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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2.19 08:04 수정 2019.02.19 17:46
<오마이뉴스>는 창간 19주년이자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33일동안 특별연재 '민족대표 33인 열전'을 시작한다. 필자 정운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 처장을 지낸 친일문제 전문가이다. 이 글은 연재를 여는 글이다.[편집자말]
 

3.1 선언 당시 상황을 담은 기록화.

  
연초에 이낙연 국무총리가 서울 수유리에 있는 의암 손병희 선생 묘소를 참배했다. 대한민국 총리로서는 첫 참배였다. 의암은 천도교를 창건한 종교 지도자다. 일제하 천도교는 조선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버팀목 역할을 했다. 한때 천도교 신도 수가 300만 명에 달했다고 하니 지금으로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의암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요, 10만 동학군을 이끈 혁명가요, 경세가이자 독립지사이기도 했다. 그는 민족대표 33인의 우두머리 격으로 3.1혁명을 이끌고 뒷받침한 총 연출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없었다면 3.1혁명은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총리의 의암 묘소 참배는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3.1혁명과 이를 이끈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상징적 경배(敬拜)'라고 할 수 있다.

1919년 3월 1일의 전 민족적 거사는 우리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 때 전국에서 민중이 궐기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부패관료와 봉건체제에 항거한 농민집단의 반체제 투쟁이었다. 그러나 전국을 아우르지도 못했고, 남녀노소, 종파와 계층을 망라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기미년 3.1거사는 이와 분명히 달랐다.

3.1거사를 전국적으로 촉발시킨 매개체는 '선언서'였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 각계각층의 사람을 엮어내고 민심을 규합시킨 것은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였다. 33인이 목숨을 걸고 서명하지 않았다면 그 선언서는 한낱 불온 유인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선언서를 값지게 만든 주인공은 바로 민족대표 33인이었다.

그럼에도 33인에 대한 연구나 기록은 충분치 않다. 단행본으로는 1959년에 나온 오재식의 <민족대표 33인전(傳)>이 유일하다. 이후 33인에 관한 책이 두 권 나오긴 했지만 모두 33인의 재판기록에 관한 것이었다. 인물연구로는 손병희, 만해 한용운, 남강 이승훈 등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몇 분의 평전, 일대기가 고작이다. 3.1혁명 당시 33인의 역할에 비해 학계의 연구는 초라한 실정이다. 이 글은 그런 반성과 부채감에서 출발했다.

33인은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장로교 7, 감리교 9), 불교 2인 등 전부 종교인들로 구성돼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국내에는 종교 및 학생단체 외에 여타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경술국치 후 해외로 망명했거나 아니면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을 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림 측에도 연락은 갔었으나 미온적이었다. 훗날 유림은 소위 '파리장서사건'을 통해 국권회복투쟁에 나섰다.

민족대표 33인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33인 가운데 지방에 거주하던 4인은 불참, 총 29명이 참석했다. 만해 한용운의 간단한 인사말이 끝난 후 모두 자진해서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됐다. 33인은 예심에서 내란죄가 적용돼 중형이 예상됐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인들의 반발을 우려해 죄목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바꿔 상대적으로 낮은 형을 선고했다.

거사 직후에 상해로 망명한 김병조를 빼고는 전부 1~3년의 실형을 선고받고(길선주 혼자 무죄선고) 옥고를 치렀다. 양한묵은 수감생활 도중에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했다. 이같은 공로로 손병희, 한용운, 이승훈 등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 그 외 대다수는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았다. 최린, 정춘수, 박희도 등 친일로 변절한 3인과 해방 후 월북해 북한정권에 참여한 김창준 등 4명은 서훈대상에서 제외됐다.
 

3.1독립선언서

 
항간에는 33인 가운데 대다수가 친일로 변절했다는 주장도 나돌고 있는데, 이는 명백한 허위 사실이다. 민족대표 33인의 역할, 공적을 두고 학계 등에서는 다양한 평가를 내놓고 있다. 이는 평자의 시각, 역사관 등에 따라 다를 수는 있다. 그러나 33인이 3.1혁명을 이끈 공로는 결코 폄훼될 수 없다. 33인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면 전 민족적 거사에 불을 붙이진 못했을 것이다.

3.1거사 100주년을 맞아 '3.1운동' 대신 '3.1혁명'으로 고쳐 부르자는, 소위 정명(正名)운동이 일고 있다. 일제는 식민체제를 거부하고 나선 3.1거사를 소요, 소란, 폭동 등으로 불렀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 등 우리 민족진영에서는 3.1혁명, 3.1대혁명이라고 불렀다. 그러던 것이 제헌국회의 헌법 제정 과정에서 3.1운동으로 부르기로 한 후 70년이 흘렀다. 이제라도 제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응당할 것이다. 역사적 사건은 용어가 바뀌면 인식 자세도 달라지는 법이다.

이 글은 독립운동 사료, 당시 신문과 잡지, 천도교 및 기독교 측 문헌과 연구 성과를 토대로 집필하였다. 역사적 평가나 해설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초점을 맞춰 33인의 삶을 살펴보았다. 특히 초고를 유족들에게 보내 사실 확인 및 감수를 받았다. 집필과정에서 도움 받은 연구자들과 33인유족회에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이 내용은 2월초에 <3.1혁명을 이끈 민족대표 33인>(역사인 펴냄)으로 출간되었음을 밝혀둔다.


3.1 혁명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정운현 지음, 역사인(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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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