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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2.24 11:11 수정 2019.02.24 11:12
<오마이뉴스>는 창간 19주년이자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33일동안 특별연재 '민족대표 33인 열전'을 연재한다. 이 글은 기독교계 김병조 편이다.[편집자말]
평양신학교 입학 후 목회활동

김병조(金秉祚)는 1877년 1월 10일 평북 정주에서 김경복(金京福)의 2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금령(金寧), 자는 윤석(允錫), 호는 일재(一齋)다. 6세 때부터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는데, 15세 전후에 제자백가서를 비롯하여 중국의 주요 고전은 다 섭렵했다고 한다. 그가 학문에 통달했다는 소문을 들은 정주군수가 그를 시험한 후 찰방(察訪) 벼슬을 제수했으나 그는 학문 이외에는 관심이 없어 사양했다고 한다.
 

김병조


20세가 되던 1897년 그는 고향에서 80여리 떨어진 구성군 관서면 조악동에 서당을 열고 훈장 노릇을 하였다. 26세(1903년) 때 삼희재(三希齋)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면서 인근 방현면 변산동으로 이사하였다. 얼마 뒤 그는 삼희재 주인과 상의하여 이 서당을 신식 초등학교인 변산학교로 개편하였다. 일찍부터 근대화에 눈을 뜬 그는 이 학교에서 민족교육을 시작하였다. 당시 정주는 중국을 거쳐 오던 서구 문물의 유입 관문이어서 일찍부터 근대화 바람이 거세게 불던 곳이었다.

1909년 9월 김관근 목사의 인도로 기독교(장로교)에 입교한 그는 1913년 36세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평양신학교는 1901년 마포삼열(馬布三悅, Moffet) 선교사가 창설한 학교로 이승훈, 길선주, 유여대, 양전백, 송병조, 김인전 등 수많은 민족지도자를 배출한 서북지역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1917년 6월 평양신학교를 졸업(10회)한 그는 그해 8월 목사 안수를 받고 의주군 고관면 관리교회 목사로 목회활동을 시작하였다. 1918년 8월에는 정주읍 예배당에서 정식 관리교회의 전임목사가 되었다.

3.1만세 시위 참여 촉구글 제작

3.1혁명이 움틀 무렵 그는 평북의 의주·삭주·창성·벽동 등 4개 군을 평북노회로 분할하여 1918년 11월 27일 창립된 의산노회 소속의 의주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1919년 1월 19일 평북노회가 개최된 후 2월 10일부터 선천 남교회당에서 사경회(査經會)가 열렸다. 그는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의산노회 소속 유여대, 장덕로, 김승만 목사 등과 함께 선천을 방문하였다. 회의를 마친 후 일행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양전백 목사 집을 방문했다가 남강 이승훈을 만나게 되었다. 그와 이승훈은 평양신학교 시절부터 알고지낸 사이였다.

한편 최남선의 요청으로 2월 10일 상경한 이승훈은 서울에서 송진우, 최린 등을 만나 천도교 측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승훈은 2월 14일 평양에서 길선주 등 장로회 지도자들을 만나 3.1거사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어 평북노회가 열리고 있던 선천으로 내려가 양전백 목사의 집에서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3.1 거사계획을 재차 설명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이명룡, 유여대, 양전백, 김병조 등 4인은 민족대표로 동참할 것을 약속했다. 그가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사략(史略)>에 관련내용이 기술돼 있다.

"의주는 유여대, 김병조, 김승만, 장덕로 4명이 음력 1월 10일 평북노회의 축하차로 선천에 가서 양전백의 가택에서 10여 명의 동지로 더불어 국사의 광복을 같이 의논한 후 의주의 일은 4명이 분담하기로 하여 일재와 김승만은 비밀기관의 간부가 되고 유여대는 시위운동의 회장이 되어 처리하기로…"

여기서 '비밀기관의 간부'라고 지칭한 것은 그가 김승만과 함께 비밀결사 조직책임을 맡은 것을 말한다. 그는 이명룡을 통하여 기독교계 책임자인 이승훈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였다. 그리고는 3.1거사 당일 평북 도내 여러 지방을 비밀리에 다니면서 만세 시위 전파와 확산을 위해 힘썼다. 33인의 한 사람인 유여대는 3.1거사 당일 평북 의주에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이런 연유로 두 사람은 3.1거사 당일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당시 그는 조선동포들의 3.1만세시위 동참을 촉구하기 위해 '격고아한동포문(檄告我韓同胞文)'을 제작해 살포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슬프다, 우리 팔도의 동포여! 깊은 잠에 빠져 있음을 크게 뉘우칠 지어다. 하늘의 모습을 우러러 보아라, 동방의 밝은 별이 이미 밝았다. 시국의 형편을 두루 살펴보아라. 집집마다 경종이 스스로 울리니 휘날리는 태극기는 제군들의 조국정신을 활발하게 하고, 열렬한 만세소리는 제군들의 일체 생명의 맥박을 다시 뛰게 하도다."

그는 격문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조선 동포들에게 깨어나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3월 7일에는 조선총독부, 경찰서 등 일제 통치기관에서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던 부일배들에게도 각성을 촉구하는 '경고관헌문(警告官憲文)'을 만들어 배포하였다. 이 경고문은 3.1혁명 당시에 배포된 격문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으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실렸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르노니 너희 조선인으로 왜놈의 관리된 자야 양심에 따라 스스로 반성하라.… 의를 의지하고 일어선 2천만 민족이 모두 너희들을 쳐 죽일 생각임을 모르는가. 아니면 절개를 지키며 숨져간 30만 충령이 이미 너희를 죽이기로 한 결정을 모르는가. 위로는 하늘이 두렵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이 부끄럽지 않느냐. 너희 할애비 너희 애비의 피가 과연 네 골수에 흐르고, 충이니 의이니 하는 마음이 아직도 네 마음속에 남았거든 북을 치고 공격할 때를 기다리지 말고 힘을 내어 무기를 거꾸로 들고 돌이켜 길을 바꿈으로써 크게 후회하는데 이르지 않도록 하여라."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석한 민족대표는 29인이었다. 이들은 선언식이 끝난 후 모두 일경에 체포돼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불참한 4인 가운데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등 3인은 그 후 구속돼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김병조는 체포되지도 않았고, 따라서 취조나 감옥살이를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3.1혁명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기소중지 상태였다.

상해로 망명 후엔 임시정부 활동

그가 상해로 망명한 정확한 일자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월 중순경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4.11) 후 4월 22일 개최된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 때 그는 김구, 선우 혁 등과 함께 의원으로 참석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봐 그는 김구 일행과 함께 중국 안동(현 단동)에서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4월 중순경에 상해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민족운동연감> 등에 따르면, 그는 안승원·장덕로·이원익·조상섭·김구 등과 함께 4월 13일 상해로 건너왔으며, 당시 상해에 집합한 독립운동가들의 숫자가 무려 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새로 마련된 임시의정원법에 따라 1919년 4월 30일 임시의정원 제4차 회의가 열렸다. 그는 이날 회의에서 손정도 등과 함께 평안도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7월 7일 열린 제5차 회의에서는 법제위원회(위원장 홍진) 이사와 국제연맹회제출안건작성특별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어 8월 8일 열린 제6차 회의에서 그는 외교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듬해 1920년 2월 23일 열린 임시의정원 제7차 회의 의사록에는 그가 상임위원회 제2과(내무외무) 소속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이후 의사록에는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해 3월 25일부로 그는 의원직을 그만두었다.

임시의정원 시절 그는 의정활동 외에도 외교선전 및 사료편찬 작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손정도·장덕로·김시혁·김승만 등 11명의 기독교 목사와 장로 명의로 한국시사진술서를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이 문건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한국대표 김규식의 활동을 지원하고 세계장로교연합회 및 미주 각 교회에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호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무렵 그는 손정도 목사와 함께 한국 기독교 대표들이 중국 기독교계에 고하는 글을 발표하여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기독교계의 관심과 지원을 촉구하기도 했다.

임시정부는 1920년 3월 10일 지방선전부 규정을 공포하였다. 지방선전부는 국내외의 국민들에 대한 선전사무를 맡은 조직으로 책임자인 총판(總辦)은 도산 안창호가 맡고 있었다. 그는 도산의 추천으로 이사를 맡아 지방 선전대원들을 국내에 파견하여 임정의 활약상을 국내 동포들에게 알리고 독립운동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는 또 임정의 외곽단체인 상해 대한교민단과 대한적십자회 간부로 활동하였고, 임정 산하의 교육기관인 인성학교 교사로 한인교포 자제들의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1921년 4월에는 신익희·여운형·조동호·최창식 등과 함께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창립하여 한중 관계 증진을 도모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사료편찬위원(1919.6)

 
상해 시절 그가 역점을 두었던 사업 가운데 하나는 독립운동 관련 사료수집과 편찬이었다. 이 일은 임시정부에서도 관심사였다. 1919년 5월 12일 열린 제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 조완구는 시정연설을 통해 "3월 1일부터 진행한 역사를 편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어 7월 8일 제5차 회의에서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는 시정연설을 통해 국제연맹에 제출할 안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국무원에서 "한일관계사 자료를 조사, 편찬 중"이라고 밝혔다.

임시정부가 한일관계사료집 편찬에 공을 들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3.1혁명으로 한민족의 독립운동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나 부정확한 언론보도와 일제가 오도한 내용이 많았다. 한 예로 일제는 강제병합 후 한국침략과 지배를 '개혁과 진보'로 미화시켜 외국에 선전한 사례도 있었다. 출범 후 외교활동에 주력하고 있던 임시정부로서는 이를 바로잡는 일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7월 11일 회의에서 특별위원으로 김병조·오의선·최창식·정인과·이춘숙 등 5인을 선출하여 '국제연맹회제출안건작성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사료집 편찬은 시일이 급박한데다 자료와 집필자 부족으로 애를 먹었다. 국제연맹회에 제출하여 세계열강들이 열람케 하기 위해서는 늦어도 9월 이전에 발송해야 했기 때문에 실제 편찬기간은 50일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자료수집의 어려움으로 당초 계획했던 분량의 10분의 1도 기술하지 못했다.

임시사료편찬회는 33명으로 구성되었으나 실제 자료수집과 집필에 참여한 사람은 김두봉, 김병조, 이원익 3인에 불과했다.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8월 하순경 편찬 정리 작업이 일단 마무리되었다. 10여명이 필경(筆耕)에 참가하여 1백질을 등사하고 편찬을 마친 때가 9월 23일이었다. <독립신문>은 9월 29일자에서 그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安昌浩 氏를 總裁로 하고 李光洙 씨를 主任으로 한 臨時史料編纂會는 八名의 委員 二十三名의 助役의 連日 活動으로 本年 七月 二日에 始하여 九月 二十三日에 韓日關係史料集의 編纂 及 印刷를 終了하다. 該 史料集은 國際聯盟의 提出할 案件에 對한 參考의 目的으로 編纂됨인데 此를 四冊에 分하여 合 一百帙을 完成하다"
 

김병조가 집필자로 참여한 <한일관계사료집>(1919.9) 표지 (자료사진)

 
<한일관계사료집>은 임시정부가 국제연맹에 제출할 목적으로 편찬한 역사서이자 자료집이다. 84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편찬하다 보니 오류도 있고 부족한 점도 있지만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지는 가치와 의미는 크다. 우선 이 사료집은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행한 최초의 사료집이자 역사서이다. 아울러 일제의 조선침략 및 통치 미화정책에 맞선 투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료집은 총 4부 739쪽으로 구성돼 있는데, 고대로부터 경술국치에 이르는 부분(1부)은 김두봉이, 국권상실과 독립투쟁사 부분(2~4부)은 김병조와 이원익이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정은 <한일관계사료집> 편찬이 완료되자 임시사료편찬회를 해산하였다. 그는 사료집 편찬과정에서 수집한 사료를 토대로 <한국독립운동사략(史略)>을 집필하였다. 총 1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894년 동학혁명에서부터 1920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외세의 침략과 이에 대항한 한민족의 독립투쟁이라는 시각에서 정리하였다. 1920년 상해 선민사에서 한글과 중문판으로 발간되었는데 같은 시기 간행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와 함께 독립투쟁사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이밖에도 그는 1924년 만주 집안현에서 <독립혈사>를 저술하였다고 하나 실물은 남아 있지 않다.

그 무렵 임정은 존폐 문제를 놓고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어 극심한 내부갈등을 겪고 있었다.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의가 열려 사태수습에 나섰으나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상해 생활을 청산하고 서간도로 향했다. 이후 그는 집안현 화전자 교회와 패왕조 교회를 담임하면서 목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재만 한인 기독교도들의 정신적 지주로 떠오른 그는 1926년에 남만(南滿)노회장, 1932년에는 북만노회장으로 선출돼 한인교회를 이끌었다. 당시 그는 본명 대신 '윤석'이라는 자(字)를 이름으로 사용하면서 활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만주 생활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31년 만주사변에서 승리한 일제가 이 지역에 괴뢰국 만주국을 세우면서 더 이상 목회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상해로 망명한 지 14년 만인 1933년 4월, 그는 귀국길에 올랐다.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한 것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점도 고려한 결정이었다. 도중에 신의주역에서 임의동행 형식으로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일경은 앞으로는 독립운동에 관여하지 않고 일제의 시책에 협력하겠다는 서약서를 쓰라고 강요하였다. 그가 이를 거절하자 요시찰 대상자로 지목돼 '30리 이내'로 주거제한 조치가 취해졌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시키기 위해 소위 황민화 정책을 폈다. 일본어 상용(常用),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의 서사 암송 등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여서 기독교인들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웠다. 교계의 주류세력들은 일제와 타협하여 신사참배에 나섰으나 그는 끝내 이를 거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그는 목회 생활을 접고 정주군 덕언면 덕흥동 묘두산 아래로 거처를 옮겨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해방 후 소련군에 피검된 사실을 보도한 기사(현대일보, 1947.3.19.)

 
그는 은둔지에서 8.15 해방을 맞았다. 일제가 물러간 이 땅에는 새로운 외세가 등장하였다. 남한 땅에는 미군이, 북한 땅에는 소련군이 주둔하였다. 그는 평양의 조만식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독립국가 건설에 나섰다. 소련군의 북한 공산화 조치에 반대하여 그는 청년들을 모아 그해 11월 광복단을 조직하여 반소, 반공,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조만식은 연금되었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에 인민군에게 살해되었다. 그 역시 1946년 12월 24일 정주에서 동지 10여 명과 함께 체포돼 신의주감옥에 구금되었다. 이후 1947년 2월 20일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로 옮겨졌고, 3년간의 중노동 끝에 1950년 9월 현지에서 73세로 별세하였다.

1962년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때 그는 순국선열로 공인되었으나 해방 후 북한에 체류했다는 이유로 서훈 대상자에서 제외되었다. 그 후 그의 사망 경위가 밝혀지면서 1990년 3.1절에 뒤늦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그의 묘소는 시베리아 모처에 있을 걸로 추정될 뿐 여태 확인되지 않았다. 평북 정주 출신 실향민 모임인 정주군민회는 2014년 5월 7일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소재 정주동산에 이승훈, 이명룡, 김병조 등 3인의 추모비를 세웠다. 그의 막내아들 김행식 역시 대를 이어 목사로 활동하였으며, 한동안 33인유족회를 이끌었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권, 1987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김병조 편', 2000.3
- 김형석, <일재(一齋) 김병조(金秉祚)의 민족운동 : 순국선열·순교자 김병조 목사 일대기>, 남강문화재단 출판부, 1993
- 김행식, <일재 김병조 평전>, 한민족독립정신사상연구회, 2002
- 이현희, '3.1혁명과 기독교 대표의 민족독립운동-민족대표 김병조와 정춘수 중심의 독립운동 평가', 33인유족회, 2007.3.20
(그밖에 독립신문, 동아일보, 현대일보, 경향신문 등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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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