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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3.29 08:14 수정 2019.03.29 17:05
"저랑 같은 말 쓰는 형아 만나고 싶어요." 

생후 만 3년이 조금 안 된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한국인을 마주하기 힘든 핀란드 북부에 살고 있다 보니 아이는 자신의 모국어를 쓸 곳이 오직 가정뿐이었다. 아이가 구사하는 언어의 대부분이 부모에게서 왔다고 볼 수밖에 없는 제한된 모국어 환경에서, 아이는 고맙게도 한국어를 잘 구사하고 있다. 부모인 우리가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감정을 깊이 교류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요즘 들어 아이는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을 더 만나고 싶어 했다. 아이의 말에 한편으론 가슴이 쓰렸지만 다른 언어를 구분할 수 있고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대견했다.

다행히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큰 무리없이 핀란드어로 간단한 단어로 의사 표현을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모국어의 완성 수준에 비해 그만큼 따라 올라오지 못한 핀란드어를 구사할 때마다 답답해 했다. 발화욕구가 크고, 상대방과 언어로 장난하면서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아이의 성격 때문이었다.  

"충분히 똑똑해요" 한국 엄마 달래주는 핀란드
 

핀란드 어린이집에는 그 흔한 알파벳 벽보조차 붙여 놓지 않는다 ⓒ 김아연

 
3-5세반으로 올라가는 첫 상담을 할 때 "아이의 어떤 부분이 발달되었으면 좋겠니?"라는 교사의 질문에 주저없이 "언어"라고 대답했다. 그 이후로 담임교사는 하원할 때마다 아이가 오늘 하루 구사한 새로운 단어, 문장을 말해주곤 했다. 오후 3시부터 4시 사이에는 어린이들이 어린이집 운동장에서 놀다가 부모와 함께 하원하는데, 덕분에 매일 오후 어린이집 놀이터는 나와 선생님과의 상담 장소가 됐다.  

"아이가 언어로 조금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아요."
 
나의 고민 섞인 말에 아이 담임교사는 "아이는 충분히 똑똑하고 서로 다른 언어를 구분한다, 핀란드어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줄도 안다, 그것이 출발이다"라는 말로 나를 늘 격려했다. 핀란드 사회는 자꾸만 한국 엄마 특유의 조급증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핀란드에 도착한 이후, 6개월 때부터 아이에게 한글 단어 하나를 알려줄 때, 핀란드어 단어를 하나 더 추가해서 알려주곤 했다. 하지만 담임교사는 한국가정에서만 자란 아이가 1부터 10까지 핀란드어로 숫자를 세는 것을 오히려 의아하게 여겼다.
 

어린이집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것만 가르친다 ⓒ 김아연

 
신기하게도 핀란드 어린이집 안에는 '가나다' 한글 벽보 같은 'ABC' 알파벳 벽보가 없다. "읽고 쓰는 교육은 자신의 이름을 알아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게 교사의 말이다. 어린이집에서 받은 글자교육이란 아이가 그린 그림 하단에 자신의 이름을 쓰게 하는 것뿐이었다. 대신 낮잠 시간을 비롯한 일과 시간에 동화책을 자주 읽어주며, 완성된 언어를 귀로 접하게 했다. 체계화된 글자 교육은 6세부터 시작되는 프리스쿨(EsiKoulu)에서 시작된다. 

요즘 아이는 만나는 상대방에 따라 언어를 전환한다. 어쩌다 한국인 이모, 삼촌, 그리고 또래 한국친구들을 만나면 더 신나서 떠든다. 하지만 핀란드인 친구들을 만나면 다시 핀란드어로 언어를 전환한다. 핀란드 이중모음을 발음할 땐 한국어와 전혀 다른 발음기관을 사용하기도 하고, 억양마저도 핀란드인처럼 변한다. 한국에서만 나고 자라 교육을 받은 내가 겪지 못했던 경험이다. 아이는 자연스럽게 세상엔 서로 다른 언어가 있으며, 언어를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더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국제 가정이 많다 보니 언어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눌 기회가 많다. 알고 지내는 한 핀란드인-중국인 가정은 얼마 전 주핀란드중국대사관에서 중국어 교재를 받았다고 했다. 핀란드에 거주하는 중국인 가정을 대상으로 한 아이들의 모국어 지원책이라 했다. 핀란드에서도 중국어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어서 중국어를 배우는 핀란드인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이 가정의 아이가 만일 두 언어를 모두 잘 구사할 수 있다면 이 사회에서 얼마나 경쟁력 있게 성장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됐다.
 

핀란드에 거주하는 중국인 가정을 위해 대사관에서 집집마다 보낸 중국어책 ⓒ 김아연

  
필요와 흥미에 따라 배우는 사람들

핀란드에는 핀란드어와 스웨덴어 두 가지 공용어가 있다. 따라서, 두 가지 언어는 기본이고 영어 그리고 또 다른 제3의 언어까지 추가해 공부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핀란드 안에서는 복수의 언어를 구사할 있는 사람이 많다.

핀란드인은 영어도 꽤 잘 구사하는 편이라 정착 초기에는 슈퍼마켓에 가도, 택배를 받을 때도, 모든 영어 소통이 가능해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 텔레비전을 틀면 핀란드어, 스웨덴어로 된 채널이 따로 있고, 심지어 영어권에서 만든 콘텐츠를 더빙 없이 핀란드어 자막만 붙여서 내보내기도 한다.
 
아이가 이중언어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 때문에 아직 영어를 가르치지는 않았다. 아이가 가장 당황할 때는 한국어도 아니고, 핀란드어도 아닌 영어로 부모가 사람들과 대화할 때다. 언젠가는 아이도 영어를 배우겠지만 엄마의 욕심이나 조급증 때문에 그 시기가 결정되지 않길 빈다. 성문종합영어를 배우며 머리를 쥐어 뜯고, 수년간 영어학원에 돈을 바쳤지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엄마인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결국 언어는 필요에 의해서 발달하고, 흥미로 인해 성장한다는 것을 부쩍 깨닫는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글을 업으로 가졌던 엄마로서 아이에게 바라는 소망이 있다면,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자신이 가진 생각을 한 편의 글로 잘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언어의 확장은 결국 사고의 확장이라고 했던가. 단 한 가지의 언어라도 탄탄하게 잘 다진 후에 그 안에서 무한한 상상과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모국어가 주는 안정감과 기쁨은 사실 엄마인 나도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아, 엄마도 사실 한국말 하는 친구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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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광고회사와 서울시청 홍보부서에서 일하다 3년 전에 핀란드로 이주해 북극권 길목에 자리잡은 로바니에미에 살고 있다. 최초 핀란드 팟캐스트 '내귀에 핀란드' 운영자이며, 3살 난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엄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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