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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3.22 08:28 수정 2019.03.22 08:28

핀란드 로바니에미 산타빌리지에 있는 북극권(Arctic circle) 표시 기둥 ⓒ 김아연


"지금 밤아침이야?"
"응, 깜깜한 아침이야. 겨울에는 햇님이 졸려서 늦게 일어나." 

 
창문 밖은 깜깜한 밤인데 옷을 입으며 어린이집에 가야 하는 상황이 영 이상하다고 느낀 아이가 지금이 '밤아침'이냐고 물었다.

북극권에 진입하는 길목에 있는 우리 도시는 겨울이면 일조시간이 하루 2시간 미만으로 줄어든다. 아침에는 11시가 넘어야 해가 뜨고, 오후 2시가 지나면 다시 어두워진다. 12월 21일이 되면 해가 아예 뜨지 않는 날이 오는데, 그때까지 해는 계속 짧아지다가 22일부터 해가 다시 길어진다. 극야(Polar night) 현상이라고도 하고 핀란드어로는 까모스(Kaamos)라고도 부른다.
 
어쩌면 전 세계에서 가장 북위에서 사는 한국 어린이가 우리 아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핀란드 라플란드에 살면서 한국에서 가진 단어와 개념으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 너무 많았다. 여름에는 아예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도 그렇고, 겨울 밤이면 하늘에서 춤추는 오로라도 그랬다.

멋부리고 등원? 여기서 옷은 생존의 영역 
 

오후 3시 30분 경, 야외활동을 하면서 운동장에서 아이를 찾아가는 어린이집 풍경 ⓒ 김아연

 
한 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도 떨어지는 곳이지만, 평소 영하 10도 정도의 날씨까지는 야외활동이 계속됐다. 핀란드 어린이집에서는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최소 1번 이상 야외활동을 한다.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면 낙엽이 장난감이 되고, 눈이 오면 눈이 장난감이 되었다. 엄마들에게 필요한 건, 걱정이 아닌 철마다 바뀌는 환경에 맞는 적절한 옷을 챙겨 보낼 의무였다.
 
한국에서는 롱패딩이 인기라지만, 이곳에서는 어릴 때부터 오버럴(핀란드어로 Haalari)을 자주 입는다. 핀란드 겨울 오버럴의 특징이 있다면 팔이나 다리 쪽에 빛에 반사되는 재질의 소재가 함께 붙어 있다는 것이다. 모두 깜깜한 겨울을 안전하게 지내기 위해서다. 방수, 방풍의 기능도 함께 갖고 있어 겨울철 눈 위에서 아무리 굴러도 옷 속으로 눈이 들어갈 염려가 없다.
 

추위와 어둠에서 살아남기 위한 겨울 오버럴(Haalari) ⓒ 김아연

 
겨울 오버럴 외에도 신발, 장갑, 모자, 양말, 내의까지 겨울철 옷입기는 모든 것이 매뉴얼로 정리되어 있다. 어린이집에서는 겨울철 옷입기 순서를 부모들에게 늘 공유하고 빠진 것이 있으면 공지해주었다. 지금까지 어린이집에 등원하는 어린이 중에 멋부리기에 더 방점을 두어 털코트를 입고 오거나 롱패딩을 입고 오는 친구를 본 일이 없다. 핀란드에서 옷 입기는 생존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야외 활동이 끝나면 젖은 옷이나 장갑은 내부에 마련된 건조기에 말려 둔다. 하루 중, 옷을 입고 벗는 일이 많다 보니 이름을 잘 써두지 않으면 물건이 섞이는 일도 많다. 하원 시간에 아이를 데리러 가면 사물함에 있는 아이의 옷과 소품을 살펴보고 채워 넣을 것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게 중요한 일과였다.
 

어린이집 건조기 문 앞에 붙어 있는 겨울철 옷입기 매뉴얼 ⓒ 김아연


어린이집에서 노는 것도 모자라 더 놀고 싶은 날에는 핀란드판 키즈카페로 차를 돌린다. 어린이들의 실내놀이시설인 호프로프(Hoplop)에 가면 대부분 몸으로 뛰며 체험하는 것이 많다. 정글짐에 올라가고, 트램폴린을 뛰고, 자전거를 탄다. 한 겨울에도 반팔만 입어야 할 정도로 땀을 흥건하게 흘리고 돌아오곤 한다.

초등학교 이상 연령대가 많이 찾는 슈퍼파크(Superpark)에서는 아이들이 암벽등반을 하고, 농구 게임을 하고, 실내하키를 하며 방과 후 시간을 보낸다. 여름보다 상대적으로 실외활동이 어려워지는 겨울철이 되면 수영장을 포함한 각종 실내체육시설은 더욱 붐빈다.

몸으로 논다는 것
 

핀란드 어린이 실내 체육시설 슈퍼파크(Superpark) ⓒ 김아연

 
몸으로 노는 것이 먼저인 나라이다 보니 아이가 장난감이나 캐릭터, 만화 같은 것에 집중하지 않아서 좋다. 한국에서는 특정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알지 못하면 또래 아이들끼리 놀이와 소통이 어려워진다는 말을 들었다. 실내에서 노는 시간이 더 많다 보니 생기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한 아이들이 철마다 바뀌는 하늘의 색감을, 눈의 촉감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처음 만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화면 속 세계는 현실의 모방일 뿐이다.
 
자연을 책으로만 경험하는 것도 슬픈 일이다. 한국에서 소위 자연관찰 책 시리즈는 한국 엄마들에게는 필수 도서목록 중 하나다. 책에서 동물의 소리를 듣고, 책으로 식물 이름을 외운다. 사실 가장 좋은 책은 바깥에 있다. 그저 아이를 바깥으로 끌어내기만 해준다면 아이는 자신이 가진 감각기관으로 스스로 만지고, 스스로 맛보며 세상을 터득해 간다.

아이들은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어른들에게는 이미 무뎌진 겨울의 풍경이 아이들에게는 모두 생애 처음일 수 있다. 두 발 밑에 뽀드득 뽀드득 부서지는 눈밭의 질감이, 꽃처럼 예쁘게 피어나는 눈꽃송이의 모양이 하나의 교과서이자 놀이가 될 수 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어쩌면 내가 가진 세계를 다시 한번 뒤집는 일의 연속이다. 나에게 당연했던 것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설명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 투성이니까. 하지만 아이는 우리가 모르는 새 바깥 세상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겨울철 극지방에서 일어나는 흑야 현상을 어렵게 설명해주지 않았어도 '밤아침'이라는 스스로 만든 단어로 한 번에 이해해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새하얀 첫 서리가 내린 날 벤치 위에 눈을 손으로 쓸어 담고 있다 ⓒ 김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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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광고회사와 서울시청 홍보부서에서 일하다 3년 전에 핀란드로 이주해 북극권 길목에 자리잡은 로바니에미에 살고 있다. 최초 핀란드 팟캐스트 '내귀에 핀란드' 운영자이며, 3살 난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엄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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