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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1.10 08:09 수정 2019.01.10 08:09
이중섭의 누상동에서 보낸 한 철

한국 근대기 서양화단의 대표적인 작가인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의 작품 중 1940년대에 제작된 2, 3점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작품은 1950년대에 제작된 것이다. 이중섭이 1956년 40세의 이른 시기에 세상을 떠나니, 그의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활동은 5~6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사이에 6.25전쟁이 3년간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활동 시기는 더욱 줄어든다. 그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천재적인 화가 이중섭의 빛나는 재능은 몇 년 사이에 샘솟듯 쏟아져 나온 것이라 할 만하다. 
 

이중섭 ⓒ 허종배

 
이중섭은 본래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일본 유학 이후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하게 된다. 더욱이 지나치게 예민한 성격 탓에 사회에 부적응하여 남보다 더욱 험한 세파를 거치며 산다. 이중섭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곳을 떠돌며 지낸다. 그래서 그가 살았던 대표적인 지역을 말하기조차 어렵다. 

이중섭은 1945년 학교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1921- )와 결혼해서 원산에 산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내려갔으나 정부의 소개령으로 제주도 서귀포로 가 1년 정도 살기도 한다. 겨우 노력해서 부산 범일동에 판잣집이나마 마련하여 돌아왔으나, 1952년에 부인과 아이들이 일본으로 떠난다. 1953년에는 공예가 유강렬의 호의로 한동안 통영에서 지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느 곳에서도 편하게 지내지 못하자 친구들은 그를 서울로 불렀다. 그렇게 서촌 누상동에서 잠시 살게 된다. 

서촌 누상동에서 지낸 1954년 한 해는 이중섭에게는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안정을 찾고 제대로 작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복궁 미술관에서 열린 제6회 대한미술협회전에는 10호 크기의 작품 3점을 출품했다. 친구인 화가 박고석의 증언에 따르면, 이 때 출품한 작품은 <소>, <닭>, <달과 까마귀>이었다고 한다. 
 

이중섭이 살던 누상동 집 2층 ⓒ 황정수

 
서울에 올라와 처음에는 인왕산 자락의 누상동에 살던 소설가 김이석의 집에 머물렀다. 김이석은 이중섭의 평양종로보통학교 1년 선배였다. 그러다가 한 달 후 바로 인근의 누상동 정치열의 집 2층으로 조카 이영진과 함께 이사한다. 이중섭은 이곳에서 10월 말까지 지내면서 이듬해 1월에 있을 서울 미도파 화랑 개인전을 준비한다. 

그는 전시를 열어 성공을 하면 일본에 가서 가족들을 데리고 올 희망을 키우며 그림을 그렸다. 가장 희망에 찬 시기였다. 그런데 빌려 살고 있던 정치열의 집마저 팔리게 되자 12월 초 마포구 노고산 기슭 신수동 이광석의 집으로 옮기게 된다. 그러니 이중섭이 누상동에 산 것은 1954년 한 해 중 몇 달 뿐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그의 창작열이 고조되어 이곳에서 좋은 작품을 많이 남긴다. 

이중섭이 살던 누상동 집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번지수로는 누상동 166-202번지이다. 인왕산 산자락 아래 좁은 골목 안이다. 옥인동 '박노수 가옥'에서 왼쪽으로 들어가 오르막의 구불구불한 골목을 몇 번 접어 들어가면 겨우 찾을 수 있다. 이중섭이 오래 산 곳도 아니어서 문화재로 보호할 만한 상황이 안 되는지 팻말 하나 없어 안내하는 이가 없으면 찾기 쉽지 않다. 마침 필자의 그림 그리는 친구가 바로 이웃에 살고 있어 그의 안내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집 형태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2층 형태의 적산가옥이다. 세월이 지나 지붕만 새로 했을 뿐 옛날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너무 좁은 골목에 위치해 그가 살았던 2층의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위쪽에 있는 집 뜰에 올라가 바라보니 이중섭이 거처하였던 방의 창문이 바로 눈앞에 다가온다. 적산가옥의 작은 창문 사이로 이중섭의 실루엣이 보이는 듯하였다. 이 방에서 개인전을 준비하였을 이중섭의 모습을 생각하니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이중섭 작품 애호가 아서 맥타가트

1955년 1월에 미도파 화랑에서 열린 <이중섭 작품전>은 많은 애호가들의 관심 속에 성황리에 열렸다. 특히 <소>가 인기가 좋았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 문정관이었던 아서 맥타가트는 이중섭 작품의 가치를 일찍 알아보고 구매를 하기도 한 미술애호가였다. 맥타가트가 전시를 관람했을 때에 소를 그린 작품 중에 일부는 이미 판매되어 있었다고 한다. 맥타가트는 일부 소 그림과 유화, 그리고 은지화 10여 점을 구매한다.
 

이중섭 <싸우는 소> 맥타가트 구장품. 국립현대미술관 도록에서 재촬영. ⓒ 황정수


당시 전시회를 하는 도중에 있었던 '소' 그림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전한다. 마침 전시회를 관람하던 맥타가트가 무심결에 "이 소 그림은 스페인의 투우만큼이나 힘이 넘치는군요"라고 내뱉고 말았다. 곁에 있던 이중섭이 이 말을 듣고 "이건 스페인 소가 아니고, 한국의 '소'란 말이요!"라고 소리치고 휙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의 화가로서의 자존심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맥타가트는 이중섭이 위대한 화가라는 것을 맨 먼저 알아본 서양인이라 불린다. 그는 이중섭의 은지화 석 점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한다. 이에 미술관 측은 이중섭의 은지화를 "예술성뿐 아니라 소재 사용과 작가의 창의성으로 봐서도 실로 매혹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당시 개인전에서는 다른 작은 소동도 있었다. 은지화 등 일부 그림이 풍기문란하다고 하여 철거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작품 속 인물들이 나체로 등장하는 것이 많아 일어난 소란이었다.

이런 소동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인기가 있어 20점 이상이 예약되었다. 주로 지인들이나 일부 애호가들이 미리 예약을 해놓은 것이다. 전시가 끝나면 수금을 한 후 작품을 보내주어야 하는 데 차질이 생겼다. 생각보다 수금 실적이 부진한 것이다. 김환기가 나서서 노력하였으나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이중섭은 의기소침 하였으나 다시 마음을 추슬러 약속된 대구 전시를 준비하였다. 서울에서 가져온 작품 20여 점과 대구에서 제작한 회화 작품 10여 점, 그리고 은지화 10여 점을 더해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이중섭 작품전>을 연속해서 열었다. 그러나 전시는 별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중섭의 실망은 컸다. 

이중섭은 이때부터 음식을 먹기를 거부하는 거식증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전시회의 결과가 성격이 예민한 이중섭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이다. 증세가 심해지자 친구인 시인 구상은 이중섭을 대구 성가병원에 입원시킨다. 이 시기 이중섭은 아내에게서 온 편지를 읽지도 않고, 편지를 보내지도 않는 등 소통을 거부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에 이광석과 김이석은 이중섭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하여 다시 수도육군병원에 입원시킨다. 겨우 증세가 완화되어 12월 중순께 퇴원시켜 정릉으로 옮겨 화가인 한묵, 시인인 조영암과 자취 생활을 시작한다. 이 때 그린 작품 중에 <정릉 풍경>이 남아 있다.

절필 작 <돌아오지 않는 강>의 사연 
 

이중섭 <돌아오지 않는 강> ⓒ 황정수

 
이중섭은 정릉에 살며 화가로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데 그의 절필 작으로 불리는 <돌아오지 않는 강> 연작도 이때 그린다. 이 특이한 제목은 한묵 등 자취하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다. 이들이 자취하던 집 근처엔 화가 박고석도 살았다. 특히 한묵, 박고석, 이중섭 셋은 잘 어울렸다. 어느 날 한밤중에 술로 거나해진 셋이 박고석의 집에 몰려와 시시덕거리면서 이중섭이 내어놓은 그림들을 보고 있었다. 당시 이중섭은 어떻게 제목을 정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시중에서 인기가 있는 마릴린 몬로 주연의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을 떠올리고는 이걸로 제목을 정하자고 누군가가 제안을 하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일본에 간 부인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인지를 예감이라도 한 것인지, 서로가 그런 느낌을 가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이중섭이 돌아오지 않는 부인을 예상하고 그린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다. 

종이 위에 그린 이 연작은 모두 구성이 비슷하다. 아이와 어머니의 모습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구조이다.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아이는 돌아올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밖에는 눈발이 흩날리고 장사를 나간 어머니는 저 멀리 돌아오고 있다. 한 그림엔 아이가 밖을 응시하는 모습이고, 한 작품은 기다림에 지친 아이가 고개를 외로 틀고 있는 모습이다. 또 한 작품에선 약간 고개를 앞으로 숙인 모습이다. 세 작품에 나타난 아이의 표정이 기다림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 작품엔 소년과 어머니 사이에 새 한 마리를 그려 넣었다. 보통 새는 메신저를 나타내므로 아이와 여인을 잇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 그러니 여인은 어머니 일수도 있고, 아내의 모습일 수도 있다. 어쩌면 어머니와 아내 두 상징이 한데 어울려 있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장면을 여러 가지로 변주한 이 그림들은 비록 작은 크기에 간단한 설정으로 그려져 있지만 이중섭이 한 가지의 소재에도 얼마나 많은 배려를 쏟았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비운의 죽음
 

이중섭 <은지화>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 황정수

 
1956년 1월 맥타가트는 뉴욕 현대미술관에 은지화 3점의 기증 의사를 표명하고, 미술관에서는 이를 검토하고 심의 절차를 거쳐 소장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이중섭은 정릉에서 거주하면서 주변을 산책하며 스케치를 하는 등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본격적인 작품은 아니더라도 삽화와 표지화를 다수 제작했다. 

하지만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거식증 탓으로 영양이 부족해져, 황달 증세가 심해지고 정신 분열 증세도 보이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한묵은 그를 청량리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7월 중순에는 간장 질환까지 악화됨에 따라 서대문에 있는 서울적십자병원으로 옮기게 된다. 이런 친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9월 6일 목요일 오후 11시 45분, 서울적십자병원 311호에서 지키는 사람 없이 비운의 천재 화가 이중섭은 간장염을 사인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더욱이 무연고자로 분류되어 3일간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었다. 사흘 째 되던 날 병원을 찾은 김병기가 이중섭의 사망을 알게 되어,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해 9월 11일 고별식을 가지고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한다. 어릴 적 고향 친구가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거둔 것이다. 이중섭의 유골은 망우리의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유골의 일부는 박고석과 구상이 수습하였다. 구상은 1년 뒤 도쿄에서 있었던 펜 대회에 참석하게 되자, 이를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에게 전해주었다. 

이중섭의 득의작 <벚꽃 위의 새>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에서는 이중섭 탄생 백주년 기념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는 대성황을 이뤄 새삼 이중섭의 인기를 실감하게 하였다. 그를 박수근과 함께 국민화가라 부르는 이유를 알만 했다. 그런데 주최 측은 전시기간 중 특별한 이벤트를 진행하였다. 

관람객들에게 전시된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묻는 행사였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작품의 선호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동안 이중섭을 상징하는 작품으로는 보통 <황소>를 꼽아왔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황소를 그린 작품이 1등을 할 것이라 예상하였다.
 

이중섭 <벚꽃 위의 새> ⓒ 황정수

 
결과는 예상과는 달리 <황소>를 제치고 일반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인 <벚꽃 위의 새>가 단연 많은 점수를 받아 1등으로 뽑혔다. 관계자들은 세월의 흐름과 세대 간의 미에 대한 감성의 차이에서 온 의외의 결과에 매우 놀라워했다. 그러나 필자는 마음속으로 결과에 내심 흐뭇했다. 

필자는 이 작품의 소장자와 평소 친분이 있어 이 작품을 자주 보아왔던 터였다. 필자는 늘 소장자에게 개인적으로 <벚꽃 위의 새>가 이중섭의 작품 중 가장 서정성이 뛰어나 제일 훌륭한 작품이라 역설하곤 하였다. 그러고 나서도 그저 우리끼리의 이야기라면서 즐겁게 웃곤 하였다. 한편으로 약간의 인사치레와 개인적인 취향의 개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결과가 여러 언론에 나자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얼마 후 즐거운 전화 한통을 받았다. 결과에 즐거워진 소장자가 필자를 초대한 것이었다. 가끔 만나며 했던 몇 마디 말 때문에 모처럼 거한 대접을 받았다. 

이 작품은 이중섭의 작품 중에서 가장 서정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벚꽃 피는 봄날의 정경 중에서 한 장면을 포착하여 그렸다. 흐드러지게 핀 꽃 한 가지에 새 한 마리가 내려앉자 꽃송이가 눈처럼 떨어져 내린다. 새는 가지에 내려 앉자, 한 쪽에 앉아 있는 청개구리 한 마리를 노려본다. 서로 바라보는 품새가 긴장감이 역력하다. 두 생명체 간의 생과 사를 넘나드는 긴장감에 꽃을 찾으러 왔던 벌 한 마리는 깜짝 놀라 화면 밖으로 막 도망가려는 참이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강자와 약자의 생존 경쟁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 작품을 강자와 약자로 해석해서 일본과 한국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도 있으나, 이중섭의 심성이나 사고를 보아서는 자연의 질서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당시 동양화가 중 감각적인 필치를 자랑하던 묵로 이용우의 작품 중에 이와 유사한 구도의 작품이 전하는 것은 작품의 연원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후일담 한두 가지
 

하야마에서의 김병기 강연 모습 ⓒ 황정수

 
지난해 세상을 떠난 백영수 화백과 친분이 있어 살아생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에 이중섭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 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부산에 살 때 자주 가던 다방에 이중섭이 급히 찾아왔다고 한다. 대개 이런 경우는 돈이 필요해서 찾는 경우였다고 한다. 돈을 조금 변통해주자 호주머니에서 하얀색 에노구 물감을 꺼내 탁자에 놓더라는 것이다. 그때 이중섭에게 있어 하얀색 물감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그 물감을 내놓는 그 고운 손을 보고 마음이 애잔했다고 한다. 

이중섭은 친구들과 술 한 잔을 하면 가끔 한쪽에서 훌쩍거리며 울었다고 한다. 그러면 옆에 있던 김환기가 화를 내며 야단을 쳤다고 한다. 감성이 유난히 예민한데다 기복이 심해 그런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섭의 성격과 정신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일이다.

또 한 가지 이야기는 이중섭의 어릴 때 친구이자 문화학원을 같이 다닌 김병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필자는 2015년 일본 하야마라는 곳에서 열린 전시회에 관여하며, 그곳에서 열린 김병기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당시 김병기의 나이가 100세였다. 그는 나이가 무색하게 열정적인 강연을 1시간가량 진행하였다. 마치 70세 정도 되는 노학자의 강연처럼 들렸다. 내용은 문화학원 다닐 때의 상황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는 이중섭의 이야기가 많았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미 60년 전에 나이 40세에 세상을 떠난 이중섭의 친구가 60년 후에 100살의 노인이 되어 옛날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는 것이었다. 이 또한 새로운 전설의 한 장면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중섭은 일찍 죽어 신화가 되었고, 친구 김병기는 올해 103세의 최고령 현역 화가로 활동하고 있으니 새로운 신화라 아니할 수 없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영원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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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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