월 20일이었다. 나용환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평양 개회(開會)는 위세가 대단했다. 일시에 2만여 명이 모였으며, 그 자리에서 단발한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잡지 <별건곤>(제4호, 1927.2.1.)에 실린 나용환의 회고담 한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9월 1일로써 일재 觀察府로 집회하기로 하얏슴니다.(집회하얏다가 해산을 당할 셈치고) 그날 정오쯤 하야 각처로부터 모인 이만여 군중이 관찰부로 밀려 드러 갓슴니다. 平壤城이 뒤집피는듯 실로 기세당당 하얏슴니다. 관찰사는 庭前까지 내려서서 說諭을 하고 병정들은 목목키 서서 제지를 하나 물밀듯하는 군중을 엇지 함니까. 할 수 업시 기세만 徒望할 뿐인데 우리는 관찰청 전에 일시에 업드려 放聲叫號를 하얏슴니다. 「시대를 따라 民智를 계발하고 유래의 정폐민폐를 개혁하야 국가를 안전케 하기로 하거늘 엇지써 난민이라 하나뇨?」하고 叫號를 하얏슴니다. 관찰사는 蒼黃罔措라가 「상부의 령이니 아직 해산 하얏다가 기회를 보아 다시 집회하라」고 간곡키 말햇슴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만여명이나 揮動햇든 사실만은 상부에 報해 달라」고 관찰사의 굴복을 밧고야 서서히 헤여저 나왓슴니다. 나오는 길로 회소에 모여 일시에 단발을 하얏슴니다. 祖先이래 내려오든 생명과 가튼 상투를 일시에 깍거 버리니 이런 일도 잇겟슴니까. 그때는 기계도 업섯지오 가위로 되는대로 썩썩 잘라 버렷슴니다그려. 어잿든 머리칼덩이가 나무덤이가 탯구려! 그리고 모다 黑衣를 換着햇슴니다."

평양 민회의 기세에 눌려 관찰사도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일시적이나마 민회는 평안도 44주(州)의 수령(守令)을 호령하였다. 진보회원 이돈화(李敦化)에 따르면, 당시 나용환은 민회 회장을 맡았는데 그 아래에 평의원, 사찰(司察) 등 삼십여 명의 간부들이 행정을 처리하였다. 특히 군수나 지방관리 가운데 비리가 있는 자는 경찰서나 감옥으로 보내는 대신 대동강에 빠뜨렸다. 일종의 '임시혁명정부'가 탄생한 셈이다. 당시 진보회가 내건 4대 강령은 1. 독립의 기초를 공고케 함 2. 정부를 개선(改繕)함 3. 생명, 재산을 보호케 함 4. 군정(軍政), 재정을 정리함 등이었다.

 

매일신보에 기고한 ‘수심정기’(1936.4.25.)

 
손병희는 일본에서 귀국하기 직전인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이듬해 3월 천도교는 전국 각지에 72개의 대(大)교구를 설치하는 등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교구(敎區)는 교인 10만 명 이상을 기준으로 하였는데 나용환은 15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민족대표인 홍기조는 13교구장, 나인협은 14교구장, 임예환은 25교구장에 임명됐다. (대한매일신보, 1906.3.17.)

1907년 5월 나용환은 정주순독(定住巡督)에 임명되었으며, 1909년 5월에는 도사(道師)에 임명되었다. 또 1910년 천도교 중앙총부의 현기사장(玄機司長)으로 활동하였고, 1911년에는 공선관장(共宣觀長)에 임명되었다. 3·1운동 직전까지 그는 중앙총부에 머무르며 교회의 중요정책을 결정하였다. 아울러 그는 성천 등 서북지역의 교인을 동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권동진은 <삼천리>(1935.6) 기고문에서 "(손병희가) 천도교의 재정과 행정에 대해서는 오영창, 나용환 두 분을 가장 신임했다"고 썼다.

권동진 만남 계기로 3.1혁명 참여

 

나용환 부음기사(조선중앙일보, 1936.8.21.)

 나용환이 3.1혁명에 민족대표로 참여하게 된 것은 1919년 2월 26일 권동진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이날 오전 돈의동 권동진의 집에서 권동진과 오세창을 만나 독립만세운동 계획과 독립선언서 서명 건에 대해 얘기를 듣게 됐다. 평소 조선의 국권회복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오던 그는 즉석에서 이에 찬성하였다. 일제치하에서 독립만세를 외칠 경우 처벌당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는 기꺼이 이 일에 동참하였다.

이튿날 27일 오후 7시경 재동 김상규의 집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하여 다른 동지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거사 하루 전날인 28일에는 가회동 손병희 집에서 열린 최종점검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거사장소가 애초의 파고다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된 사실을 알게 됐다.

예정대로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서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그의 아들 경덕의 회고에 따르면, 이날 아침 그는 아내(姜淑嬅)에게 '새 옷을 내오라'고 하여 옷을 갈아입은 후 '이번에 내가 가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지 모르니 애들을 잘 건사하고 잘 있으라'는 말을 하고 집을 나섰다고 한다. 한용운의 식사(式辭)가 끝날 무렵 일경이 들이닥쳐 참석자 전원을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하였다.

 

민족대표 공판 장면(동아일보, 1920.7.13)

 나용환은 3.1거사 준비 초기단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따라서 독립선언서의 내용이나 작성자 및 배포 경위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독립선언서 역시 3월 1일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 자리에서 처음 보았다. 그는 전적으로 오세창과 권동진의 말을 믿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그는 독립선언의 취지에 전적으로 공감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소 입장에 변화를 보이기도 했다. 신문조서 가운데 일부를 발췌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문: 그대는 조선민족의 대표자로서 무슨 일이든지 모른다고만 하니 그것이 웬 일인가.
답: 권동진에게 취지를 들을 때 나는 전부터 국권회복의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의사가 합치되므로 대표자로 연명했을 뿐이지 기타의 일은 전연 모르고 단지 지금 말한 것뿐이다.
문: 현재 시정(施政)에 대하여 어떠한 점을 불복하고 독립계획을 하였으며 그 불평한 점은 무엇인가.
답: (한일)병합 이래 조선 사람도 개발한 것도 있고 인민의 권리도 신장되어 결코 일본정치에 대하여 불쾌한 것은 없으나 일본을 선진국으로 하고 독립할 것을 생각하였다.
문: 수단 방법도 생각지 않고 단지 선언서를 살포하여 독립이 될 줄로 알았는가.
답: (선언)하고 볼 것이지 될지 안 될지는 판단치 않았다.
문: 일본이 정치가 불합리하고 또 부자연하다는 것이 선언서에 써 있으니 그 불합리한 점은 무엇인가.
답: 그 의미는 나로서는 모른다.
문: 선언서 말미에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이란 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답: 한 사람 남을 때까지라도 한 시간이 있을 때까지라도 일을 하자는 것이다.
문: 앞으로의 행동은 어떠한 계획으로 할 것인가.
답: 앞으로 어떠한 행동을 할지는 의논한 일이 없다.
(1919년 3월 1일, 경무총감부에서)

문: 피고는 일한병합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반대하지 않았으면 이런 운동을 할 의사는 없지 않은가.
답: 병합 당시는 별로 반대를 안했으나 오늘에 와서는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되므로 독립운동을 한 것이다.
문: 앞으로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그렇다. 기회만 있으면 또 할 작정이다.
(1919년 3월 20일, 서대문감옥에서)

문: 피고는 어째서 조선을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나.
답: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권동진이 나에게 조선은 일본에 병합되었으나 이번에 다른 나라와 같이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므로 이 일을 한 줄로 생각한다.
문: 피고는 일한합병을 반대하는가.
답: 나는 특별히 아무 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문: 피고는 조선독립 선언을 하면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였는가.
답: 그렇다. 이렇게 하면 독립이 될 줄로 알았고 또 믿는다.
문: 피고 등 33인이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독립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답: 다른 사람들이 선언을 하면 독립이 된다고 말하므로 나도 그것을 믿었다.
문: 피고는 독립운동에 참가하면 처벌할 줄로 생각하였는가.
답: 그렇다. 처벌당할 것을 각오하였다.
문: 피고는 총독정치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는가.
답: 아무 불만도 없다. 오늘 내가 그러한 말을 하면 비겁한 자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제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 불만도 없고 그런고로 앞으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
(1919년 4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후 1년 반에 걸친 심문과 재판이 진행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최종심에서 그는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 산입)을 선고받았다. 서대문감옥을 거쳐 마포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그는 1921년 11월 4일 만기출옥 하였다. 이날 출옥한 사람은 서대문감옥에서 풀려난 이종훈을 포함해 총 17명이었다. 경성감옥 출옥자 16명은 4명씩 4차에 걸쳐 출옥하였는데 그는 신석구, 나인협, 임예환 등과 함께 2차로 풀려났다.

출소 후엔 종교 활동 주력

 

출옥 후 근황 기사(동아일보, 1925.10.2.)

 출옥 후 그는 서울 삼청동에 거주하면서 종교 활동에 주력하였다. 1922년 1월 종무사(宗務師)로 경리과 주임을 맡았으며, 1923년 강도사(講道師)로 공선되었고, 1926년에는 종법사(宗法師)에 선임되었다. 그는 교회의 일을 하면서 천도교 혁신운동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평안도 출신 청년들이 추진하던 문화운동을 후원하기도 했다.

1924년 4월 5일 홍병기·윤익선 등이 천도교 최고비상혁명위원회를 재조직하였을 때 그는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25년 4월 천도교가 신·구파로 갈리자 그는 최린, 이종훈, 홍병기, 정광조, 이돈화 등과 함께 신파에 가담하였다. 1928년 12월 최린이 도령(道領)에 선출되었을 때 그는 종법사장에 뽑혔다. 1930년 12월 최린, 권동진, 오세창, 이병춘 등과 함께 5인의 고문에 위촉돼 신·구파 간의 단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 수년간 병석에 있던 그는 1936년 8월 19일 오후 9시 40분 서울 소격동 자택에서 향년 73세로 타계하였다. 장례는 8월 22일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교회장으로 치러졌으며, 묘소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마련됐다.

1962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1966년 5월 18일 정부는 나용환 등 독립운동가 14명의 묘소를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하였다. 현재 그의 묘소는 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22번)에 마련돼 있다.

그의 장남 경덕(京德)은 소파 방정환의 장녀 경화(京嬅)와 결혼하였다. 1933년에 조직된 소녀악극단 '낭랑좌(娘娘座)' 소속의 가수 나선교(羅仙嬌)는 그의 딸이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권, 1987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나용환 편
- 나용환, '甲辰改革實話, 大洞江을 警務廳 삼고, 民廳에서 呼令하건 이약이', <별건곤> 4호, 1927.2
- 나용환, '내가 입도하든 그때', <신인간> 34호, 1929
- 라경덕, '나의 아버지 봉암 라용환', <신인간> 553호, 1996
- 조규태, '3·1독립운동과 천도교계의 민족대표-박준승·홍병기·나용환의 활동을 중심으로', <제4회 '민족대표 33인의 재조명' 학술회의 논문집>, 서울프레스센터, 2006.3.15,
(그밖에 대한매일신보, 조선중앙일보, 매일신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별건곤>, <삼천리> 등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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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