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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2.25 08:13 수정 2019.02.25 11:10
<오마이뉴스>는 창간 19주년이자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33일동안 특별연재 '민족대표 33인 열전'을 연재한다. 이 글은 기독교계 김창준 편이다.[편집자말]
   

김창준


33인 가운데 서훈을 받지 못한 사람은 4명이다. 정춘수, 박희도, 최린 3인은 친일행적 때문이며, 김창준은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 정권에 참여한 탓이다. 해방 전 이북에서 활동하던 33인 가운데 대다수는 월남하였다. 반면 김창준은 이남에서 활동하다가 북으로 올라갔다. 그는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가했다가 귀환하지 않고 북에 잔류하였다. 그의 묘는 평양 교외 애국열사릉에 있다. 이런 연유로 그는 남한에서 금기인물로 여겨져 왔다.

결혼 1년 '스위트홈'을 두고 3.1선언에 서명

김창준(金昌俊)은 1890년 5월 3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밖에 그의 집안내력과 가족사항 등 가정환경 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감리교인물사전> 등에 따르면, 그의 집안은 일찍부터 기독교에 접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06년 야소교(예수고) 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미국인 선교사 문요한(文約翰, J.Z. Moore)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후 1910년 평양 숭실중학, 1914년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11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전도 사업에 나선 그는 경성(서울)기독청년회관에서 1911년 3월 15일부터 남·북 감리회가 주최한 춘계 신학회 2년 급에 출석하여 교육을 받았다. 1913년경부터는 평양에 거주하면서 남산현 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광성고등학교 부교장을 3년간 맡은 것으로 보인다. 이어 일본 도쿄의 청산학원(靑山學院)에서 1년간 수학한 후 귀국하여 1917년 3월 서울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를 5회로 졸업하였다. 이후 그는 변영서와 함께 종로교회(현 중앙교회)로 파송돼 본격적인 목회 활동에 들어갔다.
 

3.1 선언 당시 상황을 담은 기록화.

 
김창준은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 박희도로부터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것을 권유받고서 이에 동참하였다. 두 사람은 평양 숭실중학 동창생이자 서울 중앙교회에서 함께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어서 가까운 사이였다. 1919년 2월 26일 밤 박희도는 그에게 "지금 평화회의에서는 민족자결이란 것을 논의하고 있으니 우리 조선도 어떻게 하든지 이 기회를 당하여 독립을 계획할 목적으로 오화영, 이필주, 길선주, 양전백 등이 운동을 하고 있는데 찬성하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김창준은 찬성 의사를 표하고는 이튿날(2.27) 정오에 정동교회 내 이필주 목사 집에 가서 이갑성, 박희도, 박동완, 이승훈, 최성모, 함태영 등 기독교인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김창준 회고록' 가운데 '서명 동기' 부분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3천만 동포의 애국심에 휩쓸린 나도 천부(天父)의 유업(遺業)이신 조국에 대하여는 생명보다 더 존귀히 여겼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자진하여 선언서에 서명하려고 결심하였다. 때는 방금 31세이었다. 결혼한 지 만 1년이었다. 장녀 마리아를 낳은 지 1개월이었다. 중앙교회 목사직이었다. 나의 처자는 매우 사랑스러웠다. 스위트홈이었다. 선언서에 일단 서명하면 다시 살겠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처음 생각에는 내가 죽으면 어린 처자는 누가 보호하나. 노 양친은 누가 보호하나 하는 염려도 없지 아니 하였다. 그러나 최후 결심은 가정보다 먼저 조국이다. 내 사랑하는 조국, 하나님의 유업이신 내 조국, 내 조국의 자유를 얻는 데 내 살과 피가 한 점의 보토(補土)가 되어질 진대 이에서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이다 하는 결심 아래 단연 서명하였다."

당시 그는 결혼한 지 1년, 첫딸이 태어난 지 한 달이 막 지난 신혼이었다. 게다가 연로한 양친을 모시고 있던 몸으로서 가족의 장래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투쟁활동을 천의(天意), 즉 하늘의 뜻이라고 여겼다. 이는 천주교 신자인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천명(天命)으로 인식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김창준에게 독립투쟁은 기독교 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졸업한 초등학교는 물론 평양의 숭실중학·숭실대학 모두 기독교 학교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숭실학교 학생들은 수업을 전폐하고 을사조약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숭실대학 졸업생 가운데 상당수는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1910년 12월에 발생한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돼 곤욕을 치렀다. 이밖에도 숭실대학 졸업생과 재학생들은 1910년대 최대 규모의 비밀결사인 '조선국민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3.1혁명 당시 평양의 만세항쟁은 사실상 숭실인들이 주도하였다.

'괘씸죄' 걸려 2년 6개월 중형
 

김창준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9.25.)

 
김창준은 민족대표의 일원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것 이외에도 선언서 배포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이승훈으로부터 평양과 선천에 보낼 선언서 500매를 받아 이 가운데 300매를 이계창을 시켜 선천으로 운반토록 하였다. 또 거사 전날인 2월 28일 밤에는 중앙교당에 집합한 경성중학생 400여명과 경기고녀 200여명에게 독립선언서의 내용과 선전방법을 설명해주었다. 이튿날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석한 그는 당일 현장에서 일경에게 체포돼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됐다. 당시 그는 만 29세로 33인 가운데 최연소였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최종심에서 그는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3.1혁명을 모의·주도한 손병희와 최린, 이승훈 등 8명은 징역 3년을, 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과 이갑성, 김창준, 오화영 등 4명은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상대적으로 그는 중형을 선고받았는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재판과정에서 법관들을 질책한 것이 괘씸죄에 걸린 셈이다. 일경의 취조와 재판 내내 그는 자신의 신념과 독립의지를 서슴없이 피력했다. 신문조서에서 몇 대목을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문: 피고는 이러한 독립운동을 하면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고 있는가.
답: 그렇다.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한다.
문: 피고는 장래에도 또 이런 운동을 할 기력이 있는가.
답: 그렇다. 나는 원래 한일합병을 반대하여 왔으니까 앞으로도 나 혼자만은 할 수 없을 것이나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지 실행할 것이다.
(1919년 3월 11일, 경무총감부에서)

문: 그러면 피고는 조선을 일본서 분리시켜 독립하려는 것을 선언한 것과 같이 찬성하였는가.
답: 그렇다. 조선독립을 희망하여 그런 일에 찬성하였다.
문: 피고는 무엇 때문에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가.
답: 그것은 조선인의 지위 권리가 일본인과 동일하지 않고 학대를 받고 있는 일에 대하여 일반이 불평을 가지고 있으므로 조선의 독립을 희망한다.
문: 피고는 조선이 독립되면 영원히 평화가 된다고 말하고 있으니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
답: 그것은 지위나 권력 아래에 있는 자는 깨달을 일이 못되나 항상 불평을 품고 있기 때문에 독립국이 되면 조선인은 일본인과 동등한 지위가 되는 고로 동등한 자 동지 간에는 아무 불평도 없고 평등함으로써 그 사귀는 것이 영원히 평화가 될 줄로 생각하고 있다. 한일을 병합한 것도 전 인민의 의사로써 병합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919년 4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그는 경무총감부에서 취조를 마치고 11일 만에 서대문감옥으로 넘겨졌다. 얼마 뒤에는 다시 마포 경성감옥으로 이감돼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2월 22일 최린, 함태영, 오세창, 권동진, 이종일 등과 함께 가출옥하였다. 출옥 당일 그는 출옥소감으로 "나는 조선 민족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도코자 하던 터이니까 밖에 있으나 감옥에 있으나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는 일반이올시다, 옥중에 일천 칠백 명의 죄수가 있으니까 기회 있는 대로 전도하였노라"고 말했다(동아일보, 1921.12.23). 그는 "감옥생활 중에서 신앙이 굳어진 것과 조국애가 더 굳어진 것을 기뻐할 뿐"이라고 회고하였다.
 
그는 감옥에서 독실한 신앙생활과 함께 전도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그는 옥중에서 묵시록을 7백 번, 산상보훈을 3백 번 읽었고, 구·신약 전부를 5차나 통독하였다고 한다. 또 감옥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잡역'을 맡아 죄수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열심히 옥중전도를 하였다. <기독신보> 보도(1922.1.18.)에 따르면, 그의 전도로 기독교를 완전히 믿기로 한 사람은 60여명이며, 같이 수감생활을 한 22명에게는 날마다 성경을 가르치고 아침저녁으로 시간을 정하여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는 죄수들에게 "심령을 먼저 중생시키고 또 조국애의 정신을 고취하였다"고 한다.

출옥 후 그는 다시 중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 이듬해 1922년 9월 제15차 미국 감리교 조선연회(年會)에서 그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1923년에 열린 제16차 미국 감리교 조선연회에서 선문서기(鮮文書記), 주일학교 위원, 금주금연을 위한 절제위원회 회계 등의 일을 맡았다. 그해 4월 그는 감리교 동양 감독과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미국유학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3․1혁명에 가담한 것이 문제가 돼 여권을 받는 데 어려움이 컸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미국 일리노이주 에반스톤 서북대학교와 개렛신학교 학사원(學士院)에 입학하여 3년 만에 두 학교의 과정을 모두 마치고 M.A.(문학석사)와 B.D.(신학사) 두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유학 시절 그는 시카고에서 한인교회를 창설하고 목사 사무를 보았다. 그가 시카고에 도착했을 당시 한인교포는 불과 2백 명 정도였으나 정치단체는 무려 6개나 됐다. 이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그가 백방으로 뛴 결과, 국민단(國民團)과 동지회(同志會) 둘만 남게 되었다. 그는 다시 이 둘을 통합시키기 위하여 이승만과 안창호를 만나려고 노력하였다. 이승만은 그 때 하와이에 있어서 만나지 못했으나 안창호는 상항(桑港·샌프란시스코)에서 일부러 와 만나 많은 담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는 한인들의 단체를 통합을 위해 어느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1926년 12월 27일 귀국한 그는 서울 인사동 중앙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1933년 4월부터는 감리교신학교의 전임교수로 부임하여 만 6년간 교수생활을 하였다. 교수 시절 그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 곧 사회구원에 선교의 근거를 두었다. 그는 "예수운동은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이 아니며 기독교운동의 근본정신은 구령(救靈)운동이다, 구령운동이 제1목적이다"라며 '속죄 구령'을 기독교 운동의 중심과제로 인식하였다.

1940년 10월 이 신학교가 폐교돼 교수직을 그만둘 때까지 <신학세계> <청년> 등 잡지에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 현실에 관한 다수의 글을 기고했다. 1932년 7월 <신학세계>에 발표한 '맑스주의와 기독교'라는 논문을 통해 기독교는 개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라고 규정하면서 기독교 사회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1920년대 초 국내에 들어온 사회주의는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수족' 또는 '자본주의국가를 옹호하는 무기'라고 공격하였다. 기독교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에 대응하여 태동하였다. 기독교 내에서 진보적이며 개혁적인 YMCA 계열의 인물들은 잡지 <청년>을 중심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기독교 사회주의를 제기하였다. 이들은 예수의 사상과 행동이 사회주의자들의 이상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들은 기독교적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자본가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사회주의를 수용하였다.

김창준이 사회주의를 수용한 것은 1929년 5월 31일 자신이 시무하던 중앙예배당에서 창립한 '기독신우회(基督信友會)'의 발기인 89명 중 1인으로 참가한 것이 그 시작으로 보인다. 신간회 운동에 호응하여 기독교계 민족운동의 전위를 자임한 기독신우회는 국내에서 기독교 사회운동의 출범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은 것이었다. '기독신우회'는 교파주의, 의식주의(儀式主義), 속죄구령(贖罪救靈) 등 개인복음주의에 젖어 있는 기독청년들에게 사회의식을 고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맑스주의를 따라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기독주의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병사한 아들 보라의 장례식을 마치고 쓴 '아들을 보내면서'라는 글을 끝으로 그는 글쓰기를 그만두었다. 그 무렵 그가 재직했던 신학교마저 폐교 당하자 그는 교회 일선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해방 때까지 그의 행적을 두고 경기도 양주에서 은둔생활을 했다는 주장도 있고, 만주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해방 직전에 귀국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가 1946년 2월에 남긴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중일전쟁 발발 2년 뒤인 1939년 8월 경 만주 신경(新京·현 장춘)으로 건너갔다. 그는 해방 때까지 만 6년간 만주에서 제조공장 등을 운영하며 경제활동을 하였다.

그가 만주로 간 이유는 첫째,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였으며, 둘째는 만주를 조국의 영토로 준다는 천부(天父)의 묵시를 따르기 위함이었다. 수감시절 어느 날 그는 비몽사몽간에 "이것은 네 조국의 땅이니 네게 주노니 받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신경에서 가구제조 회사인 동아공사(東亞公司)를 설립하였으며, 김성호와 함께 북만산업개척주식회사도 설립하였다. 그는 조선인 사회를 모범적인 단체로 만들어 국민의 정신을 집중시키며 양성하고 만주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도모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3년 후에는 목단강과 하얼빈 중간에 있는 주하(珠河)라는 곳에 농장을 매수하고 주하읍에 전분(澱粉)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3년 만에 공장이 완공돼 전분을 생산해 창고에 채울 무렵인 1945년 8월경 소련군이 자무스로 홍수같이 밀려들자 그는 모든 것을 남겨둔 채 몸만 빠져나와 급거 귀국하였다. 그는 공장시설을 갖추어 한인의 경제적 토대를 만들어서 소학교만 졸업한 청년들을 위하여 실업중학교를 설립하려고 발기회까지 진행하다가 중도에 귀국하고 말았다. 귀국 후 경기도 양주에서 농사를 짓다가 얼마 뒤에 8.15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그는 목사로서 세계를 기독교화(化)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여 1946년 1월 국제교화(敎化)협회를 조직했다. 그는 '조국을 성화(聖化)'하고 '만국을 교화(敎化)'하는 한편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그러나 당시 시국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통일문제를 놓고 좌우가 극심한 대립을 보인데다 민중들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하였다. 당시 그는 기독교적 방법으로 민중의 구원과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는 기독교적 민족사회주의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런 와중에 그는 1946년 10월 대구에서 '10.1항쟁'이 터지자 좌파계열의 연합단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드러냈다.

금기의 민족대표... 아직도 미서훈 상태

해방 후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우익으로 편입하였으며, 이북에 거주하던 기독교도들은 자진하여 월남하였다. 반면 그는 민주주의민족전선에 가담하여 찬탁운동을 벌였으며, 서울에서 좌파 기독교인들을 모아 기독교민주동맹을 결성하였다. 해방 공간에서 그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로서 활동하였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제(諸)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소위 남북협상) 때 참석했다가 귀환하지 않고 눌러 앉았다. 1948년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상임위원으로 선출돼 북조선 인민공화국 건설과정에서 협력하였으며,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에서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맑스주의를 비판했던 기독교 이론가요 목사인 그가 해방 후 월북하여 북에 잔류한 이유는 무엇일까? 남한의 혼란한 정국 속에서 '기독교사회주의'에서 '인민민주주의'의 길을 선택했다는 주장도 있고, 1930년대부터 그가 이론화한 기독교사회주의의 틀에서 1946년 10월 인민항쟁을 통한 인민의 경제적 평등에 대한 자각에서 내린 선택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밖에도 인민민주주의는 노동대중을 옹호하여 정의롭다고 생각하여 인민민주주의국가인 북한을 선택했다는 견해도 있다.

반공을 국시로 정한 남한정권 하에서 그는 현재까지도 금기의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기독교계를 제외하고는 그에 대한 변변한 인물연구조차 없는 실정이다. 1962년부터 시작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및 포상에서 그는 응당 제외돼 왔다. 그의 모교인 감리교 신학대는 1978년 3월 이 대학 출신 민족대표 7인의 부조물을 건립하면서 김창준은 제외시켰다. 그가 월북해 북한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다가 2007년 10월 10일 개교 120주년을 맞아 '역사의 반성과 미래의 조망'이라는 취지로 민족대표 7인의 부조물을 새로 건립하면서 김창준도 포함시켰다.
 

기독교민족사회주의자 김창준 유고 ⓒ 김양선

 
김창준의 평양 숭실학교 후배이자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설립자인 김양선 교수는 2011년 '김창준 회고록'과 그가 옥중에서 부인에게 보낸 편지 29통의 유고를 해제해 <기독교민족사회주의자 김창준 유고집>을 발간했다. '김창준 회고록'은 그가 해방 이듬해 '3·1운동 기념사'로 방송한 원고 내용으로 1946년 2월 25일 작성한 것이다. 회고록이 공개되면서 그의 삶의 상당부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김창준은 1959년 5월 7일 북한에서 뇌일혈로 별세했다. 그의 묘소는 6.25 때 납북된 오화영과 함께 북한 애국열사릉에 마련돼 있다. 슬하에 6남매를 두었는데 그들의 행적이나 생사여부는 알 길이 없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권, 1987
-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한국감리교인물사전>, 기독교대한감리회, 2002
- 조이제, '김창준 목사의 생애', <감리교와 역사>, 한국감리교회사학회, 1990
- 유영렬, <기독교 민족사회주의자 김창준>, 숭실대학교 출판부, 2006
-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기독교 민족사회주의자 김창준 유고>, 2011
- 김도형, [발굴 한국 현대사 인물-77] '민중신학 이전의 민중신학자 김창준', 한겨레, 1991.8.16
- 추연복, '김창준의 생애와 윤리사상 : 통일이후 시대의 창조적 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 사회주의 연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5.8
- 유영렬, '기독교 민족사회주의자 김창준에 대한 고찰 : <김창준 회고록>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 2005.12
(그밖에 매일신보, 동아일보, 기독신보, 경향신문, 기독교타임즈 등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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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