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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1.23 08:26 수정 2019.01.23 09:37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일본 국기를 가슴에 단 손기정이 월계관을 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을 때부터 독일은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무대 중 하나였다. 그후 윤이상, 임수경, 송두율, 그리고 최순실까지 말이다. 하지만 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이야기도 켜켜이 쌓여있다. '권은비의 베를린 오 베를린'에서는 그 평범하고도 비범한 시간들을 전한다. 첫 순서는 파독 간호사 서의옥씨의 이야기다. 이 기사는 그 마지막회다.[편집자말]

베를린 자택 거실 테이블에 앉아있는 서의옥씨 ⓒ 권은비


[*2화 ""애 둘에 유모차 끌고 북한 갔다온 여자, 접니다""에서 이어집니다.]

1974년, 시집 간 언니들이 "완전히 노예"처럼 사는 걸 보고 '탈조선'을 감행한 의옥은 독일에서 눈과 귀가 트였다. 파독간호사로 일하던 어느 날 한글 활자가 반가워 사온 신문 몇 부가 그를 바꿔놓은 결정적 계기였다. 

그 신문은 동아투위 해직 기자가 발행한 것이었다. 거기엔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던 고국의 엄혹한 현실이 담겨있었다. '바꿔야 겠다'고 마음먹은 의옥은 1978년 서울 동일방직여성노동자들과 연대하고, 1980년 광주항쟁을 알리기 위해 베를린 시내를 "미친 듯" 뛰어다녔으며, 1990년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대회(남과 북, 해외동포가 참여한 민간 주도의 통일행사)까지 진출한다.  

"촛불집회 이후부터는 당당하게 한국을 자랑할 수 있다"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대회에서 아이들과 함께 행진하는 서의옥씨 ⓒ 서의옥

 
- 1990년 범민족대회 참석 후 후폭풍은 없었나?
"범민족대회에 갈 때 유럽지부는 남한 통일부에 정식으로 신고하고 갔었다. 게다가 나는 독일여권이 있었다. 그때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는 한국여권 소지자도 있었는데 후에 누군가 아버님이 위독해서 한국에 갔었는데 별 문제 없이 입국했었다. 남한의 공안당국은 조직에 속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무 소속도 없는 사람들을 잡아가더라. 그런 사람들을 시기적절하게 써먹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 중 교민 한 명은 고문 후유증을 갖게 된 사람도 있다. 난청이 심해졌다고 했다.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 내부에서도 좋은 시선만이 있지는 않았다. 교민사회에도 굉장히 반북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를 고립화 시키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렇게 서슬 퍼런 시대였고, 어떤 사람들은 북에 다녀온 사람인 나와 같은 모임에 있다는 것 자체가 단체를 위협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 왜 그때 독일에서 조작간첩 사건이 많았을까. 동시에 교민들의 민주화 운동이 활발했던 이유도 뭐라고 보는지 궁금하다. 
"여기엔 북한대사관이 옛날부터 있었다. 북한과 접촉하는 것이 한국에서처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독일이라는 나라가 가진 진보적 성향도 큰 역할을 했다. 1990년 이전까지는 동·서독이 분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일 국민들도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고, 북한 인사가 동베를린에 있기 때문에 통일운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조성되었다. 당시 독일에 한인 간호사, 광산 노동자들이 많았던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독일 언론이 보도하는 한국에 대한 뉴스를 보면서 한국사회를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얼마 전에는 북한대사관에서 보낸 초대장도 받았다. 물론 가진 않았지만. 이런 것이 여기서는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통일운동을 해외에서 하다 보면 중립을 지키기가 어렵다. 운동진영에서 '통일'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분열이 심해지는 것 같다. 서로 이간질시키고 조직이 와해되는 순간을 한두 번 겪었던 것이 아니다."
 

서의옥씨가 2017년에 받은 북한대사관의 초대장 ⓒ 서의옥

 
- 베를린이 오히려 한국에 있는 비무장 지대보다 훨씬 더 평화롭고 남북 간 교류가 가능한 장소인 것 같다. 그렇다고 독일에서의 생활에 어려움이 없진 않았을 것 같다. 
"옛날부터 국가가 우리를 위해 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파독간호사로 해외에서 지냈을 때, 국가를 대변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파독간호사와 광산노동자들 위에서 군림하려고 했다. 보호를 받지 못했다.

그 중 한 예로 1990년대 초반에 어떤 여학생이 여기서 피살당했다. 나중에 밝혀지기를 미군 병사가 범인이었는데 공원에 잠입해 있다가 지나가던 여성을 강간을 하고 살해했다. 그게 공교롭게 한국 유학생이었다. 당시 한국에도 알려졌었다. 공관에서는 우범지역에 가지 말라는 공고만 내릴 뿐이었다. 그저 옷 잘 입고 다니라고만 했다. 

당시에는 공관의 횡포가 대단했다. 공관 주변에는 아부하는 사람이 모였다. 독일에서만 간첩이라는 이름으로 잡혀간 사람이 몇 명인지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정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안보라는 이름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일들을 해오지 않았나. 이제는 국민들이 경각심을 갖고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이 잠잠했던 화산처럼 폭발력을 갖고 나올 수 있다는 걸 정치인들이 알아야 한다."

- 처음 독일에 도착했을 때 본 한국과 지금의 한국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나?
"1981년에 독일 국적을 취득했다. 나라가 가난할 때 나왔다. 독일에서 일을 하다가 어쩌다 한국 공항에 도착하면 가난이라는 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덜미를 잡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여기서 부유하지는 않지만 누구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고 살 수 있다. 처음에는 한국이 약소국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주눅이 들었다. 촛불집회 이후부터는 당당하게 한국을 자랑할 수 있다."

- 여성으로서, 외국인으로서, 타지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내가 한참 아이들을 키웠을 때 주변 독일 친구들이 이른바 '68혁명' 세대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공동육아시설을 만들어서 운영했다. 그 속에서 내가 외국인이라는 생각은 특별히 못했었다. 학부모들이 함께 유치원 교사들을 채용하고, 돌아가면서 음식도 만들고, 교사들과 토론도 했다. 사회가 원하는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자신의 의식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육 목표였다.

그렇게 아이들을 키우면서 페미니즘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다. 페미니즘에 대한 책들도 찾아보고 읽기 시작했다. 독일에는 다양한 공동체가 존재한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 공동체를 알게 되면서 여성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반전·반핵, 환경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됐다. 얼마 전 딸아이가 '엄마, 나는 건강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이야기하는데 참 뿌듯하더라.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종을 쫓기보다, 직업의 차별 없이 주체적으로 자신을 삶을 당당히 살겠다는 다짐 같아서 고마웠다."

- 지금까지 독일 생활은 당신에게 어떤 시간이었나?
"굉장히 치열하게 살았다. 내 나이 50세가 되었을 때, 운동의 중심을 독일에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이가 드니까 내가 누울 자리는 알아야하지 않겠나.(웃음) 막연히 한국 쪽 하늘만 바라보는 것은 허송세월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과 관련된 운동을 접고 여기서 평화운동과 반전운동, 환경운동에 중심을 두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몇 년 정도 한국에 관한 뉴스를 끊었다.

그러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고 '최순실 게이트'까지 일어났다. 그 후로는 낮에는 대체의학 진료 일을 하고 저녁에는 한국 뉴스들을 챙겨본다. 매일. 관심이 가는 기사들도 찾아본다. 공부해야 한다. 나는 뭐든지 궁금한 건 찾아봐야 한다. 안다는 걸 과시하는 목적이 아니라, 사실관계를 정확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서의옥씨가 살고 있는 공동주거주택 내부 ⓒ 권은비

 
- 지금 살고 있는 주거공간에 대해서도 설명해달라. 
"독일에서 성공사례로 꼽히는 주거공동체이다. 이 주거공동체가 사람들을 모았고, 사람들은 쓰임새가 없던 국가 공유지에 지을 집을 함께 설계했다. 여기엔 몇 개의 건물이 있는데 각 건물마다 정해진 공동체가 있다. 

우리 공동체는 매주 돌아가면서 함께 장을 본다. 이땐 최소한의 원칙이 있다. 공장식 사육을 하지 않는 달걀과 고기, 유제품을 사고 유기농 제품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기본 식재료 등을 돌아가면서 산다.

이 주거공동체의 전제조건은 집으로 수익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마다 모은 자금과 은행 융자를 합쳐서 함께 집을 지었더니 한 달 집값이 주변 시세보다 훨씬 저렴하다. 주거 시설과 환경 역시 최신식임에도 말이다. 부동산으로 이익을 얻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사람들이 집을 지으면 나는 이것이 한국에서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마지막으로 삶의 철학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냥 품위 있게 자유롭게 살자.(웃음) 그런 거다. 불의를 보면 용납하지 않고 사회운동으로서 같이 한다는 것. 내가 나 자신을 믿는 것. 스스로에 대한 믿음. 어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내 철학이라면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연민을 갖지 않고 과거에 살지 않는 것, 그렇다고 미래에도 살지 않는 것, 지금 현재에 사는 것이 내 목표다."
 

베를린에서 1997년 한국의 탈핵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는 서의옥씨 (오른쪽에서 네번째) ⓒ 서의옥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내 손은 자꾸만 19살 서의옥의 흑백 사진으로 향했다.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의 나이를 실감할 수 없어서였다. 그것은 그 특유의 유머스러움과 쿨함이 장착된 미소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눈에 비친 서의옥은 한국 미디어에서 정형화된 파독간호사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타지에 나가 집안을 일으켜야만 했던, 서럽고 안쓰러워 동정의 대상이 되는 그런 여성 말이다. 누구보다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낸 페미니스트이자 액티비스트였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은, 어쩌면 머나먼 독일 땅에서, 40년 넘는 시간 동안 한국의 아픈 역사를 세계에 알리고, 늘 두 손에 피켓을 든 채로 베를린의 광장으로 나섰던 그의 굳은 의지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인이 아니라,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광장에서 자신의 자리를 채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현재의 시간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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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독일해외통신원. 한국에서 공공미술가로 활동하다, 현재 독일 베를린에서 대안적이고 확장된 공공미술의 모습을 모색하며 연구하고 있다. 주요관심분야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 공동체안에서의 커뮤니티적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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