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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2.19 08:05 수정 2019.02.19 17:54
<오마이뉴스>는 창간 19주년이자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33일동안 특별연재 '민족대표 33인 열전'을 시작한다. 필자 정운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 처장을 지낸 친일문제 전문가이다. 이 글은 첫번째로 의암 손병희 편이다.[편집자말]
 

손병희


손병희의 삶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동학군의 북접 통령으로서 10만 혁명군을 이끈 혁명가이자 동학 3세 교조로 천도교를 창건한 종교지도자이기도 하다. 또 국권회복을 위해 3.1혁명을 주도한 독립운동의 선각자이자 수많은 학교를 세우고 인수해 후세교육에 앞장선 교육자요, <만세보>와 <천도교월보>를 창간하고 보성사를 차려 출판 사업을 한 언론·출판인이기도 하다. 이 모두를 아울러 한 마디로 집약한다면 그는 한국 근세사의 경세가(經世家)라고 할 수 있겠다.

'서자' 콤플렉스 손병희, 동학을 만나다
   
손병희(孫秉熙)는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원군 대주리에서 태어났다. 청주목(牧)의 하급관리 출신의 부친 손두흥(孫斗興)과 그의 둘째부인 경주 최씨 사이의 서자 출신이다. 본관은 밀양, 아호는 소소(笑笑), 도호는 의암(義菴)이다. '의암'은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이 내린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은 응구(應九)인데 언제 병희(秉熙)로 개명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일본 망명 시절에는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쓴 적도 있다.

어려서부터 그는 의협심이 강하고 총명했다고 한다. 이에 관해서는 수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그런 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징크스가 하나 있었다. '서자 출신'이라는 딱지였다. 이 때문에 그는 성장기에 적잖이 방황하였다. 그 무렵 이복형(손병권)의 장남으로 7년 연상의 조카 손천민(孫天民)과 동학접주 서순택의 소개로 동학에 입도하였다. 그때가 1882년 10월 5일,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신분차별에 크게 좌절하였던 그에게 동학은 커다란 희망이었다. 그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골자로 하는 동학이야말로 당대의 사회적 모순을 척결하는 시대정신이라고 인식하였다.

동학 입도 2년 뒤인 1884년 10월 그는 해월 최시형을 찾아가 만났다. 해월은 첫 눈에 그의 인물됨을 알아봤다. 1892년 그는 동학 교단의 지도자들과 함께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寃)운동을 전개하였다. 일행은 광화문 앞 차가운 길바닥에 엎드려 소위 '복합상소(伏閤上疏)'를 하였는데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자 이듬해 3월 중순 동학교인 2만여 명은 충북 보은에 집결하여 '보국안민'과 '척왜척양(斥倭斥洋)'을 부르짖으며 정부를 상대로 보름 동안 농성을 벌였다. 이때 그는 '충의대접주(忠義大接主)'가 되어 충청도 일대 동학교인들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1894년 2월 10일, 전라도 정읍 고부에서 전봉준이 봉기하였다. 동학교도 출신의 전봉준은 봉기하면서 탐관오리 숙청과 보국안민을 천명하였다. 지역의 농민 수천 명은 고부관아를 습격하여 불법적으로 수탈한 수세미(水稅米)를 되찾아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남접(南接)이 중심이 된 농민군은 봉기 10여 일 만에 그 숫자가 1만여 명에 달했다. 5월 10일 황토현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이어 정읍관아를 점령한 후 기세를 몰아 5월 31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해월과 손병희가 이끈 북접(北接)은 지원은커녕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당시 북접은 농민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뒤 상황이 반전되었다. 관군과 일본군이 남접, 북접 할 것 없이 농민군을 공격하자 급기야 9월 18일 해월은 각 포(包)의 두령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이 때 손병희는 중군 통령(統領)에 임명돼 북접 소속의 10만 명에 이르는 농민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9월 중순부터 한 달 만에 북접 산하의 농민군은 경기도 일대를 석권하고 충북 보은으로 집결하였다. 이후 보은수비대를 격파한 농민군은 논산에서 전봉준의 남접과 만나 연합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이 잘 훈련되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하기란 버거운 일이었다. 당시 양측의 화력은 250대 1수준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벌인 첫 대규모 접전은 공주 우금치 전투였다. 예상했던 대로 농민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남북접 연합군은 순창에서 공동행동을 포기하고 충청도로 북상하였다. 이후 관군의 추격이 심해지자 지도부는 12월 24일 잔여부대를 해산하고는 후일을 도모하였다. 얼마 뒤 전봉준 등 주도세력은 체포되었고, 전봉준은 1895년 3월 29일(음력) 손화중 등 동지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전봉준이 처형되자 관군은 해월과 손병희를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도피생활로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던 해월은 후계자 선정을 서둘렀다. 그는 손병희·김연국·손천민 등 북접의 대표적 지도자 3인을 불러 놓고는 손병희를 북접 대도주(大道主)에 임명했다. 이로써 손병희는 입도 15년 만에 동학의 3세 교주가 되었다. 그의 나이 37세 때였다.

그러나 그의 앞길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우선 해월이 처형당한 후 교단은 잠시나마 교권다툼을 벌였다. 입도 등에서 앞선 김연국의 반발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교단을 정비하는 일도 급선무였지만 관군의 추적을 따돌리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경북 예천에 은신해 있던 무렵 관군의 추적을 피해 충북 제천까지 하루 만에 100리 길을 걸어 피신하기도 했다. 1900년 8월 교단의 지도자 손천민과 서장옥이 붙잡혀 결국 처형되었다. 손천민은 혈족이자 그를 동학으로 인도한 은인이었다. 그는 급히 호서지역으로 이동해 몸을 피한 후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

그 무렵 시국은 날로 급변하였다. 서양의 신문명은 하루가 다르게 조선반도를 두드렸다. 1895년에 유길준이 펴낸 <서유견문>은 당시로선 큰 충격이었다. 그는 동학을 널리 포교하려면 세계 문명국처럼 개화(開化)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그는 문명개화를 배우기 위해 미국행을 결심하였다. 여기에는 관군의 무자비한 탄압을 피할 요량도 있었다.

1901년 3월 그는 미국으로 가기 위해 동생 손병흠과 이용구를 대동하고 원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미국행은 좌절되었는데 경비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미국행을 포기하고 일본에 눌러 앉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 전역을 다니면서 선진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정세를 두루 살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훗날 3.1거사를 도모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게 될 동지들을 여럿 만나게 됐다. 그들은 조선에서 피신한 망명객들이었다. 대표적으로 을미사변에 연루돼 망명한 무관 출신의 권동진(權東鎭), 소위 '일심회 쿠데타 사건'에 연루돼 망명한 오세창(吳世昌) 등이 그들이다.

당시 그는 이상헌(李祥憲)이란 가명으로 '충청도 부자' 행세를 했는데 이는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일본 체류 시절 두 차례에 걸쳐 천도교인의 자제 64명을 일본에 유학시켜 선진문물을 배우도록 하였다. 어린이날을 제정한 아동문학가이자 나중에 그의 사위가 된 소파 방정환(方定煥), 춘원 이광수(李光洙)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또 일본 체류시절 소위 '삼전론(三戰論)'을 통해 독자적인 개화 자강책을 구상하기도 했다.

그 무렵 일본과 러시아는 1903년 5월에 발생한 '용암포 사건'을 계기로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급기야 이듬해 2월 8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그는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것으로 보고 일본군에 군자금 1만 원을 기증하였다. 그의 속셈은 일본군이 승리하면 그 힘을 빌려 국정을 일대 쇄신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도리어 이 일로 그는 친일파란 비난을 사게 됐고, 이 와중에 동생 병흠마저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러일전쟁에 앞서 그는 조선정부에 상소문을 보내 비정(秕政) 개혁을 촉구했다. 그러나 망명객의 호소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는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1904년 4월, 그는 이종훈(李鍾勳) 등 동학 지도자 40여 명을 도쿄로 불러 민회(民會)를 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민회는 처음에는 대동회로 불렀는데 도중에 중립회로 바꾸었다가 최종 진보회(進步會)로 정했다. 1904년 8월 전국에 진보회를 결성한 후 단발을 시행하고 흰옷 대신 흑의(黑衣·개화복)를 입게 하였다. 소위 '갑진(甲辰)개화운동'이 그것이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근대문명을 수용하고 민회를 조직하여 조선을 근대 국민국가로 개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도에 악재가 터져 이 운동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심복이자 진보회 회장을 맡고 있던 이용구(李容九)가 개인적인 이권을 위하여 송병준의 일진회(一進會)와 통합한 것이 문제가 됐다. 일진회는 '을사늑약' 직전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한 친일단체였다.

이 일로 동학은 세간에서 매국단체로 매도당하였다.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자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이어 이듬해 1월 5일 급거 귀국하여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해 9월에는 이용구 등 62명의 일진회 무리를 출교(黜敎)처분하는 등 교단정비에 나섰다.

이용구 무리를 쫓아냈지만 교단은 후유증이 적지 않았다. 교단의 재정을 쥐고 있던 그들에게 재단의 재산 상당 부분을 탈취 당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한동안 집세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해 대문을 봉쇄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용구 일파가 떨어져 나갈 때 신도 가운데 상당수가 따라 나가 교세도 현저하게 준 상태였다.

이 때 그가 고안해낸 것이 성미제(誠米制)였다. 끼니마다 쌀을 조금씩 모아 교단에 바치는 성미제는 의외로 신도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어 교단의 재정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대도주를 지낸 박인호(朴寅浩)의 신문조서에 따르면, 각 교구에서 모은 쌀을 금전으로 환전하면 매년 10만 원 정도 됐는데 그 중 5만원은 해당 지방에서 쓰게 하고 5만원은 중앙총부로 보냈다고 한다.

탄탄한 재정을 토대로 그가 시작한 사업은 '삼전론'의 마지막 '언전(言戰)', 즉 언론·출판 사업이었다. 일본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활자 등 인쇄시설을 기반으로 1906년 2월 27일 박문사(博文社)라는 출판사를 세웠다. 그해 6월에는 천도교 기관지로 <만세보(萬歲報)>를 창간하였는데 초대사장은 오세창이 맡았다. 오세창은 창간사에서 "아한(我韓) 인민의 지식을 계발키 위하여 작(作)함"이라며 민중 계몽지를 자임했다. 실지로 <만세보>는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한편으로는 문명개화·문화계몽 등 민중계몽에 적극 앞장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만세보>는 운영난으로 창간 1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 무렵 그의 또 다른 관심사는 교육 사업이었다. 그는 일본 체류시절에도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켜 근대 교육을 받게 하였다. 우선 1차로 당시 재정난으로 허덕이던 보성학원(현 고려대)을 인수하였다(1907.12). 당시 그가 보성학원을 인수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고려대학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런 인연으로 해방 후 고려대는 교정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이어 여자 교육기관인 동덕여학교(현 동덕여대)가 심한 경영난에 빠진 것을 알고 매월 10원씩 보조금을 지급하였다. 이밖에도 보창학교, 양명학교, 창동학교 등 20여 개의 사립학교에 매달 일정액을 지원하는 등 후세교육에 관심을 쏟았다.

1910년 8월 일제는 조선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 총독부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손병희를 '사이비 교주' 등 갖은 비방과 음해를 일삼았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 천도교의 신도 수는 되레 급증하였다. 당시 나라 잃은 민중들에게 천도교는 유일한 마음의 의지처 같은 존재였다.

교인이 폭발적으로 늘고 교세가 확장되자 교인 수련도장으로 북한산 우이동에 봉황각을 건립하였다. 그는 전국 각지의 지도급 간부들을 이곳으로 불러 '연성회(練性會)'라는 수련회를 개최했다. 겉으로는 기도회요, 수련회였으나 이는 3.1혁명에 대비한 정신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은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회합을 갖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3.1혁명 거사가 이곳에서 싹 튼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권상실 이후 민족종교인 천도교는 지속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그 선두에는 제국신문 사장 출신으로 독립선언서 인쇄를 맡았던 옥파 이종일(李鍾一)이 있었다. 그가 남긴 회고록 <묵암 비망록>에는 그런 흔적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특히 이종일이 사장으로 있던 보성사 사원들은 비밀결사체인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 등을 꾸려 활동했다. 이들은 또 군자금을 모아 독립의군부에 전달하기도 했으며, 1913년에는 '천도구국단'을 꾸려 민중봉기를 계획하기도 했다. 천도구국단의 명예총재는 손병희, 단장은 이종일, 총무는 보성사 직원 장효근이 맡았다. 이들은 실지로 장총과 실탄을 구입해 만약에 사태에 대비하였다.

1918년 파리 세계평화회의 '민족자결주의'

1918년 1월 중순, 파리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렸다. 이는 1914년부터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차원이었다. 이 회의에서 윌슨 미국 대통령은 '14대조 평화원칙'을 공표해 주목을 끌었다. 그 가운데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약소국에겐 복음과도 같았다. 천도교 내부에서도 이를 눈여겨 본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종일 등은 손병희를 찾아가 민중봉기 계획을 설명하고 타 종교단체와 연대하여 시위를 일으키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손병희는 "아직 때가 아니다"며 이를 만류하였다. 그 나름의 복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1919년 1월 상순, 그는 권동진·오세창·최린 등 측근 3인방을 불렀다. 그리고는 이들에게 국권회복 방안으로 여섯 가지를 신중하게 연구·검토하도록 지시하였다. 여섯 가지 방안은 △무력봉기 여부 △대중시위 수단 △외교활동 전개 △국민대회 개최 △독립청원서 제출 △독립선언문 발표 등이다. 그리고는 2월 28일 그는 천도교 교주 자리를 대도주 박인호에게 넘겨주었다. 이를 두고 "손병희 스스로가 죽음을 각오하고 3.1운동에 임하겠다는 결의를 나타낸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민족진영 내 여러 그룹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우선 재일 한국유학생들은 현지에서 발행된 신문을 통해 이 소식을 접하고는 자주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하였다. 또 상해 신한청년당의 여운형(呂運亨) 대표는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金奎植)을 파리에 파견하여 국제정세를 살폈다.

기독교 진영도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주의 유명 기업가 출신이자 기독교계에서 신망이 두텁던 남강 이승훈(李昇薰)은 상해에서 밀파된 선우혁의 방문을 받고 관서지방 기독교계 인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그해 11월(음력)에는 만주·노령(露領) 지역의 망명 지사들이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해 독립전선에 불을 지폈다.

3.1혁명 과정에서 천도교의 빼놓을 수 없는 공로 가운데 하나는 자금조달이다. 김규식의 파리 파견 경비 10만원 가운데 3만원, 3.1 거사 때 기독교 측의 경비 5천원은 전부 천도교에서 부담했다. 천도교는 100만원의 독립기금을 모으기 위해 1918년 4월 4일 열린 부구(部區)총회에서 중앙대교당 및 중앙총부 건물 신축을 결의했다. 건축자금 명목으로 모은 돈 가운데 일부를 독립기금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실지로 교당 건축성금으로 모인 1백만 원 가운데 건축비로 쓴 돈은 27만여 원이었으며, 대부분은 독립기금으로 사용되었다. 성금은 남자들은 짚신을 삼고 여자들은 삯바느질 품삯을 모은 돈이었다.

1919년 1월 20일, 권동진 등 측근 3인방은 동대문 밖에 있던 손병희의 사저(상춘원)를 찾았다. 이들은 그에게 때가 무르익었으니 교단 차원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을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흔쾌히 허락하고는 '3대 원칙'을 결정하였다.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는 3인방에게 역할을 분담시켰다. 권동진과 오세창은 천도교 내부의 일을, 최린은 천도교 외부와의 관계를 담당하도록 했다. 그밖에 구체적인 사안은 이들에게 위임하였다. 이로써 천도교 내부에서 3.1 거사의 깃발이 오른 셈이다.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외부 인사들과의 연합을 도모하는 일이었다. 대상은 타 종교 지도자들과 구한국 관료 출신 가운데 명망가들이었다. 당시 천도교를 비롯해 종교계 지도자들은 대중적인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아 이들을 얼굴로 내세울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1차로 윤용구·박영효·한규설·윤치호 등을 대상자로 선정해 접촉하였다. 그런데 결과는 모두 허사였다. 때가 좋지 않다느니 혹은 칭병(稱病)을 내세워 하나같이 참여를 거부하였다. 심지어 그는 매국노 이완용을 찾아가 동참을 호소하였으나 이완용마저도 끝내 사양하였다. 그러자 최린은 "독립운동의 신성한 제전에 늙은 소보다 어린 양이 좋다"는 말로 자위하면서 자신들이 대표로 나서기로 하였다.

결국 종교계로 집중하기로 방향을 정하였다. 그런데 당시 천도교 내에서는 기독교 쪽과 교섭을 맡을 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이에 대외교섭 담당인 최린은 일본 유학시절에 알게 된 육당 최남선(崔南善)을 찾아가 부탁했다. 육당은 기독교 측과도 교류가 깊었고 청년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다. 육당은 김도태를 통해 평북 정주의 이승훈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2월 11일 상경한 이승훈은 천도교 측을 대리한 송진우와 만나 천도교 측의 거사 추진 상황을 접하게 되었다. 이튿날 평북 선천으로 돌아온 이승훈은 장로교 지도자들과 이 문제를 협의하였으며, 이후에는 다시 감리교 지도자들과도 협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함태영, 이갑성 등이 큰 도움을 주었다.

2월 22일, 기독교 측 대표 격인 이승훈과 함태영은 최린의 집을 방문했다. 이날 모임에서 매우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당초 기독교 측에서 계획했던 독립청원서 대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하고, 양측이 연대하여 '일원화'를 이뤄내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틀 뒤 24일 이·함 두 사람은 다시 최린을 만나 양측의 연대를 최종 결정하였다. 이날 모임에서는 또 독립운동의 추진방법에 대해 세부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거사일은 3월 1일 오후 2시로 하고,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독립을 선언한다.
② 독립선언서는 비밀리에 인쇄하여 서울에서는 독립선언 당일 군중에게 배포하여 만세를 부르게 하며, 지방에는 이를 분송(分送)한다.
③ 독립선언서를 각 지방에 분송할 때 서울에서의 일시 및 독립선언서 배포 절차를 전달하여 각 지방에서도 서울을 따르게 할 것.
④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기초와 독립선언서 인쇄는 천도교 측에서 담당할 것.
⑤ 독립선언서의 배포와 분송은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에서 각각 담당할 것.
⑥ 일본 정부와 일본 귀족원·중의원의 양원에 보내는 통고문은 천도교 측에서 담당하여 보내고,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의의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청원서는 기독교 측에서 담당하여 보낼 것.
⑦ 조선민족대표로서 각 서면에 연명할 사람은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각각 십수 명을 선정하도록 할 것.
⑧ 독립운동에 참가를 요구하고 있는 불교도도 연명에 참가시킬 것.


기독교 측과의 연대문제가 해결되자 불교 측 섭외에 나섰다. 최린은 2월 24일 밤 서울 재동 43번지 만해 한용운의 집을 방문하였다. 당시 만해는 이 집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행하면서 불교 혁신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만해는 즉석에서 동참할 것을 승낙하고는 불교계의 동참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선승이라는 특수 신분과 사찰이 산간 오지에 있어 연락이 쉽지 않았다. 결국 당시 서울 종로 3가 대각사의 백용성 혼자 서명을 받아내는 데 그쳤다. 당시 불교계의 다수가 이미 친일의 길로 들어서 상태여서 더 이상 동참을 이끌어내는 일이 쉽지도 않았다.

결국 민족대표로 참가한 33인은 전부 종교인들이었다. 이들이 3.1거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당시 상황 때문이었다. 총독부의 무단정치 하에서 웬만한 민족단체는 전부 해산 당하여 씨가 말라 있었다. 그나마 국내에 남은 조직적인 세력은 종교단체와 학교뿐이었다. 유림 역시 접촉하였지만 소극적인데다 참여의사를 밝힌 심산 김창숙은 모친의 병환 때문에 뒤늦게 연락이 닿아 선언서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반면 서울시내 전문학교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이들은 한때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을 할 계획으로 선언서까지 만들어 두었으나 최종적으로 민족대표들과 연대하기로 하였다. 3.1혁명 당시 이들은 민족 대연합전선의 전위대로 활동하였다.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장로교 7, 감리교 9), 불교 2인 등으로 구성됐다. 이들 외에도 천도교의 박인호와 노헌용, 기독교의 함태영과 김세환, 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 등을 포함하여 흔히 '민족대표 48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 가운데 함태영, 송진우 등은 뒷일을 대비해 일부러 빠졌으며, 최남선은 "학자로 남겼다"며 선언서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서명자가 확정되자 2월 27일 밤 최린의 집에서 각 종교별 대표자들이 모여 독립선언서 날인 순서를 정하였다. 논의 끝에 손병희를 영도자로 모시기로 하고 제일 첫머리에 이름을 올렸다. 그 다음은 기독교를 대표해 길선주(장로교)·이필주(감리교) 목사가 2번과 3번을, 네 번째로는 불교 대표 백용성의 이름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거사 하루 전날인 2월 28일 재동 손병희 집에서 최종 점검모임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행사 장소를 당초의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선언식에 참석한 학생과 시민들이 일경과 충돌하여 불상사가 생길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거사 날짜를 3월 1일로 정한 것도 이유가 있었다. 3월 3일은 고종의 인산일인데다 3월 2일은 일요일(주일)이어서 이 날짜는 피할 수밖에 없었다. 선언식 장소인 태화관은 한때 이완용이 살던 집으로 이곳에서 을사5조약과 한일병탄조약이 입안·논의되었다. 바로 그런 치욕의 장소에서 독립선언을 함으로써 반(反)독립적인 조약을 전부 무효화시킨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3.1 선언 당시 상황을 담은 기록화.


3월 1일 오후 1시, 그는 권동진 등 측근 4~5명과 함께 태화관에 도착했다. 오후 2시가 되자 예정대로 태화관 1실(室)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그 시각 인근 6호실에 열혈청년 6명을 극비리에 잠입시켜 당시 상황 일체를 기록하도록 하였다. (<3.1운동비사(秘史)>를 펴낸 이병헌은 6인 가운데 한 사람임)

선언서 낭독은 생략한 채 바로 한용운이 간단한 인사말을 시작했다. 이어 참석한 29인의 민족대표가 독립만세를 삼창하였다. 곧이어 일제 관헌들이 들이닥쳐 민족대표들을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하였다. 지방에서 뒤늦게 올라온 길선주·유여대·정춘수 등도 자진해서 경찰에 출두하여 이들과 합류하였다. 김병조 한 사람만 상해로 망명하여 구속을 피했다.

연행 당일로부터 취조가 시작되었다. 경무총감부에서 1차 취조를 마친 후 일행은 서대문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다시 몇 차례의 심문을 거쳐 4월 4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었다. 일제의 통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으니 일제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사범(國事犯)에 해당됐다.

아니나 다를까 예심 재판부는 민족대표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해 극형에 처할 방침이었다. 재판부는 특히 '공약 3장'의 제2항 가운데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대목을 문제 삼았다. 이는 민중폭동을 선동한 것이 아니냐며 심문과정에서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따져 물었다. 8월 상순 재판은 경성고등법원으로 이송되었다.
 

손병희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9.26)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일본 제국의회에서는 조선인의 반감을 우려한 나머지 이들에게 '가벼운' 형벌을 내리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의회의 여론은 곧 재판에 반영되었다. 고등법원은 내란죄 대신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명목으로 사건을 경성지방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장차 조선이 독립되면 민주정체(政體)로 할 생각이었다"며 "조선이 독립되더라도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그의 신문조서 가운데 1919년 7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의 진술 한 대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문: 피고 등은 독립을 선언하면 어떤 순서에 의하여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답: 나는 세계가 개조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에 보내면 일본정부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조선을 독립시킬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문: 조선이 독립되면 어떤 정체의 나라를 세울 생각이었는가.
답: 민주정체(政體)로 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나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런 생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유럽전쟁이 한창일 때 교도들과 우이동에 갔을 때, 전쟁이 끝나면 세계의 상태가 일변하여 세계에 임금이란 것이 없어지게 된다는 말을 한 일이 있다.
문: 피고는 천도교를 생명으로 한다는 것이고, 사람을 훈화해야 할 지위에 있으면서 정치의 와중으로 뛰어 들어 조선의 독립을 기도한다는 것은 피고의 사상에 위반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떤가.
답: 그것은 종교가 만족스럽게 행해지도록 하기 위하여 조선의 독립을 도모했는데, 종교가 만족스럽게 행해지지 못하는 동안은 아무래도 종교가가 정치에 관계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문: 그러나 역사상 순정한 종교는 정치와 혼효되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것이 명백한데, 천도교는 정치에 대한 비밀결사이었기 때문에 이번 조선독립을 기도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떤가.
답: 국가가 종교를 도와주면 정치에 관계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는 한에는 종교는 정치에 붙어가서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종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조선의 독립을 기도한 것이다. 나는 조선이 독립국이 되더라도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은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독립 후에 벼슬길에 나아간다고 한다면 정치상의 야심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할 수가 없지만, 나에게는 종교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손병희는 측근 3인방 등 7명과 함께 최고형인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재판 도중에 양한묵은 옥사하였다. 33인 가운데 길선주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 사이에 서울과 상해 등지에서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대한민간정부와 대한국민의회에서는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어의 몸이어서 부임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그의 뜻도 아니었다. 이는 당시 그가 한국사회에서 차지한 위상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손병희가 없었다면 3.1운동도 없었다"

서대문감옥 독방에 갇힌 그는 천도교 주문을 외고 수련을 하면서 하루 일과를 보냈다. 평소 위장이 좋지 않은 그를 위해 주옥경은 하루 두 차례씩 사식을 차입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11월 28일 뇌일혈로 쓰러져 병감(病監)으로 옮겨졌다. 이에 주옥경은 그의 보석을 신청하였으나 감옥 측은 허락하지 않았다. 경성복심법원 재판 때 그는 침대에 누운 채로 출정하여 심문을 받기도 했다. 그로부터 근 1년 뒤인 1920년 10월 22일 그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매일신보, 1920.10.24). 보석금으로 1500원을 내고서였다. 상춘원에서 요양을 하던 그는 이듬해 1922년 5월 19일 새벽 3시 62세로 생을 마감했다. 이날 아침 서울시내 거리에는 그의 부음을 알리는 호외가 뿌려졌다.
   

손병희의 서거를 알린 동아일보 호외(1922.5.19.)


총독부는 그의 장례식도 방해하였다. 많은 사람이 모이다 보면 시위가 벌어질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장례는 천도교장으로 6월 5일 치르기로 했고, 장례위원장은 권동진이 맡았다. 5일 아침 상춘원에서 발인하여 천도교 대교당에서 영결식을 마친 후 도중에 삼선교에서 약 한 시간 동안 시민·학생 등과 고별식을 가졌다. 5천여 명이 참석한 영구행렬은 30리에 달했는데 그 뒤로 자동차 10여 대와 200여 개의 인력거가 따랐다. 그의 유해는 이날 오후 5시 우이동 봉황각 인근에 안장되었다. 해방 후 환국한 백범 김구는 순국지사 순방 첫 번째로 그의 묘를 찾았다.

1959년 3.1독립선언 40주년을 맞아 '의암손병희기념사업회'가 꾸려졌다. 기념사업회는 그해 10월 8일 우이동 그의 묘소에서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 비문은 노상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일중 김충현이 썼다. 1962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했다. 서거 44주년을 맞아 3.1혁명의 성지인 탑골공원에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1980년 청주 삼일공원에 그를 포함해 충북지역 민족대표 6인의 동상이 세워졌고, 2000년에는 그의 생가 유허지에 '의암기념관'이 건립됐다.

그의 측근이자 평생 동지였던 권동진은 한 잡지 기고문에서 "손 의암(義菴)은 천도교의 태양이자 우리의 구주(救主)였다"며 "실로 근세에 조선이 가진 거인(巨人) 중 한 분"이라고 상찬했다.

<의암 손병희 평전>의 저자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기미년 3.1운동은 의암의 존재가 아니었으면 성사가 가능했을까 할 만큼 선생은 인격, 신앙심, 리더십, 인력동원과 자금지원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실로 그는 3.1혁명을 기획하고 사람을 엮어내고 자금을 대는 등 3.1혁명의 기획·연출자라고 할 수 있다.
 

손병희 묘소(서울 우이동). 금년 1월 12일 이낙연 국무총리가 총리로는 처음으로 참배, 헌화했다. ⓒ 정운현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권, 1987
- 김삼웅, <의암 손병희 평전>, 채륜, 2017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손병희 편', 1992.3
- 이진기, '의암 손병희의 문명개화론 인식과 천도교 개창', 강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2
- 박성수, '3.1운동과 의암 손병희', <중앙사론> 제21집 특집호, 2005.6
- 이현희, '의암 손병희와 3.1운동', <동학학보>, 13권 1호, 2009.6
- 송영헌, '의암 손병희의 민족독립사상', 경북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3.8
(그밖에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삼천리 등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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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